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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묘표墓表에 쓴 추사 글씨는 낯이 설다

추사 김정희가 만년에 쓴 비문, 임실서 발견

송고시간 | 2019-05-16 14:07

전주최씨 최성간 묘비…"장중하면서 짜임새 있는 작품"




광화문 복원 즈음, 그 현판 글씨를 어찌해야 할 지를 두고 한창 논란이 벌어지던 와중에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얼마나 진심을 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추사 김정희 글씨를 집자하는 방법도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못내 캥기는 점은 있는지, 내 기억에 스스로 말끝을 흐리기를 


"한데 말이야, 추사 글씨는 현판에는 안 어울려" 


라고 했다. 


아마 어떤 기자간담회 석상이 아니었는가 싶은데, 실은 기자들 반응을 떠보고자 함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서 내가 받아쳤다. 


"추사는 경복궁과 전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추사는 경복궁을 구경조차 못해 본 사람이다."


뭐 추사 추사 하니깐, 더불어 그 자신도 추사 전문가라 생각했음인지 추사를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상 추사는 경복궁의 경자도 구경 못한 사람이다. 


경복궁은 조선왕조 법궁法宮이라 하나, 실상 조선왕조 전기에만 해당하며, 실제로도 법궁으로 기능한 역사는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런 경복궁은 임진왜란 중에 홀라당 불탔다. 누가 불을 냈을까? 조선의 신민들이었다. 


자신들은 놔두고 나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선조 일행이 죽도록 미워서 성난 백성들이 궁궐에다가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잿더미로 사라진 경복궁은 한동한 황무지였으며, 채소밭으로 개간되면서 똥물을 뒤집어 썼다. 왜? 채소를 가꾸려면 인분을 쓰야 했기 때문이다. 밭으로 변한 이곳을 농부들이 갈다가 벼루를 줍는 일도 있었다. 




그런 경복궁이 재건되기는 익히 알듯이 고종 즉위 직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서였다. 이때가 1860년대다. 


김정희는 1786년, 정조 10년에 나서 1856년, 철종 7년에 죽었다. 그러니 그는 고종 중건시대 중건을 토대로 하는 지금의 경복궁과는 그 어떤 인연도 없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의 글씨를 집자한 광화문 현판을 달지 말아야 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 해도, 지금의 경복궁과 직접 연이 닿는 글씨나 서예가가 굳이 많은데, 하필 김추사의 글씨리오?


그의 글씨로 현판에 걸린 것은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현존하는 것 중에는 강남 봉은사 '판전板殿'이 대표적이다. 


돌이켜 보면 김추사는 그의 한 세대가량 선배인 정다산이 그렇듯이 이상비대하게 신화화했다. 그 역사의 무게에 비추어 보면 지나치게 무게가 무겁다. 추사는 감량이 시급하다. 


그의 글씨로 된 조선후기 때 묘표墓表(첨부사진 두 장) 하나가 전북 임실 땅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글쎄, 그의 글씨라 해서 유별난 대접을 해야 하는지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글씨야 대하는 사람 마음과 정신이 문제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른바 전형적인 추사체는 저런 묘표 같은 데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서체가 눈에 익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영 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