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각宇文覺(542~557)은 생몰년을 계상하면 향년 16세에 지나지 않는다. 죽어서 얻는 시호에 민閔자 들어간 이 치고 장수한 사람 없고 비극적 최후 맞이하지 아니한 사람 없다.
그는 字를 불교에서 따온 다라니陀羅尼라 했고, 대군代郡 무천진武川镇(지금의 내몽고자치구 호화호특시呼和浩特市 무천현武川县) 사람으로, 북조北朝 서위西魏의 권신으로 정권을 장악한 우문태宇文泰의 적장자嫡长子로, 북주北周의 개국군주로 천왕天王이라 칭했지만, 실제로는 권신 우문호宇文護의 괴뢰傀儡에 지나지 않았다.
7살(주서周書에서는 9세 때라 했다)에 약양군공略陽郡公에 책봉됐으니 당시 관상을 잘 보는 사원화史元華가 그의 친척들에게 몰래 이르기를 "이 공자는 지극히 귀한 상을 타고 났지만 불행히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고 했다.
556년 3월, 서위西魏 공제恭帝 탁발곽拓跋廓이 우문각宇文覺한테 명하니 안정공安定公 세자世子가 되고, 4월에는 대사마大司馬를 제수했다. 10월에 이르러 우문각이 죽자 아버지의 태사太師와 안정공安定公 등의 관작을 이어받았다.
12월에 탁발곽은 또 하조下詔하여 기양岐陽 땅을 우문각한테 봉하여 주국공周國公이라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위禅位하고 제북공济北公 탁발유拓跋迪 보내 황제의 옥새와 수대绶带를 우문각한테 전달했다.
557년에[ 정식으로 천왕 자리에 즉위하니 이것이 바로 북주의 시작이다.
우문각宇文覺은 우문태宇文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자 성정이 과단성 있어 그 족당族堂兄 우문호宇文護가 전제하는 데 불만이 있어 사회司會 이식李植과 군사마軍司馬 손항孫恆 또한 우문각에 대한 불만이 많아 을불봉乙弗鳳과 하발제賀拔提 등과 함께 우문각한테 우문호를 죽이자고 하니 우문각이 동의했다.
이들은 장광락張光洛을 끌어들여 거사를 함께 하기로 했지만 장광락이 배신하고 이 일을 우문호宇文護에게 일러바쳤다.
이에 우문호는 이식李植을 양주자사梁州刺史, 손항孫恆을 동주자사潼州刺史로 삼아 이들을 외방으로 내쳐 버렸다.
을불봉乙弗鳳은 이로 인해 장차 우문호를 궁궐로 끌어들여 주살하기로 했지만 이번에도 장광락이 이 계획을 우문호한테 일러바치니 우문호가 도리어 위지강尉遲綱과 함께 폐립의 거사를 행하기로 하고 먼저 을블봉乙弗鳳을 죽이기로 하는 한편, 우문각 신변에는 시위를 없애고 하란상賀蘭祥을 보내 우문각宇文覺한테 퇴위를 강요하고 그를 핍박하여 약양공略陽公으로 삼아 구금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죽이니 나이 겨우 만 15세였다.
훗날 서제庶弟인 주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이 우문호宇文護를 죽인 뒤 황제로서의 자격을 회복케 하고 촉국공蜀國公 위지형尉遲迥을 파견하여 南郊에서 효민황제孝閔皇帝라를 시호를 바치고 그 능묘는 정릉靜陵이라 했다.
북주北周의 여러 능은 함양시咸阳市 위성구渭城区 장진张镇 일대에 있다.
2022년 7월, 서안西安 함양국제공항 건설에 따른 발굴에서 1개 동묘洞墓를 발굴하니 묘장墓葬 밖을 둘러 围沟가 있고, 묘도墓道가 있으며, 4개 천정天井과 1개 극히 작은 토동후실土洞后室이 있었다.
출토 유물 중에 간단한 15글자 墓志가 있어 “周故略阳公 / 宇文觉墓 / 二年十月 / 壬申”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
이를 통해 그의 능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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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北周 개국 황제 우문각宇文覺 묘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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