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함경도를 병합하고 나면 명나라로부터 간섭이 있지 않을까 항상 두려워했던 것 같다.
윤관의 비가 두만강 건너 선춘령이라는 구절도 그렇지만, 이 땅이 역사적으로 한반도 국가의 땅이라는 점을 어떻게든 증명하려 했다.
이런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경도에 대한 설명이다.
[A]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고, 동계(東界)로써 삭방도(朔方道)를 삼았는데, 함주(咸州) 이북이 동여진(東女眞)에게 함몰되어 예종(睿宗) 2년 정해 【송나라 휘종(徽宗) 대관(大觀) 원년(元年).】 에 중서 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B] 함주(咸州)에서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9성(九城)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 사신을 보내어 요(遼)나라에 알리니, [C] 천조제(天祚帝)가 회답하여 조칙(詔勅)하기를, "경(卿)은 황가(皇家)를 호위[藩衛]하여 해표(海表)를 진무(鎭撫)하고, 정토(征討)를 오로지하여 직분(職分)을 지켜, 도적을 쳐부수는 데 노고가 있도다. 싸움에 이김으로 인하여 항복을 받고, 드디어 강토(疆土)를 넓혀서 보루(堡壘)를 두어 이에 오로지 시설(施設)하니, 서로 화평하게 지냄이 편의할 것이로다. 지난번에 사신을 보내어 먼 곳까지와서 승첩(勝捷)을 알리니, 길이 찬미(讚美)를 할 만하므로, 진실로 위로하는 바이다." 하였다. 고종(高宗) 45년 무오(戊午)에 【남송(南宋) 이종(理宗) 보우(寶祐) 6년. 】 몽고병이 와서 용진(龍津)을 침범하니, 본현(本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반(叛)하여 화주(和州) 이북 땅을 가지고 몽고에 귀부(歸附)하매, 몽고에서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화주에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이 뒤에 또 원나라에 속(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丙申)에 【원(元)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6년. 】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보내어 화주(和州) 이북의 여러 성(城)을 수복(收復)하여 동북면(東北面)이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종 13년 계사에 이르러 【명(明)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 관내(管內)에 영흥(永興)·길주(吉州)가 있다 하여, 영길도(永吉道)로 고치었고, 16년 병신 【영락 14년.】 에 영흥부(永興府)를 강등시켜 화주목(和州牧)으로 삼고, 함주목(咸州牧)을 승격시켜 함흥부(咸興府)로 삼았다가, 곧 함길도로 고쳤다.
내용을 보면 간단하다.
[A]에서는 함경도가 원래 고구려 땅이고 고려시대에도 성종 때 동계 삭방도였는데 동여진이 함주 이북을 함락했다는 것이다.
함경도가 원래 고구려 땅이라는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고려 때 운운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다. 고려 건국 때 이미 이 지역은 여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B] 고려 윤관의 정벌로 뺏긴 땅을 되찾아 새로 경계를 만들었는데 그 비를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험진 선춘령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세종은 이 고개가 두만강 이북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C] 윤관의 정벌은 어디까지나 실지 회복으로 몰래 진행한 것도 아니고 당시 요나라에도 이 사실을 이미 통보하여 요황제가 이 사실을 축하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미 당시 다 공인받은 사실로 윤관의 정벌이 이미 문제가 없는 사실이었으니 그 땅으로 다시 진출해도 별 문제 없다는 뜻이 되겠다.
역대 어떤 식민 사업도 남의 땅 뺏는다는 구실로 시작되는 경우는 없다.
대개는 뺏긴땅을 되찾는다거나 야만을 개화한다거나 하는 내용을 명분으로 삼기 마련인데 세종은 이 두 가지 명분을 모두 구사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 related article ***
세종, 한국 역사상 영토 야욕이 가장 큰 군주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의 용원龍原이라는 이름 (2) (0) | 2022.12.26 |
---|---|
발해의 용원龍原이라는 이름 (1) (0) | 2022.12.26 |
한국 고대사의 기록이 빈약하게 된 것은 (1) | 2022.12.25 |
구스노키 마사시게 楠木正成 (1294~1336)와 칠생보국七生報國 (1) | 2022.12.25 |
마운령 경계선의 돌파: 월경 도망자들 그리고 이성계 (0) | 2022.1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