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은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일정 시점 이후에는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천문현상이었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보면 대략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시대 무렵이 되면 가끔 엇나기도 했지만 확실히 예측 가능한 시대로 돌입한다.
저 중에서도 월식은 솔까 있는둥없는둥 쳤다. 다시 말해 그닥 심각한 현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대신 대낮에 해가 가려지는 일식은 심각했다. 인간 세계를 대리 통치하는 군주가 그 통치를 잘못할 때 벌로써 내려는 현상 중 하나가 일식이라 해서 군주라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처럼 하늘과 지상이 서로 감응한다는 논리를 천인감응天人感應이라 한다.
한데 예측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가끔 어떤 날 일식이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는 기록이 더러 보인다. 이는 예측을 잘못했으니, 그에 따른 후속 조치가 따르기 마련인데 대체로 그런 일이 있다고 보고한 관상감 혹은 그 담당 관리를 잡아다가 족친다. 논리는 간단하다. "너 이 시키 일식 있다 해서 내가 온갖 쇼를 했는데 내 가오가 얼매나 상하노?" 이것 때문이었다.
일식은 하늘이 내리는 경고 혹은 벌이라 생각했기에 그것이 있다고 예고한 날 왕은 대개 소복 차림으로 한낮에 넓은 광장에 나가서 하늘에 죄를 빌며 앞으로 잘 하겠다 하는 쇼를 하게 된다.
한데 일식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이런 쇼가 아니다. 그것은 천벌 혹은 천계天戒라 생각했지만, 왕이 신민들한테 시혜를 베푸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내가 잘못해서 하늘이 벌을 내렸으므로 왕인 나는 어케 해야겠는가? 이제부터 잘 하겠다 해서 각종 시혜 정책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를 대비해 왕이 준비한 특례 조치로 가장 선호한 것이 죄수 풀어주기랑 세금 감면이었다. 이렇게 왕은 대개 말한다.
"하늘이 내 덕이 부족하다고 경고를 하셨으므로, 내 부덕의 소치를 알고 억울한 사람이 감옥에 가고 백성은 굶주리는데 내가 이를 살피지 아니해 이런 일이 벌어졌노라. 사형죄에 해당하는 죄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면하고, 가뭄과 흉년이 극심한 지역 백성들한테는 세금 절반을 감해주노라!"
우와 우리 임금님 만세!! 박수!!!!
전통 왕조국가에서 일식이 지닌 진정한 가치가 바로 이것이다. 백성들한테 시혜를 베풀 절호의 기회였다. 한데 천문예측을 잘못해서 있다던 일식이 없다? 왕이 개쪽 팔린다. 그래서 야마가 돌아서 담당 천문관리를 파직하고 두들겨 팼던 것이다. "야이 이 망할 놈아 너 땜에 내 가온 뭐냐?"
실제 이런 일로 개쪽 팔려 가오 상한 조선시대 임금으로 태종 이방원이 있다.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1407) 10월 1일 기사다.
서운書雲 부정副正 윤돈지尹敦智를 순금사巡禁司에 가두었다. 이에 앞서 윤돈지가 술자述者가 되어 아뢰기를,
"이달 초하룻날 사시巳時 초初에 일식日食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임금이 시신侍臣을 거느리고 소복素服 차림으로 정전正殿 월대月臺 위에 나가서 진시辰時부터 오시午時까지 기다렸으나, 일식日食이 없었다. 임금이 이에 소복을 벗고 들어와서 윤돈지를 옥에 가두었다. 그 이튿날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일식이 있어야 하는데 일식이 없었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작은 나라 임금이지마는, 천자天子 같은 이는 공구恐懼 수성修省하면 혹 이런 이치가 있을 것이다. 지금 갑자기 술자述者의 추보推步가 차오差誤가 있다고 하여 죄를 돌리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는가!"
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홍서洪恕 등이 지금 명나라 서울[京師]에 가 있으니, 돌아오면 윤돈지의 허망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윤돈지가 또 말하기를, ‘이달 보름에 월식月食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날이 되면 그 잘잘못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조금 뒤에 석방하였다.
간단하다. 이날 일식이 있다 해서 이방원이가 소복 차림으로 경복궁 근정전 월대에 가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제 백성들한테 잘 할끼니 봐주이소 하려고 하는데 어랏? 일식이 없네? 그래서 야마가 돌아서 일식이 있다고 아뢴 서운부정書雲副正 윤돈지尹敦智를 구속해 버렸던 것이다. 서운 부정이란 서운관의 넘버투, 요즘의 기상청 차장 정도됐다.
한데 가만 생각하니 졸라 쪽팔리는 일, 그래서 황희를 불러다가 "이래도 저래도 내 가오는 상했는데 이걸 우짜면 좋노? 니 생각 있나?"
하니 황희가 참 주군을 잘 섬기는 신하라, 두고 봅시데이, 돈지가 이달 15일에는 월식이 있다 캤응께 그거 보고 판단하이소 한다.
그렇다면 그달 15일 월식은 있었을까?
같은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16일 병신일 기사다.
금주 남교에 머물렀는데, 밤에 월식이 있다.
얼마 뒤 석방했다는 저 기사는 아마 이것을 말할 것이다. 윤돈지는 월식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
앞 인용문에서 우리가 유의할 점 중 하나는 월대의 쓰임이다. 월대란 무엇인가? 대문이나 큰 건물 앞마당에 설치한 단이다. 이 단에서 중요한 의식이 치러진다. 임금이 죄를 비는 곳이 월대요, 임금이 그 건물에 행차할 적에 그가 타는 가마를 두는 주차장이 월대다.
다시 말해 임금은 반드시 그 정전에 들어갈 적에 이 월대를 주차장으로 이용했다. 월대의 이 쓰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헛소리가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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