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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빗금에서 선으로의 이동이다.
측량은 선을 긋고 경계를 수치화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 유길준이 측량 학교를 세웠겠는가?
측량없이 선을 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도 경계는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계는 언제나 빗금이라 언제나 그 빗금의 소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측량을 도입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한 곳이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조사사업이었다.
이 사업이 실시되고 그것이 적용됨으로써 조선왕조 500년을 옥죈 산송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저 두 사업으로 조선총독부가 토지와 산림을 수탈했다는 신화가 자리잡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토지 산림 수탈은 금을 긋지 않은 상태에서 빗금으로만 존재하던 구역에서 늘 발생한다.
수탈은 전근대에 훨씬 더 많았다.
요즘도 이웃간 담장 구역이 어디까지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빈발한다.
그걸 누가 해결하는가?
법원인가?
측량이다.
측량은 그래서 근대의 신호탄이다.
유길준은 측량이 왜 중요한지를 절감한 선구자였다.
전근대 빗금이 대표하는 소유권 논쟁의 대표격은 소위 정계비다.
정계비.
이거 근대 같으면 선을 그었을 것이다. (2017.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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