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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측량, 빗금에서 라인으로

by taeshik.kim 2023.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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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빗금에서 선으로의 이동이다.

측량은 선을 긋고 경계를 수치화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 유길준이 측량 학교를 세웠겠는가?

측량없이 선을 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도 경계는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계는 언제나 빗금이라 언제나 그 빗금의 소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측량을 도입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한 곳이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조사사업이었다.

이 사업이 실시되고 그것이 적용됨으로써 조선왕조 500년을 옥죈 산송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저 두 사업으로 조선총독부가 토지와 산림을 수탈했다는 신화가 자리잡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토지 산림 수탈은 금을 긋지 않은 상태에서 빗금으로만 존재하던 구역에서 늘 발생한다.

수탈은 전근대에 훨씬 더 많았다.

요즘도 이웃간 담장 구역이 어디까지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빈발한다.

그걸 누가 해결하는가?

법원인가?

측량이다.

측량은 그래서 근대의 신호탄이다.

유길준은 측량이 왜 중요한지를 절감한 선구자였다.

전근대 빗금이 대표하는 소유권 논쟁의 대표격은 소위 정계비다.

정계비.

이거 근대 같으면 선을 그었을 것이다. (2017.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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