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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만에 쳐박힌 여몽연합 일본정벌 선단 잔해 지난 10년간 일본국 나가사키현 다카시마 해역 조사에서 일본 정벌에 나선 고려몽고연합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고선박 두 척 잔해가 발견됐다. 1호라 명명한 난파선은 해안에서 200m 떨어진 곳 수심 23∼25m 지점에서 일부 매몰된 상태로 발견됐다. 용골 keel 과 가보어드 garboards 는 분리된 상태며 격벽 bulkheads 은 없어졌다. 용골은 12미터에 이른다. 회수한 유물 중에는 밸러스트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돌탄 stone shot 과 벽돌도 포함됐다. 이 배는 중국 송나라와 명나라의 봉래호 Penglai ship 혹은 영파호 Ningbo ship 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비슷했다. 2호 난파선 역시 200m 떨어진 데서 13∼15m 깊이 두꺼운 퇴적층 아래 묻혀 있었다. 놀랍게도 용골.. 2024. 5. 24.
야요이 농경의 기원은 한반도 난대림 지역을 주목해야 논리적으로 볼 때 여기 말고는 일본열도에서 보는 고도로 집적한 도작촌의 발생을 예상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바로 한반도 남해안 난대림 지역에서 잡곡을 누르고 고도화한 도작촌이 형성되었다고 보며 이는 같은 한반도 남부 일대라 해도 난대림 이북의 온대림 지역과는 논의 비율에 있어 차원이 다를 정도로 높았을 것이라 본다. 어떻게 아는가? 쌀 농사가 됐건 잡곡 농사가 됐건 기온과 식생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온대림지역과 난대림 지역은 당연히 벼농사의 집적도와 고도화에 있어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바로 이 지역에서 야요이 도작촌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같은 송국리문화권이라고 해서 온대림 지역과 난대림 지역은 같은 모습의 농사를 짓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후자.. 2024. 5. 24.
한반도: 농경의 확산과 두 차례의 변화 한반도로 농경이 확산하는 단계에서 최소한 두 번의 변화를 우리는 점칠 수 있다. 첫째는 한반도에 먼저 들어와 있던 잡곡농경에 도작농경이 결합하는 단계다. 이 두 가지 농경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도입 시기는 도작이 잡곡보다 늦고, 도작은 한반도로 넘어오자마자 북쪽은 관두고 남쪽으로 확산을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 북부 어딘가에서 도작과 잡곡농경이 대대적으로 합쳐지는 단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혼합농경은 한반도 남부로 확산되어 갔을 텐데, 이 혼합농경은 도작과 잡곡의 하이브리드라 하지만 그 안에서 차지하는 도작 비율은 조선시대 전기 한반도 북부지역의 논 비율 10프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다지 크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혼합농경이 남하해 가는 단계 그 어딘가에서 도작 .. 2024. 5. 24.
주사위 놀이를 즐긴 인더스문명 파키스탄 고대 도시 인더스 밸리 문명 Indus Valley Civilization (기원전 2600-1800) 하라파 Harappa 출토 테라코타 주사위 Terracotta Dice 1995년과 2001년 사이에 하라파에서 발굴하는 동안 잔해에서 점 dots 이 1~6개인 입방형 주사위 cubical dice 가 발견되었다. 모헨조다로에서도 많은 주사위가 발견되었다. 존 마샬 John Marshall 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주사위는 모헨조다로 Mohenjo-daro 에서 흔한 게임이었다. 발견된 조각 수로 증명된다. 모든 경우에 그것들은 흙을 구워 만들었고 일반적으로 크기가 1.2 x 1.2 x 1.2인치에서 1.5 x 1.5 x 15인치 사이인 입방체다." 저 주사위가 한국문화엔 언제쯤 발.. 2024. 5. 24.
스파르타가 폭압적이었다고? 스파르타의 잔혹성, 무지, 동성애, 문화 부족에 대한 대중의 믿음 만큼이나 끈질기고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은 스파르타인들 Spartans 이 그들의 노예인 헬롯들 helots 에게 유난히 잔혹하고 억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기원전 413년에 약 2만 명에 달하는 아테네 노예가 스파르타인으로 도망쳤다. 이 억압받고 착취당한 사람들에게 스파르타인들은 해방자였다. 스파르타의 헬롯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https://spartareconsidered.blogspot.com](https://spartareconsidered.blogspot.com/ 2024. 5. 24.
딱정벌레 풍댕이를 숭배하는 사람들 다색 유리 페이스트 multicolored glass paste 와 준보석 semi-precious stones 을 상감 inlaid 한 금박 목재 gilded wood 로 만든 펙토럴 pectoral. 고대 이집트 신왕국 18왕조 또는 19왕조(기원전 1550-1186) 추정. 이 장식은 창조, 재생 및 태양의 떠오르는 신 케프리 Khepri 를 나타내는 큰 풍뎅이 딱정벌레 scarab beetle 를 중심으로 삼는다. 레 Re 신을 나타내는 태양 원반 상감 sun disc inlay 이 지금은 없어졌다. 풍뎅이 옆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자매 신 이시스 Isis (왼쪽)와 네프티스 Nephthys (오른쪽)가 있는데, 이들은 케프리를 숭배하며 두 팔을 들고 있다. 높이 10cm인 이 작품(AH 16.. 2024. 5. 24.
한국문명의 절반은 잡곡문명 우리는 잡곡농경을 폄하하면서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한국 문명의 찬란한 부분으로 인식한다. 이들도 쌀밥을 먹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한국학계의 생각처럼 십이대영자와 정가와자가 전기고조선을 대표한다면 이들이 쌀밥을 먹었을 확률은 거의 없다. 이들은 기장과 수수, 조밥을 먹었을 것이다. 한국문명의 절반은 잡곡문명인데, 우리는 이 잡곡문명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잡곡문명은 도작보다 열등한 문명으로 인식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흔히 말하는 만주벌판을 뛰어다니던 우리 조상들은 쌀밥 먹던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노란색 기장과 조밥 빨간색 수수밥을 먹던 사람들이며, 이들이 한강유역을 차지할 때까지는 쌀밥 구경은 못하고 살았음에 틀림없다. 평양일대의 논 비율이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10프로정도였는데,.. 2024. 5. 23.
7년전 금척리고분에서 오늘을 반추한다 2017년 5월 23일 나는 오세윤 작가랑 금척리 고분군을 어슬렁했다. 배얌이라도 구경하면 잡아서 놀 요량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배얌은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경주역으로 간판을 바꾼 신경주역 앞짝 무슨 산이라 해서 패러글라이딩장이 있는 그 만데이도 올랐다 기억한다. 저 금척리 고분군은 내가 언제나 경주 분지 중심 감은사지까지 동부라인에 치중한 관광벨트 분산ㅊ차원에서 개발이 필요하다 주장한 곳이라 마침 경주연구소에서 파제끼기로 한 모양이라 단순히 파제끼는 건 의미가 없고 경주 도시계획 재정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주장한 바 미안하나 그 점에서 나는 연구소 역량을 회의한다. 내가 지금껏 본 연구소는 오직 파는 데만 혈안일뿐 그 판것으로 그 큰그림을 그리는 재주는 전연 없다. 그래서 나는 연구소 체질을 발굴 .. 2024. 5. 23.
닻인가? 배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남쪽으로 약 19마일 떨어진 알반 언덕 Alban Hills 에 위치한 네미 호수 Lake Nemi 에서 회수된 고대 로마 닻. 서기 1세기에 칼리굴라 Caligula 황제가 건조한 네미 선박 Nemi Ship 일부다. 선박은 두 척이 발견됐다.이 네미호 칼리귤라 선박은 아래서 자세히 소개한 적 있다.  로마 인근의 화산분화구 호수 네미 Nemi와 칼리굴라 선박 2024. 5. 23.
Millet은 쌀보다 열등한 곡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millet을 잡곡이라 번역한다. 이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millet은 조, 수수, 기장 등 낱알이 작은 곡물을 뜻한다. 쌀보다 더 오래된 작물이다. 게다가 찬란한 황하문명, 그리고 요하문명은 모두 millet가 바탕이 되어 이루어졌다. 이 millet을 잡곡이라 번역하고 쌀보다 열등한 작물, millet farming은 도작보다 후진 농경으로 인식하다 보니 한국이 순수도작 사회가 아니라 혼합농경사회, 고구려 부여, 그리고 십이대영자, 정가와자 등은 잡곡 농경에 기반을 한 사회로 도작과는 거리가 멀다 라고 하면 후진 농업에 기반한 것이라고 폄하한 것이라해서 불쾌해 하는 경우가 많다. 거듭 말하지만, millet은 절대로 쌀보다 열등한 곡물이 아니며, 이 millet에 기반한 고대문명.. 2024. 5. 23.
[경기학예연구회 학술총서] 학예연구사가 바라본 경기도의 문화 경기학예연구회(회장 구본만)에서 첫 번째 학술총서를 간행했습니다. 그동안 경기학광장에 기고한 글들과 중부일보에 연재한 전통사찰 연재기사를 모아 “학예연구사가 바라 본 경기도의 문화”라는 제목의 학술총서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 발행일 : 2024년 4월 * 판 형 : A4(21X29cm) * 쪽 수 : 392쪽 * 발행처 : 경기학예연구회(비매품) 본 총서 간행을 위해 애써주신 구본만 회장님 이하 임원진분들, 작성한 원고를 기꺼이 내주신 각 지역 학예연구사 선생님들, 그리고 편집과 인쇄까지 전 과정을 위해 애써 준 김대순 선생님께 제일 감사드립니다. 2024. 5. 23.
탈레반이 녹여버린 불교 금화 이 주화는 아마도 초기 인도-이란 정착지가 있었을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조우잔 Jowzjan 주에서 발견되었다. 붓다 시대 이래 한동안 불교는 aniconic 애니코닉 이었다. (Aniconism은 간단히 말해 그런 신념을 조각 같은 구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전통을 말한다. 불교는 애초 태동기에는 불상이 없었다. 나중에 마케도니아 그리스 영향 아래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는 이 주화가 가장 이른 것은 아닐지라도 그 시절 유물 중 하나일 가능성을 높인다. 금화는 한 남자 전사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 동전과 같은 시대 그 무덤은 기원전 1세기 말에서 서기 1세기 초로 거슬러 시대가 올라간다. 이 금화는 아프간 카불박물관 Kabul Museum이 소장했으나 2001년 3월 탈레반 Taliban 이 파괴.. 2024. 5. 23.
야요이인은 단순히 인구압에 의해 이주한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에 인구압에 의해 일본열도로 이주가 시행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닌데,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현해탄을 경계로 과연 한국의 청동기시대와 일본 야요이시대 초창의 촌락이 비슷한 방식으로 도작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게 문제겠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일본이 논의 비중도 훨씬 높고, 잡곡에의 의존도도 낮았던 것 아닌가 싶다. 이것은 물론 향후 학계의 연구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만... 그러고 보면, 야요이인은 우발적으로 열도에 건너간 사람들도 아니고, 인구압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짐 싸들고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도 아니다. 일본열도의 기후가 벼농사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어떤 이유에서든 터득하고, 자신들이 한반도에서 시행하던 도작과 잡곡 중 도작에 훨씬 집중하.. 2024. 5. 23.
글씨로 만난 천하의 친일파 김대우 "하나, 우리는 황국신민이니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一、我等ハ皇國臣民ナリ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그 유명한 1조다. 1937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1874-1955)가 이른바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인들로 하여금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하게 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만들게 한 맹세문이다. 그런데 이 를 만든 건 일본인이 아니었다. 당시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이각종(1888-1968?)이 초를 잡고, 사회교육과장 김대우(1900-1976)가 수정 완성한 뒤 총독에게 보고하고 배포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봐도 '김대우'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대략 감이 잡힐 것이다. 과연 그는 일제 말 출세에 출세를 거듭해 전북도지사, 경북도지사까지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2024. 5. 23.
도작과 잡곡의 결합 최근 나오는 이야기의 하나가, 도작과 잡곡 농경의 기원을 분리하여 보는 것이다. 잡곡 농경은 도작이 본격화하기 전 족보도 없는 원시 농경이 아니라 두 가지 농경이 완전히 별개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농경의 흐름이 한반도 어딘가 (아마도 서북부-중부)에서 결합되어 도작과 잡곡이 혼작되는 혼합농경의 형태로 남하하다가 한반도 남부 어딘가에서 다시 도작의 밀도가 더욱 높아지고 이 흐름이 그대로 일본으로 이어져 야요이시대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잡곡 농경의 기원을 소급하여 따라 올라가면 부여-고구려에 요하 지역의 신석기시대 농경까지 올라간다는 것이고, 도작은 이와는 달리 산동반도-요동반도를 거쳐 유입되었으므로 양자는 한반도 서북부 언간에서 만나 한반도 혼합 농경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2024. 5. 23.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특별전 <유기鍮器 생활> 이화창립 138주년 기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특별전 2024년 5월 29일(수)부터 공개됩니다. *** Editor's Note ***  구리 품귀 시대에 유기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시각으로 접근할 것인가?  추후 좀 자세한 소식으로 정리해보겠다. 2024. 5. 23.
한국인이 아니라 왜인이 한반도에서 열도로 건너왔다는 이유 사실 이 주장은 반도왜인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일본의 인류학-유전학 쪽에서 제기되는 주장은 반도왜인설과는 약간 결이 다르며 그 출발점이 다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전학적으로 대륙에서 왔다는 도래계 야요이인은 조몽인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어 이들이 원래 열도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들은 현대일본인과 거의 비슷한 유전형을 가지고 있다. 현대일본인은 대부분 도래계 야요이인의 후예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들 도래계 야요이인이 과거에는 바로 한반도인과 동의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이 현대한국인과도 약간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물론 중국인과는 더 멀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에서 바로 건너온 사람들일 가능성은 낮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 2024. 5. 22.
돌고 돌아 돌아온 야요이인 이야기 필자가 팔자에도 없는 농경 이야기까지 하면 돌고 돌아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사이트에도 언급했었지만 최근에 Nature, Science 등 굵직한 학술지에 동북아시아 상고시대 인구이동과 농경에 대한 논문이 연쇄적으로 실렸다. 특히 이 논문들은 중국과 한국, 일본인의 형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이트에서 몇 차례 소개한 바 있다. 한반도 남단의 도작을 필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유전학자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1.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되는 사람들은 조몽인 등 토착계와는 많이 다르다. 분명히 대륙에서 넘어왔다. 2. 문제는 이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지금 한국인과 완전히 동일한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3. 이들은 .. 2024. 5. 22.
길가메시 서사시가 말하는 홍수신화 길가메시 서사시 Epic of Gilgamesh에  묘사된 아눈나키 Anunnaki 족과 관련된 홍수 신화 Flood Myth 는 엔릴 Enlil 신의 짜증에 이끌려 시끄럽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인류를 말살하기로 한 신들의 결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혜의 신 에아 Ea (엔키 Enki)는 웃나피쉬팀 Utnapishtim 한테 자신과 가족, 다양한 동물을 구하려면 큰 배를 만들라고 지시하며 은밀하게 경고한다. 웃나피쉬팀은 이러한 지시를 따른다.홍수가 나면서 며칠 동안 지구를 황폐화시킨다. 물이 물러간 후 우트나피쉬팀의 배가 산 위에 올라온다. 그는 마른 땅을 찾기 위해 새들을 풀어주고, 성공하면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다. 제물에 감동한 신들은 그들의 결정을 후회하고 궁극적으로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에게 .. 2024. 5. 22.
일본으로 건너간 도작이 더 전면적이 된 이유 필자는 앞에서 쓴 것처럼 한반도 도작이 일본을 건너간 후에는 잡곡을 누르고 한반도보다 더 전면적 도작 사회로 성장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래 근거 때문이다.   아열대 식물인 벼는 당연히 위도와 평균기온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처음 야요이문화가 배태된 서일본 일대는 한반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균기온이 높다. 한반도 중부 일대와 비슷한 평균기온은 놀랍게도 혼슈 북부 일대의 고산지역을 빼놓고는 거의 없다. 한반도가 중국 대륙의 황하-양자강 사이의 공간 어디쯤 해당된다면, 서일본은 중국 대륙의 양자강 이남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 previous article ***  한반도 남부와 큐슈 북부의 촌락 2024. 5. 22.
한반도 남부와 큐슈 북부의 촌락 도작이 시행되었다는 측면에서 한반도 남부, 특히 남해안 일대의 촌락유적과 일본 큐수 북부의 소위 대륙계 야요이인 초기 정착촌, 이 두 촌락유적 주변에는 농지가 둘러싸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경작지에는 양측 모두 비슷한 비율의 논이 포진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한반도 남부의 촌락에 비해 후쿠오카 평원 일대의 정착촌은 논이 더 많은 모습이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경우 야요이 촌락 복원 모형이나 그림에서는 거의가 풍요로운 논으로 둘러싸인 촌락을 그리고 있더라는 말이다. 만약 이러한 묘사가 그 쪽 발굴 정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한반도 남부는 어떠했을까? 한반도 남부의 촌락 역시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을까? 양자간에는 재배하는 작물의 종류 별 비율 차이가 있었을까? *** previous article ..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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