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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만 나온 터키 퀼테페서 개인 주택도 출현 터키 중부에 위치한 유명한 퀼테페Kültepe 고고학 유적이 수십년간 궁전이나 사원 관련 관련 건물만 쏟아내다가 처음으로 그 메인 언덕main mound에서 개인 주택이 발견됨으로써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약 4,700년 전에 만든 이런 주택 발견은 이 고대 정착지를 이해할 때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하며, 유적에서 고고학적 관심을 사로잡은 기념비적인 궁전, 그리고 사원과 함께 일반 시민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기록된 아나톨리아 역사의 시작점으로 알려진 퀼테페 주거 지역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 중 하나인 쿨테페의 일상생활에 대한 전례 없는 통찰을 제공한다.터키 투데이Turkey Today 최근 보도에 따르면,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피크리 쿨라코글루Fikri Kulakoglu 교수가 주도하고 카.. 2025. 8. 19.
유전자 차이가 네안데르탈인 멸종 원인일 수 있다는 쥐 실험 연구 나와 현대 인간과 네안데르탈인 사이에 존재하는 유전자 차이가 네안데르탈인 멸종 원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쥐 연구 결과가 나왔다. DNA 합성을 돕는 ASDL이라는 유전자가 현생인류와 멸종된 인류 사이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발견은 네안데르탈인 멸종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DNA 합성을 돕는 ASDL이라는 유전자는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멸종된 친척인 데니소바인에서 발견되는 유전자와 다르다.이 유전자를 발현하도록 유전자 변형된 생쥐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실험 결과는 이것이 인류의 행동 변화를 유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견은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멸종된 이유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새로운 연구에서 제안했다. 하지만 이 발견이 인간에게 미치는.. 2025. 8. 19.
혹서기 발굴은 최소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혹서기 발굴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 맞다. 누가 죽건말건 공사는 진행해야 하니, 발굴 못해 공사 늦어진다 하면 업자들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저 사지로 사람들을, 더구나 그 대부분이 초고령인 발굴인부들을 뙤약볕에 몰고 나가야겠는가?그래서 사고 나면?국가유산청이 책임지겠는가? 그 발굴을 밀어부친 사람들이 책임지겠는가?사고 나면 저 사람들 난 책임없다고 다 줄행랑 치고 발뺌할 사람들이고, 그렇다 해서 저들한테 무슨 책임을 물을 방법도 뾰죽하니 없다. 우린 현장 사정 고려해 발굴조사단이 알아서 하라고 했을 뿐이라고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 나면 그 오롯한 책임은 오직 조사단 몫이다. 그렇다면 혹서기 발굴은 어찌해야 하는가? 최소화해야 한다. 혹서기라고 하면 년중 6월 말.. 2025. 8. 18.
4,500년 전 개이빨 목걸이 걸친 여성 무덤 체코서 발굴 체코 리프 산Mount Říp 아래에서 화려한 개이빨 목걸이와 수백 개 조개 구슬을 장착한 기원전 29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무렵 높은 지위 여성이 묻힌 무덤이 발견됐다고 체코 필젠Pilsen에 소재하는 서보헤미아 대학교University of West Bohemia가 최근 밝혔다. 서보헤미아 대학교 고고학자들이 리프 산 아래에서 발견한 이 흔적은 선사 시대 여성의 뛰어난 사회적 지위를 보여준다.이 풍부한 신석기 시대 무덤에서는 구리 유물과 개이빨 목걸이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연구원들이 포드지프스코Podřipsko 의례 풍경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에 보탬이 되었다. 최근 필젠 서보헤미아 대학교 예술학부 (FF UWB) 고고학도들은 리토메리체Litoměřice 지역 라치네베스Račiněves 마을 .. 2025. 8. 18.
2,500년 된 고대 난파선 시칠리아 해저서 발견 작년 12월에 공개된 소식이라, 고고학자들이 시칠리아 남부 해안 근처에서 기원전 5세기 내지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놀라운 난파선 1척 발견했다 한다. 이스피카Ispica 인근 산타 마리아 델 포칼로Santa Maria del Focallo 인근 모래와 바위에 묻혀 있던 이 난파선은 초기 지중해 해양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선체는 지중해 일대에서 사용된 초기의 간단한 조선 방식인 "조개껍질형on-the-shell"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 방식이 어떤 선박인지는 자료를 좀 더 검색해 봐야하지만 이에서 이 정도로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연구팀은 난파선과 함께 6개 닻을 난파선 인근에서 발견했다. 서기 7세기 철제 닻 2개와 선사 시대로 추정되는 무거운 돌 닻 4개다.이 발굴은 시칠리아 해양.. 2025. 8. 18.
초고령자가 넘쳐나는 발굴현장, 외국인력 점령한 여타 산업현장과는 전연 달라! 중대재해법 산업안전법 더 적극 해석한 별도 조치 시급 앞서 나는 폭염과 같은 이상기후에 따른 발굴현장 안전 문제가 더는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고 했거니와이는 비단 나 같은 그 외곽에 위치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절감하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 중 하나다. 왜 문제인가?꼭 비단 기후변화에 따른 양상이라 하기는 힘들지만, 한반도 사정에서는 특히 여름철 폭염 발굴이 문제인데, 이것도 사정이 내외부에서 완전히 달라져서 무엇보다 그에 따른, 곧 안전사고에 따른 처벌이 한층 강화되었거니와 지금은 양날개를 장착한 상태서 고고학을 위협한다. 하나가 중대재해처벌법이요 다른 하나가 산업안전보건법이라, 이런 상태서 사고 터지면 작살나는 데는 국가유산청도 아니요 발굴기관과 발굴현장 책임자다.. 2025. 8. 18.
네안데르탈인 나무창 출토 쇠닝겐 유적 발굴에 전곡선사 참여 쇠닝겐 유적이 네안데르탈인 문화사, 나아가 인류 문화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내가 여러 번 소개했으니, 3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사냥에 쓴 나무창을 무더기로 출토한 이 유적 발굴에 전곡선사박물관이 참여한다고 이 박물관 이한용 관장이 18일 개인 sns 계정을 통해 공지했다. 이 관장에 따르면, 이를 위해 작년 10월 전곡선사박물관은 나무창으로 야생마를 사냥했던 유적으로 유명한 독일 쉐닝겐 유적을 관장하는 독일 팔레온 박물관 하스만 관장과 공동 조사를 위한 MoU를 체결했다. 이 MoU 후속사업으로 2025 쉐닝겐 유적 발굴조사에 전곡선사박물관에서는 이서영 학예연구사를 파견했다.이에 이날 조사를 위한 본격 땅파기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 저명한 구석기 동굴 유적 조사 참여는 더러 있었다... 2025. 8. 18.
적봉 오한기 적석총 홍산문화 옥기 2025년 8월 14일 웨이보에 오른 학술연구 소식이라 내몽고자치구内蒙古自治区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汉旗 원보산 유지元宝山遗址 적석총积石冢 발굴 소식을 정리한 것이라이르기를 2024년 7월 중순, 한여름 견딜 수 없는 더위 속에서 고고학자들은 마침내 이 무덤 발굴 고생에 대한 보람이 있었으니 이 적석총 구역 중 남쪽 매장 시설을 파내면서 옥저룡玉猪龙, 사구통형 옥기斜口筒形玉器, 그리고 옥관玉冠 모양 장식으로 구성되는 한 세트 옥기영입안렴玉器映入眼帘과 같은 옥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원보산 적석총 발굴 소식은 앞서 자세히 다룬 적 있으니 그것을 참고했으면 싶고 여기서는 사진으로 다시금 복습 감상한다 생각하자. 전형하는 홍산문화 특징을 보인다. 새롭게 출현한 홍산문화 방단 원형 적석총 새롭게 출.. 2025. 8. 18.
18세기 노비사역론을 마무리 하며 앞에서도 말했지만필자는 지금 작업 중인 조선시대 검안 서류에 대한 의학적 분석 때문에 19세기 조선사회에 대해 싫든좋든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18세기 노비사역에 대한 검토도 이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다. 필자가 시간이 남고 할 일이 없어 이런 작업을 한 것이 아니다. 필자 역시 역사학의 문외한, 관찰자로서 솔직히 써 보자면, 18세기 초반까지도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을 노비로 사역시키던이 정황을 무시하고 대충 덮어둔 채 입안하는 연구 작업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처럼 문외한으로서 조선후기사를 읽는 분들, 조선시대 자본주의 맹아론을 애국의 입장에서 바라 보는 분들은 18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 향촌사회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절.. 2025. 8. 18.
구한말과 임란 의병은 이름만 같은 의병 우리나라에 일어난 의병 중 가장 유명한 두 차례..임란 의병과 구한말 의병은이름만 같은 의병이지 두 의병이 같은 구조였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 두 시대 사이에는 노비사역이 사라진다는 엄청난 사건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임란 당시 나선 의병들은 양반들이 자기 수하 노비를 이끌고 나가 학맥에 따라 상하 관계를 형성하며 의병부대를 만들었겠지만, 구한말이 되면 이미 그런 노비란 거의 존재하지 않아 구한말 의병에는 노비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마 독립 소농민들이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로 일본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은 바, 그 부대의 구조는 사실 그보다 십 수년 전의 동학전쟁 부대와 구조가 많이 닮아 있지 않았겠는가. 동학전쟁도 "농민전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 2025. 8. 18.
임진왜란: 의병의 구조 필자가 과문해서인지 우리나라 임진왜란 의병의 구조에 대해서 한 번도 논문을 본 적이 없다. 필자도 비전공자로서 과문하여 남아 있는 모든 전적을 살펴 볼 정도가 당연히 안되지만막연히 추정을 해보자면 이렇다. 임진왜란 때 의병-. 조헌과 칠백의총처럼 도학자와 그 제자가 무리 지어 만들었을까. 우리는 조헌과 칠백의총만 생각하는데사실 금산전투에서 전몰한 것은 조헌과 칠백의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규대사가 이끈 승군도 있었다. 당연히 조헌과 칠백의사 아래에 승군이 배치되지 않았겠는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아무리 당시 승군이 대접받는다 해도, 유학자와 승려가 만나면 상하관계란 사실 뻔한 것이다. 임란이 발발한 16세기, 그리고 17세기에는 우리나라 향촌사회는 수십, 수백의 노비를 사역시키는 양반들이 지배하고 있었.. 2025. 8. 18.
임진왜란은 왜 그렇게 의병이 많았나 우리는 국난이 벌어지면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당연하게 안다. 그래서 임란 때도 의병에 별 감흥들이 없다. 오히려 의병이 없던 시대를 질타한다. 그런데 의병이란 건 사실안 해도 되는데 들고 일어났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독특한 군역제도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동시기 일본이라면 의병은 나올 수가 없다. 군역은 토지와 결부되어 지급된 토지 만큼 군역을 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도시대에도 사무라이들은 받는 녹봉만큼 병역을 지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흑선이 도래했을 때 막부가 동원령을 내리면당연히 일정 숫자의 사무라이들은 모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의병이 나올 여지는 전혀 없다. 우리의 경우는 양반들의 경우, 16세기에는 수십, 수백의 노비를 거느리고 농장 경작을.. 2025. 8. 18.
완전범죄를 노리는 한국사 지금 조선 중 후기에 노비사역이 상당히 광범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드라마 "추노"라던가 자극적으로 인터넷 상에 쓰여지는 기사들에 의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필자가 보기엔 이 노비사역의 문제는 이렇게 흥미거리로나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고조선후기사의 근본을 규정할 매우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한국사의 주류적 논의로 부상하지 않고이른바 식근론 논쟁, 내재적발전론 등의 논의에서 조금 이야기되는 듯 하다가 다시 물밑으로 감추어지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이 문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조선후기사 전반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로서 테이블 위애 올려놓고 모든 관련 연구자들이 매달려 이 문제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엔 이 노비사역의 문제는 학계에서는 한국사의 내재.. 2025. 8. 18.
노비사역을 감추니 정체가 모호해지는 율곡의 경장론 율곡은 조광조 같은 완고한 도학 지치주의론자가 아니다. 그 역시 지치주의를 이상적 정치로 보기는 하지만 율곡은 매우 명민한 사람이며 남아 있는 그의 대화록을 보면 극히 현실적으로서 추상적인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스스로 녹사를 했다고 자폄할 만큼정치 실무경력이 많아 당시 세상에 널렸던 입에 발린 말로 지치주의를 옹호하던 그런 류의 유학자들과는 결을 달리 하던 사람이다. 율곡의 경장론이 있다. 활시위를 다시 당겨 조이듯이 16세기 후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며그렇게 하지 앟으면 이 나라는 조만간 망한다고 극언했다. 이 율곡의 경장론의 실체를 보면현재 나와 있는 여러 연구에서는 매우 모호하게 기술되어일견해서 조광조의 지치주의와 별 차이가 없는 듯 적어 놓았는데, 실제로 율곡은 그렇게 모호.. 2025. 8. 18.
노비사역을 감추고 있는 한국사 기술 우리 역사에 대한 기술에서 조선시대 호적만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노비사역에 의한 농장 경영을 고의적으로 은폐하며 그 대신 지주-전호제를 실제로 이 제도가 한국사회에서 보편화한 시기보다 훨씬 끌어올려 기술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호적에서 18세기 전반 호적만 봐도 마을 유력자인 양반들은 한 호당 20-30명 노비를 거느리며 집단 사역시키는 자가 즐비했다. 따라서 한 마을에 독립 소농은 그 수가 별로 되지 않았다. 이른바 율곡이 이야기하던 16세기 위기론 그리고 경장론의 실체는바로 이것 때문일 수도 있다. 군역이 부과 안 되는 양반과 이에 예속된 노비 수가 급증하면서세금과 군역을 부과할 대상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이는 결국 조선의 상태가 개국한지 200년 만에 다시 여말선초 상태로 돌아.. 2025. 8. 18.
2007년에 알래스카서 잡힌 1880년대 빅토리아 시대 북극고래 다음은 Scott Travers라는 생물학에 관한 글을 주로 쓰는 분이 2024년 9월 19일 The Conversation 기고문이라, 오래사는 바다생물에 관한 이야기다. 열 명한테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포유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인간부터 코끼리, 벌거숭이두더지쥐까지 다양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모두 용감한 추측이지만, 정답을 찾으려면 바다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현재 과학적 지식에 따르면 가장 오래 사는 포유류는 북극고래bowhead whale로, 최대 200년까지 살 수 있다. 북극고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장수 전문가다.한 가지 이유는 느린 신진대사와 낮은 번식률이다.또한, 북극고래는 강력한 면역 체계를 지녀 질병과 포식자가 적은 혹독한 북극 환경에 적응했다(인간과 범고래or.. 2025. 8. 18.
소작제가 조선사회의 주류가 된 시기 필자가 19세기 조선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목하 진행 중인 조선시대 검안 서류에 대한 의학적 검토 과정에서, 해당 사망 사건의 배경 설명에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검안 서류에 나타난 19세기 말의 상황을 보면이미 조선의 향촌에는 노비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물론 마을에서 양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에서어떤 이가 양반이라던가, 평민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사건의 전개와 판결 과정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양반이라 해서 경제적 처지가 평민보다 반드시 낫지 않았던 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 필자가 보는 바 19세기 말 상황은 20세기 초반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상태로서 이미 노비.. 2025. 8. 18.
실학은 근대의 선구가 아니다 필자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썼지만우리나라 실학은 근대의 선구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자리매김했는지 모르겠지만이들은 딛고 있는 사회적 기반도 그렇고그 이데올로기 자체도 근대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자리 매김한 것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 맹아, 근대의 맹아의 시점으로 보고, 광작운동, 자본가적 차지농 등 내재적 발전의 시점으로 설정해 놨기 때문에그에 걸맞는 근대적 사상의 단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둔갑시켜 장식해 놓은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 여러 번 글을 썼듯이필자는 근대의 선구는가짜양반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실제로 근대의 문을 열어젖혀야 했을 사람들인데이 계층 자체가 성립된 시기가 너무 늦어19.. 2025. 8. 18.
몰락양반과 가짜양반 19세기 조선사회. 마을마다 유학을 칭하는 양반호가 압도적인 숫자가 되어 있었고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몰락양반"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몰락양반"이 그렇게 흔했을까? 조선시대에 가지고 있던 재산 관리를 못하고 벼슬도 떨어져 양반이었던 사람들이 양반이 아닌 처지로 굴러 떨어진 상황이 꽤 많았을 듯하지만, 호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양반 자손들은 아무리 살림이 어렵고벼슬을 하지 못해 부, 조부, 증조부 직역이 학생이 되어 있어도여전히 호적상에서는 양반호로 잡혀 있었다. 몰락양반이란 것이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조선의 19세기에 늘어났다는 소위 "잔반"혹은 "몰락양반"이란, 원래 양반이 아니었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몰락양반"이라 주장하는 사람 상당.. 2025. 8. 18.
구한말의 주인공은 노비 후손이다? 필자는 이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도발적인 말을 하는 이유는 이렇다. 18세기 초반까지도 마을마다 절반 가까이 되던 노비사역이 18세가 후반을 거쳐 19세기가 되면 거의 사라지고 각 마을은 자기들이 양반 후손이라 주장하는 소농민들로 재편된다. 그렇다면 이전 노비는 어디로 갔겠는가, 당연히 양반이라고 주장하는 소농민들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숫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연 19세기 후반, 구한말에 들어가면 얌전히 있었을 것으로 보는가? 19세기 후반 활동하던 사람들 상당수, 심지어는 중앙정부에 발탁되어 들어간 사람들 중에도 이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으리라 보는것이 옳지 않을까.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에서 구한말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는 우리 조상이 100.. 2025. 8. 18.
임시정부를 지탱한 살림꾼 한진교 패망 뒤 중국 망명, 회사 설립해 언제나 임정 자금책해방 뒤 귀국해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창설, 한태동 선생 선친 어느 기관이나 조직이든 실제로 운영을 하는 데에는 살림꾼이 필요한 법이다. 26년이나 존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중 한 명이 평안남도 중화 출신 독립운동가 한진교韓鎭敎(1887~1973)다.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고 평소 정의감이 남달랐던 한진교는 망국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했다가 1914년 상하이로 가서 해송양행海松洋行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했던 인물이다.그곳에서 나온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1918년에는 청년 독립운동단체인 신한청년당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한진교를 포함한 6인 창당 멤버는.. 202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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