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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화랑세기를 피해가는 한 방법 나는 물건 감정과 전문가는 다르다고 본다. 미술사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예컨대 도자기가 있다. 나는 도자기 감정을 잘 한다 해서 그 사람이 뛰어난 도자기 연구자로 보지는 않는다. 이 논리대로라면 가장 뛰어난 도자기 연구자는 그 진위를 감정하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인사동 같은 데서 일하는 골동품 취급하는 사람들이다. 골동품 취급하는 일과 도자기를 연구하는 일은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하지만 연구자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으니, 무엇인가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단안해야 할 때는 서슴없이 해야 한다. 그것이 잘못된 감정일지라도 말이다. "1989년 부산에서 발견된 이른바 화랑세기에는 김흠돌 모반의 전말이 확인된다. 그러나 아직도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의가 진행 중.. 2024. 2. 25.
파르테논 마블스, 그 운명을 예고하는 장기 대여 나는 그 반환 방식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파르테논 마블스 Parthenon Marbles, 일명 엘긴 마블스 Elgin Marbles가 종국에는 결국 영구대여 방식으로 반환될 것이라 예상했거니와, 지금은 그리스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방식으로 결국은 낙착하고 말리라 했지만 그것을 전조하는 움직임이 근자 실제로 영국 쪽에서 있었으니, 브리티시 뮤지엄the British Museum 과 같은 런던 기반 공예 성향이 강한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 Victoria and Albert Museum (V&A)이 실제로 이 방식을 통해 아프리카 대륙 가나 Ghana에서 유래한 금은 공예품 32점을 장기대여했다. 이들 유물은 19세기 이른바 앵글로-아샨티 전쟁 Anglo-Ashanti Wars 기간에 약탈된 것들로 .. 2024. 2. 25.
간양록과 해동제국기 해동제국기를 쓴 신숙주 선생이야 당대의 수재로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힐 만한 선비이므로 두 말 할 것도 없지만, 간양록을 쓴 강항 선생도 당대의 문과 급제자로 당시 조선의 일류 문사라 할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이 쓴 일본에 대한 글, 해동제국기와 간양록은 작자의 지적 수준에 걸맞게 적혀 있는 내용이 단순한 당대의 전문을 모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 봐도 굉장히 정확한 내용이 적혀 있다. 시바료타로는 신숙주 선생의 해동제국기가 매우 소략하다고 비판했다던데 당대 일본이 조선을 그럼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실로 이 책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 중 최고수준이던 두 양반의 지적 수준을 잘 보여주는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숙주 선생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 2024. 2. 25.
신동훈: 인더스문명 관련 논문 총 서지 목록 https://shindonghoon.tistory.com/39 신동훈: 인더스문명 관련 논문 총 서지 목록다음은 필자가 2010년대 10년 간 인도의 인더스문명 유적지에서 수행한 연구에 대한 학술보고-대중매체 등 총 서지목록이다. 영어논문 E2020-2. Lee WJ, Shinde V, Kim YJ, Woo EJ, Jadhav N, Waghmare P, Yadav Y, Munshshindonghoon.tistory.com 위 링크는, 필자가 2010년대 약 10년간 인도에서 작업했던 인더스 문명 관련 연구의 학술보고 및 대중매체 소개 등 총 서지 목록이다. 의욕 하나로 진행했던, 참으로 힘든 작업이었는데 무사히 학술적 업적으로 남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 뿐이다. 덕분에 많은 인도의 벗들을 얻게 되었지만.. 2024. 2. 25.
[귀주대첩] (14) 또 하나의 제국, 승리가 초래한 변화 귀주대첩이라는 고려의 완승, 거란의 참패로 끝난 제3차 고려거란전쟁은 잦은 전쟁과 아슬아슬한 평화로 점철한 두 왕조 관계를 재편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 또한 지형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로부터 거란이 망하기까지 100년간 이른바 평화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거란의 팽창도 이 전쟁과 더불어 끝이 났다. 정복왕조 거란이 정복을 멈췄다는 것은 현상 유지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위대한 팡파르였다. 물론 크고 작은 충돌은 없지 않았고, 거란 내부 또한 이런저런 반란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지만, 종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위대한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이 평화의 시대는 고려가 피로써 이룩한 것이었다. 거란은 이 참패를 숨기고자 하고 분식하려 했지만,.. 2024. 2. 25.
한강 용산방수제와 한강교, 을축년대홍수의 유산 한강 방수제와 한강교 준공 한강은 해마다 그 연안에 피해를 입힌 바가 많은 대하천 중 하나로, 특히 경성에 근접한 관계상 일찍이 그 개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25년(大正 14)에는 미증유의 홍수로 용산·뚝섬纛島·영등포 등 연안의 피해가 실로 막심했다. 그리하여 1926년(大正15) 이후 3개년 계속사업으로서 220만 원의 예산으로 용산의 방수제防水堤, 1927년(昭和 2) 이후 120만 원의 공사비로 한강교漢江橋의 가설 공사에 착수했다. 1929년(昭和 4)에 둘 다 준공되어 9월 18일 낙성식과 도교식渡橋式을 거행하여, 경성 교외에 훌륭한 경관을 더하게 되었다. 방수제는 신·구新舊 용산을 둘러싼 것으로 총연장 8,000m, 한강교는 총연장 441.6m, 유효 폭 9.1m에 달하고 있다. [636].. 2024. 2. 24.
[202401 독일풍경] (10)베를린 ④ 더딘 걸음...from 장남원 베를린에 갔으니 지나칠 수는 없었다. 훔볼트 포룸(전, 베를린 민족학박물관) 개관 이후 작년 가을부터 2024년 4월까지 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https://www.smb.museum/en/exhibitions/detail/ari-arirang/ Ari-ArirangExhibition “Ari-Arirang. Korea: Germany’s Enduring Fascination with the Hermit Kingdom” of the Ethnologisches Museum and Museum für Asiatische Kunst.www.smb.museum 그간 해외소장 한국문화재 조사가 문화재연구소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성과가 일정한 도록형식으로 만들어졌다면, 이곳 소장품은 아직.. 2024. 2. 24.
조선어장려수당을 지급한 조선총독부 조선어장려수당 언어는 쌍방이 의사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에 일상에서 민중과 접촉하는[324] 일본인 관리 등이 조선어를 잘 아는 것은 민의 창달을 도모하는 데 중요하다. 또한 각종 정책을 실행하는 데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별도의 항목에서 기재한 바와 같이 한편으로 조선인들에게 국어(일본어)의 보급을 장려하는 동시에, 총독부는 종래 총독부 및 소속 관서에 근무하는 내지인 직원, 특히 늘 인민을 접촉하는 지방청 직원을 대상으로 조선어 학습을 장려해 왔다. 그러나 관제 개혁 후 이를 한층 더 장려하기 위해 1921년(大正 10) 5월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 조선어 장려규정'을 발포하고 동시에 대우 직원 및 고원雇員에 대해서도 같은 규정을 준용했다. 이로써 시험 .. 2024. 2. 24.
[귀주대첩] (13) 노복 터진 강감찬 강감찬은 빌빌 쌌다. 948년, 고려 정종定宗 3년에 태어난 그는 빌빌 싸다 서른여섯 중늙은이가 다 된 983년, 성종成宗 2년에야 최승로崔承老가 시험감독관 총대장이 되어 실시한 과거 시험 갑과甲科에 강은천姜殷川이라는 본명으로 등단해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나이에 견주어 출세는 굉장히 늦어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주장하는 조정 대세에 맞서 홀로 몽진을 주장해 관철함으로써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계속 빌빌 쌌다. 이렇다 할 요직을 지낸 적도 없다. 이런 그가 역사의 주역으로 등단하기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전운이 한창 감돌던 그 무렵, 현종은 지난날 몽진, 곧 일단 튀고 보자 전법을 제시한 강감찬을 기억하고는 그를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나아가 서북면을 지키는 총.. 2024. 2. 24.
[귀주대첩 spinoff] 요사遼史 이국외기二國外記가 적록한 귀주대첩 원나라 때 편찬된 요사遼史는 24사 혹은 25사 중에서도 그 졸속성이 가장 심각하다는 비판을 듣거니와, 실제 내가 통독해 봐도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이상 가는 거란 통사는 지구상에 없다. 이 요사는 외국열전이 독특해서 유독 고려와 서하西夏 두 나라는 이국외기二國外記라 해서 별도로 독립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만큼 거란 국제교류사에서 두 왕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막강한 까닭이다. 물론 거란한테 가장 중요한 이웃 왕조는 宋이었지만, 그 송은 본사가 따로 있으므로, 이렇게 두 왕조만은 따로 독립해서 이렇게 특기한 것이다. 이 이국외기 중 고려를 보면, 두 왕조가 전쟁을 비롯해 교류한 역사를 편년체 식으로 정리했으니, 그 요긴함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에는 당연히 우리가 흔히 귀주대.. 2024. 2. 24.
[요사遼史 서하西夏 열전] (1) 요사에 대하여 요사遼史는 원나라 때 탈탈脫脫이 주도해서 편찬한 거란 요나라 시대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이른바 “24사二十四史” 중 하나로 들어간다. 지정至正 3년, 1343년 4월에 편찬이 개시되어 이듬해 3월에 완성되었으니, 불과 1년 만에 편찬이 되는 바람에 여러 모로 결점이 많은 사서로 분류된다. 탈탈脫脫이 편찬책임자인 도총재都總裁를 맡은 가운데 철목아탑식鐵木兒塔識과 하유일賀惟一, 장기암張起岩, 구양현歐陽玄, 게해사揭奚斯, 여사성呂思誠이 총재관總裁官이 되고 염혜산해아廉惠山海牙 등이 수사관修史官을 맡았다. 전체 116권이요, 개중 황제 편년체인 본기本紀가 30권, 각종 제도사인 지志가 32권, 표表가 8권, 열전列傳이 45권이다. 기타 특이하게도 거란어를 풀이한 〈국어해國語解〉가 1권을 이룬다. 요遼 태조太祖 야.. 2024. 2. 24.
서하西夏가 끌린다 거란을 대하다 보면 모름지기 서하西夏를 매양 조우하는데, 이 서하는 거란이 한창 흥성하던 시절에는 물론 거란을 종주국으로 삼으면서 송과는 거란에 대해 같은 처지이면서도 시종 송과 치고 받는 모습을 연출한다. 거란 중심으로 보면 남쪽 송, 동쪽 고려, 서쪽으로 서하과 고창회골高昌回鶻을 접하거니와, 거란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물론 저들이 주변 외신外臣 제후들이었다. 다 거란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때마다 공납을 했고, 그네가 올 때마다 책봉이라는 이름으로 그 군주를 봉하는 형식을 빌렸으니, 저 무대가 훗날 몽고 제국 판도 아래 하나로 합쳐졌으니, 그러고 보면 몽고의 꿈을 참말로 장대했다. 거란이라 해서 왜 저들 지역을 모조리 정복할 수 없었겠는가? 다만, 그네들은 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오는 한 그 자치를.. 2024. 2. 24.
일본에 대한 과대평가, 과소평가 우리 쪽의 일본사에 대한 인식을 보면 별로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데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있고 정작 크게 높게 평가하여 정밀하게 봐야 하는 쪽은 반대로 잘 모르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것 같다. 예를 들면 전국시대 이전의 일본사. 필자가 보기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일본통일이 시작되기 전의 일본사는 물론 인접국가의 역사로서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하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 일본 쪽 시각을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 너무 크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반대로 에도시대 역사-. 이 부분은 근대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발생한 결정적 시기로 20세기 초반 근대화에 실패하여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아무리 들여다 봐도 손해가 아닌 시기다. 그런데 에도시대는 또 잘 아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본사도 한국사처럼 잘.. 2024. 2. 24.
예천박물관 ‘경운재일기’ 국역총서 발간 예천군 예천박물관이 2023년 학술연구의 성과로 예천박물관 소장 ‘경운재일기景雲齋日記’ 국역총서를 예천지역 무형유산을 재조명한 학술총서 ‘예천의 무형유산’과 함께 근자 발간했다. 경운재일기는 19세기 예천지역에 세거한 경운재 김회수(金會壽, 1802~1873)가 생부(生父)인 김홍운(金洪運, 1769~1826)의 상을 당하면서 적기 시작한 일기로, 김회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면서도 집안의 내밀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풍부하게 그려냈다. 특히 경운재일기는 예천박물관의 첫 번째 국역서이며 김회수의 후손이자 남악종가의 종손인 김종헌 씨가 직접 일기를 탈초·번역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예천의 무형유산은 2022년 인류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예천청단놀음’.. 2024. 2. 24.
[귀주대첩] (12) 넘쳐나는 과부와 고아 이른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거란에 준 충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었다. 이 전쟁은 공식으로는 1019년, 개태開泰 8년 2월에 종식되었지만, 그 수습은 그해 내내 계속됐다. 그해 3월, 수뇌진을 처벌한 거란 성종 야율륭서는 그해 6월 무자戊子에는 고려를 정벌할 때 전몰한 장교의 자제들을 조사한 데 이어 그달 을사乙巳에는 남피실군교南皮室軍校 등이 고려를 토벌한 공이 있다 해서 금백金帛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요사 성종본기) 이것으로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같은해 가을 7월 기미己米에는 고려를 정벌하다 전몰한 여러 장수의 처한테 조칙을 내려 봉록을 더해주게끔 한다. (요사 성종본기) 물론 이 전쟁이 참혹한 거란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그들로서는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을 감출.. 2024. 2. 24.
[귀주대첩] (11) 대패한 소배압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야율륭서 앞서 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 전황을 주요 전투 장면을 시간순서대로 잘 정리했다. 이를 다시금 상기하면 고려 현종 9년, 1018년 12월 10일 거란군은 흥화진에서의 서전 이래 대략 3개월을 곳곳에서 판판이 깨지다가 이듬해 2월 1일 귀환 길목 귀주에서 대패하고 군사 대부분을 읽고서 수뇌부 몇 명을 포함한 일부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한데 이 전투 사정이 요사 遼史 성종聖宗 본기에서는 개태開泰 7년, 1019년 12월에 날짜를 특기하지 아니한 채 한 순간 전투에서 대패한 것으로만 적었을 뿐이다. 고려 쪽 기록과 비교할 때 요사 쪽에서는 거란군 패전을 부러 축소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전쟁에서 진 일이, 더구나 한참 아래로 본 고려한테 개발살난 일이 무.. 2024. 2. 23.
[국내 박물관 현황과 연혁] 예천박물관 간평 : 이 예천박물관이 보유한 특징 혹은 특장이라 할 만한 내용은 이전에 아래와 같이 지적한 적 있으니 그것으로 갈음한다. (맨아래 첨부 기사 참조) 한국사회에서 지역박물관 공립박물관이 살아남을 고리는 결국 학연지연혈연이다. 예천박물관 이 버티는 힘이 바로 이것이다. 간단하다. 잘난 가문 잘났다고 현창해 주자. 그 잘났다는 가문을 현창해 주었는데, 그 가문 구성원이 그 박물관 없애라는 소리 하겠는가? 이 박물관은 애초 출발 자체도 가문현창이라는 색채가 아주 강하다. 2010년 5월 11일 '예천충효관'으로 개관한 이곳은 2015년 12월 29일 박물관으로 승격하고 빗물 줄줄 새는 건물을 리모델링하고는 2021년 2월 22일 '예천박물관'이라는 간판을 새로 달았다. ■ 연혁 2010. 05. 11. 충효.. 2024. 2. 23.
[귀주대첩] (10) “도통은 소배압, 부통은 소허열” 지금까지 본 전쟁은 고려사랑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더 정확히는 그것을 정리한 조선초 이데올로기)이며, 이 전쟁이 거란 쪽에서는 어찌 기억되었을까? 그 흔적은 요사遼史 성종본기聖宗本紀와 이 전쟁에 종군한 사람들 열전에 남았으니 이를 살펴야 한다. 이 전쟁이 요사에서는 권16 본기 제16 성종聖宗7에 남았다. 이 전쟁을 일으킨 1018년, 고려 현종 9년은 거란으로서는 개태開泰 7년이라, 이해 3월 신축辛丑에 동북쪽 월리독越里篤과 부아리剖阿里·오리미奧裏米·포노리蒲奴里·철려鐵驪 등 5개 부部에 대해 세공歲貢으로 초피貂皮 6만5천 장과 말 300마리를 바치게 했다 하는데, 내가 아무리 봐도 이는 그 연말에 있을 고려 정벌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저들 5개 부는 동북쪽이라는 위치를 특정하는 것으로 봐도 .. 2024. 2. 23.
대동여지도는 실측지도가 아니다 일본에는 대동여지도보다 빠른 시대에 만들어진 대일본연해여지전도 大日本沿海輿地全図 라는 지도가 있다. 막부의 주선으로 伊能忠敬라는 인물이 만든 지도로 정밀도도 대동여지도보다 높고 무엇보다 이 지도는 해안선을 서양지도 제작법을 적용하여 "실제로 측정하여 만든" 실측지도이다. 문제는-. 대동여지도는 실측지도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이건 직접 측량한 지도가 아니다. 大日本沿海輿地全図 처럼 실측지도라면 해안선이 실제와 비슷한 것은 놀라운 점이 아니고 그 제작 기술도 서양의 지도 제작법을 따라 올라가면 되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 않다. 대동여지도의 해안선 제작법이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실측지도가 아니라면 한반도 해안선을 어떻게 유추해 냈을까? 이게 지금 돌아다니는 이야기처럼 "발로 전국을 훑었다던.. 2024. 2. 23.
[귀주대첩] (9) “네 낯 가죽을 벗겨 죽이리라” 앞서 봤듯이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냅다 개경을 향해 남하했다. 심지어 서경도 오른편으로 돌린 채 남하했다. 이는 소배압 전술이 현종 사로잡기였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십만 거란군에 견주어 이십만을 동원한 고려군은 전력에 여유가 있었다. 일부는 거란군 꽁무니를 맹렬히 좇아 따라붙어 후미에서 들이쳤다. 강감찬은 그러는 한편 일부 부대는 빼돌려서 개경으로 서둘러 내려가게 했다. (1019년) 봄 정월 경신, 강감찬은 거란 병사들이 도성 가까이에 이르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서둘러 가서 경성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였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또한 병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고려사절요) 소배압은 쏜살같이 달렸다. 1월 3일에 벌써 .. 2024. 2. 23.
[귀주대첩] (8) 거란군 꽁무니를 좇는 이상한 전쟁 소손녕이 이끈 1차엔 80만, 성종이 친정한 2차엔 40만을 동원했다는 거란이 1018년 현종 9년 12월에 단행한 3차엔 고작 10만을 끌고 왔으니 규모로 보아 거란으로서는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이건 다른 측면에서 봐얄 성 싶다. 거란으로서는 이 무렵 내부 사정으로 저 이상 되는 군대를 징발하기 힘들었다고 보거나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십만은 당시로서는 전면전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흔히 이 삼차전을 귀주대첩이라 하나 실상 이 전쟁은 최전방 흥화진에서부터 개경 근방까지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에서 크고작은 전투가 잇따랐으며 실상 귀주대첩은 그 마지막 승리를 말할 뿐이다. 이듬해 2월 1일 귀주대첩까지 3개월에서 약간 모자란 이 기간에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고려는 완승했다. 특히 ..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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