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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avation of Pungnaptoseong Fortress, 2011 Excavation of Pungnaptoseong Fortress by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Seoul, Nov. 11th, 2011 國立文化財硏究所 漢城 風納土城 東壁 切開調査, 2011年11月 16日 당시 이 발굴 현장에는 느닷없이 가는 바람에 사진기가 없어 폰카로 이렇게 남긴 것이 나로서는 유일하다. 그것을 보정하여 게재한다.사진 속 밀집모자 옆이 오늘날의 풍납토성을 있게 한 주인공 이형구 선문대 교수다. 발굴지점은 동벽 중에서도 이른바 태양열주택지구라 해서 풍납동 아산병원과 가까운 지점이다. 그 발굴지점을 대략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성벽 절개조사는 이것이 두번째다. 1999년 첫번째 절개조사지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같.. 2019. 6. 10.
'새로운친구', 언제나 내가 먼저 입력한 전화번호 언젠가 한 말인데, 내 버릇 중에 그런대로 괜찮다는 급으로 평가할 만한 것으로 즉각적인 연락처 정리가 있다. 이런 버릇이 한창 체득화할 때는 명함을 받자마자 그 자리서 전화번호와 그 사람 직책과 이메일 정도를 입력하고는 다른 사람한테 쓰라고 명함을 돌려주곤 했으니, 이런 버릇이 그런 대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여전했다. (참고로 난 명함 기재 자동 어플인지 뭔지는 안 쓴다. 초반기 쓰다가 때려쳤다.) 그러다가 요새는 나 역시 게을러져서인지, 아니면 바쁘다는 핑계여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연락처 정리가 더뎌지기만 해서, 심지어 한동안 쌓인 명함이 지갑에서 떼거리로 쏟아져 나오기도 하니, 그렇게 쏟아진 명함을 일일이 정리하는 일도 보통 고역이 아닌지라, 요새는 노안까지 심해져 그 작은 명함 글씨가 잘 보일 리도 없.. 2019. 6. 9.
민음사와 갈라선 이문열, 그는 소설가가 아니라 사상가요 역사가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민음사와 동반관계를 끝냈다고 한다. 그 소식이 오늘 우리 공장을 통해 공식화했으니, 아래 기사가 그것이다. 이문열, 민음사와 '40년 동반항해' 끝냈다송고시간 | 2019-06-09 05:33지난 4월 계약해지…삼국지 등 기존작품 판권도 새 출판사로 옮길 듯'둔주곡 1980' 바탕 둔 장편소설 연말 출간 계획…"제목도 바뀔 가능성 커" 이문열씨는 내가 학창시절을 보낼 즈음, 하나의 문화현상이었다. 그만큼 그가 일으킨 선풍은 컸다. 특히 이제는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한 《사람의 아들》은 나한테는 우리 문학계, 소설계에도 이런 작품,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있구나 하는 충격파가 자못 컸다. 그러다가 나는 이문열을 잊고 지냈다. 나 스스로가 문학을 멀리한 까닭도 있거니와, 그래 맞다, 먹고 살.. 2019. 6. 9.
성덕왕 거북 대가리 되어 Tomb of King Seongdeok of Silla, Gyeongju / 慶州新羅聖德王陵 경주 신라 성덕왕릉이다. 작년 오늘 오세윤 작가가 드론 촬영을 했으니 굳이 싫다는 나를 모델로 박아 찍혀줬다. 그 귀부는 머리가 날아갔으니 내가 거북 머리가 되어줬다. 이 성덕왕릉 역시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이런 곳 지천인 경주야말로 국보 중의 국보 아니겠는가? 수학여행 한 번 다녀오고 출장길에 한 번 들리고 돌잔치 문상 가서는 경주 보고 왔노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2019. 6. 9.
무령왕릉에 관련된 인물들 1. 윤주영...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이 30주년을 맞은 2001년, 나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주무 장관이셨는데, 혹 당신이 무령왕릉 발굴을 지시하셨냐 라는 등등을 물었다고 기억한다. 예상대로 그는 이 발굴과 관련한 의미심장한 증언은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조선일보 무슨 고문인가로 있었다. 1928년생, 만 91세인 그는 요즘도 모임 같은 데 간혹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2. 김원룡...당시 국립박물관장이었다. 느닷없는 발굴책임자로 낙점되어 한국고고학, 아니 세계 고고학 사상 유례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하 생략 3. 안승주...무령왕릉 발굴 당시 당장 무령왕릉을 발굴해야 한다고 주창한 공주 지역 역사학계 주축 중 한 명이다. 나중인.. 2019. 6. 9.
漢文構造論講話, 對句의 一例 前漢의 문사 유향劉向이 篇한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에는 ‘소진시장연횡蘇秦始將連橫’, 즉, 소진蘇秦이란 야부리꾼이 진秦 혜왕惠王한테 합종책合縱策에 대항하기 위해 秦國은 연횡책連橫策을 쓰야 한다고 설득하는 장면을 수록하거니와, 그 첫 대목은 다음과 같다. 蘇秦始將連橫,說秦惠王曰:「大王之國,西有巴蜀漢中之利,北有胡貉代馬之用,南有巫山黔中之限,東有餚函之固。 소진이 애초에 연횡설로써 진 혜왕을 이렇게 설득했다. “대왕의 나라는 서쪽으로 파촉과 한중의 지리적 이점이 있고, 북쪽으로는 호땅의 담비 가죽과 대땅의 말의 효용이 있으며, 남쪽으로 무산과 검중의 방어벽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효산과 함곡의 견고함이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구가 발견된다. 西有巴蜀漢中之利 北有胡貉代馬之用 南有巫山黔中之限 東有餚函之.. 2019. 6. 9.
전두환시대의 박종환과 김종부, 그리고 날아간 임시공휴일 저 시대 스포츠 열광은 이 시대와 뭔가 다른데 그걸 뭐라 내가 콕 집어말하기는 그렇다.그제 회사 근처 연초장에서 우리공장 스포츠부장과 한 대 빨면서 내가 말하기를 "8강만 해도 엄청난 성관데 관심은 어째 너무 없는거 같어"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때만 해도 볼 게 없었고 지금은 사람들 수준이 챔스에 가 있어요. 사람들 눈이 높아져서 그래요" 타당한 분석이라 본다. 조금전 U-20월드컵축구대회 한국과 세네갈 간 8강전이 끝나 한국이 승부처기 접전 끝에 4강에 진출해 남미 에콰도르와 결승행 티켓 확보를 위한 단판승부를 벌인다. 나름 축구광인 나는 준결이 9일인 줄은 기억했으나 절박한 것은 아닌 까닭에 그 시간을 까먹고 말아 막연히 오늘 저녁 하겠지 했더랬는데 새벽이었다. 아침에 깨자마자 이런저런 웹서칭하다.. 2019. 6. 9.
이태리제 안경집 두어달 전이다. 어느 지인 sns 계정을 보니 이탈리아에서 탱자탱자 하는 중이었다. 뭔 말로는 업무차 갔다는데 아님이 분명했다. 내친 김에 거기 안경집 하나 좀 사다 달랬다. 당신이 나를 안다는 것 자체가 당신 인생엔 축복이니, 그런 축복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고마이 받겠다 했다. 그 지인이 귀국한지 두어 달.. 오늘 첨 만났는데 턱 하니 선물이라고 안경집을 내놓는다. 받고선 대뜸 따졌다. "고작 한 개?" 파안대소했다. 음..그나저나 이태리제 가죽제품이라 그런지 냄새도 달라. 순전히 기분인가? 시름하는 노안이 이태리제 안경집 안경으론 어째 더 잘 보이는 듯. 개안한 심봉사인듯. 2019. 6. 8.
이화여대박물관 분청사기 특별전(2) 2019. 6. 8.
이화여대박물관 분청사기 특별전(1) 2019. 6. 8.
이화여대박물관 분청사기 특별전 완전한 요양을 선언하고 몸져 누웠다가 수박 먹으란 마눌님 호령에 깨어 우거적우거적 시원한 수박 씹다 보니 잠이 쏵 달아나는지라주섬주섬 대강대강 걸치고는 길을 나서 신촌으로 향했더라. 들어서니 시원해 좋다. 이런 여름 대한민국은 전국토 박물관화해야 한다. 에어컨 빵빵..역시 돈 많은 대학은 뭔가 다르다. (한데 에어컨 한 틀었다고....) 막 쟁여놨다. 분청이라 이름하는 것들은 죄다 쑤셔박았다. 편병이니 귀얄이니 똥장군까지 베개도 있고 자라병도 있다. 제법 똥폼 나는 것도 있어 하나쯤 쌔벼다 내 서재 놓고픈 것도 있다. 뭐 제작지 혹은 용처 박은 것도 별도 분류하고 주검과 함께한 께름칙한 묘지석도 있으니 관심있는 이 찾아보라 권하고 싶다. 2019. 6. 8.
소위 김원봉 문제 독립운동가 중에 김원봉은 실은 뒤늦게 뛰어들었으니 대중매체에 힘입어 지하에서 부활했다. 영화가 결정적이었고 그 붐에 힘입어 국가서훈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솔솔 나오는가 싶더니 그 찬반을 두고 뜨겁다. 이 김원봉 문제를 시대변화와 더불어 우리사회가 유연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이 논란은 김원봉에 그치지 아니한다는 게 심각성이 있다. 김원봉과 거의 흡사한 길을 박헌영이 걸었고 김일성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김원봉보다 박헌영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정치지향은 혹 조금 다를지 몰라도 격렬한 독립투쟁가로서 박헌영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이 부셔 이미 1920년대 초반에 조선공산당 수괴로 우뚝 섰다. 북한 정권 수립과 더불어 부수상이자 2인자로 있다가 역시 숙청된 박헌영도 서훈해야 한다. 그다음 김일성은 어찌할것.. 2019. 6. 8.
2013년 현충일 강남 세곡동 발굴현장 몇 장면 요즘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 고고학발굴현장은 계절과 요일을 가리지 않아, 한겨울에도, 한여름에도,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작업을 했다. SH공사가 보금자리주택을 건설할 예정이던 서울 강남구 세곡2 보금자리주택 예정지를 2013년 한강문화재연구원이 발굴했다. 현재는 보금자리 주택이 대거 들어섰으며, 이때 확인한 유적 핵심지구는 현장 보존조치되고, 유적공원이 조성되었다. 대모산 기슭을 파헤친 이 발굴에 대해서도 추후 별도 자리를 마련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곳 발굴성과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이 조선전기 기와가마 네 곳이 떼거리로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그 기와가마 바로 옆에서 범자를 새긴 저런 조선전기 와당이 발굴되었다. 이 사진도 그렇고, 뒤에 첨부하는 사진들은 그해 현충일 세곡동 발굴.. 2019. 6. 8.
장개 두 번 가지 마라 복잡하다. 실은 내 선친도 장개 두번 가시는 바람에 묘소를 우째해얄지 좀 고민이다. 봉분 세 개를 만들어야는데 그 상대적 위치도 고민이다. 부부를 같은 봉분에 합장할 때도 그리고 봉분은 따로 하지만 같은 구역에 놓을 때는 대체로 남자가 우측, 여자가 좌측이라 물론 좌우 기준은 상주가 아니라 고인 기준이라 그것이 예법에 맞는다 해서 저리 배치하나 가끔 변태變態도 있어 거꾸로 하기도 한다. 한데 부인이 둘이면 어찌하는가? 이 역시 예법엔 있을 것이로대 지금은 기억에 나지 아니한다. 셋이면, 넷이면 또 우째야는가? 신라 자비마립간은 셋이었다. 요는 장개는 한 번 가고 말지 두번 하지 마라. 자식들 골치 아푸니깐... 아 참...사진은 강남 세곡동인가? 그짝 광평대군 묘역이다. 2019. 6. 8.
사진으로 보는 부여 능산리 유적 몇 장면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사역寺域 발굴상황을 논할 때 항용 인용하는 국립부여박물관 사진이다. 부여박물관이 펴낸 발굴보고서에도 그대로 수록됐다. 이거 합성이다. 능산리사지가 이렇게 한꺼번에 노출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이 합성이란 사실은 보고서 어디에도 없다. 자칫 역사 조작 논란을 부를 만한 사안이다. 합성임을 밝혔어야 한다. 포샵은 비밀을 폭로한다. 널리 알려진 능산리사지 백제금동대향로 출토 장면이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노출 등을 조정해보니 야간 발굴이었음이 더욱 명백해진다. 후래시를 썼던 것이다. 금동대향로는 한밤중에, 그것도 한겨울에 물이 나는 땅을 맨손으로 헤집고 발굴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이 사진은 지금은 세종문화재연구원 실장으로 있는 진성섭이 했으며, 실제 맨손 발굴은 조사연구단장 at 서라.. 2019. 6. 8.
남당南堂ㆍ도당都堂ㆍ명당明堂ㆍ신궁神宮, 그리고 나정蘿井 3회에 걸쳐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를 통해 2005년 8월에 송고한 같은 제목 기사는 마침 당시 박혁거세 탄강지인 경주 나정 발굴성과에 즈음해 이곳이 틀림없는 나정이요 신궁임을 확신하는 내용으로 점철한다. 내가 언젠가 말했듯이 신궁을 나만큼 아는 사람 단군조선 이래 이 지구상,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나정은 발굴결과 우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남에 따라, 신라시대 나정이 아니라는 문제제기도 이후 이은석 선생을 비롯해 몇몇에 의해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제목에서 열거한 저런 정사당政事堂 겸 제장祭場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한다. 지금의 경주 나정은 신라시대 그 나정임에 틀림없고, 더구나 그에 들어선 제장은 신궁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신궁이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로 아는 이가 많지만, 웃기는 소리다. .. 2019. 6. 8.
헛산 견생犬生 문득 상념想念한다. 내 견생犬生 헛되지는 아니했는가? 내가 계속 이리 살아야 하나? 인간계 절대 각자覺者 싯따르타가 그랬다더군.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存 이라 말일세. 한데 말이야 이 세상엔 개새끼가 너무 많아. 다들 저 잘났다는데 말야 족보도 없는 똥개더만. 남한산 망월사望月寺 견공은 오늘도 생각한다. 견생犬生도 괴로워. 그래 옆집 장경사 또순이나 만나러 가야지. 혹 알아? 닭백숙 집 닭뼈다귀라도 얻어걸릴지? 2019. 6. 8.
Hydrangea in rain 간밤 비바람에 퍼뜩 그 수국 어떤 몰골일까 궁금해 찾았더니 삼십년 직장 생활 찌든 오십대 중반 회사원 퇴근버스 몰골이다. 그러지 않았던가? 수국은 죽음과 종말이라고. 하나 더 붙인다. 피곤이라고 개피곤이라고 2019. 6. 7.
뉘였다가 세운 부여 군수리절터 목탑 중심기둥 아래 전문 인용하는 기사에서도 드러나고, 내 기억에도 분명 송의정 소장 시절이었다. 철두철미 박물관맨인 송의정이 윤형원 등과 더불어 인사교류 명목으로 2년인가 잠시 문화재청으로 파견나가 근무한 적이 있으니, 여담이나 이때 재미를 붙인 윤형원은 이후 한 번 더 문화재청 근무를 자청해 해양연구소에서 과장 2년인가 해 묵고 부여박물관장으로 튀었다. 애니웨이, 송의정 소장 시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역점으로 벌인 발굴사업이 부여 군수리절터였다. 2005년 6월 14일자 내 기사가 이를 예고했으니,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부여 군수리 백제 절터 70년만에 재발굴1935-1936년 조선총독부 조사 이후 처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 마지막 도읍 부여에 위치한 그 시대 절터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 2019. 6. 7.
Academic Advisory Consultation Report on the fourth excavation survey of NeungAngol Tumuli Site at Buyeo The 2nd Academic Advisory Consultation Report on the fourth Excavation Survey of Neung-angol Tomb Site at Buyeo by the Baekje Culture Foundation, May 23rd, 2019 扶餘陵안골古墳群四次発掘調査2次学術諮問会議の資料集(百濟古都文化財團) / 부여 능안골고분군 4차 발굴조사 2차 학술자문회의 자료집 (백제고도문화재단) Refer to the following link for this press release. 부여 백제 지배층 무덤 무덤방, 점점 좁고 길어졌다(종합)송고시간 | 2019-06-07 10:25능안골 고분군 석실묘 5기 조사…무덤길은 점차 사라져관에 쓴 못·고리·귀걸이 출토…"초.. 2019. 6. 7.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9)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우리나라 조선시대 회곽묘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의 하나는 회곽묘 구조가 처음 조선 땅에 출현했을 때와 나중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백문화재연구원 방유리 선생의 "조선시대 회격묘 출토 유물의 수습과 보존" (야외고고학 제 7호)이나 김우림 선생의 단행본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을 보면 이 부분이 비교적 자세하다. 김우림 선생 주장에 따르면 조선전기에는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방식대로 회곽묘를 만들었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국조오례의" 방식의 회곽묘 제작 기법. 방유리 선생의 논문에서 전재하였다. 초기 방식의 회곽묘 제작 방식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묘광을 파고 그 위에 목곽-.. 2019.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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