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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1816

전혀 다른 책, 더 다른 지식 구조 근대 이전 한국과 일본의 서적 문화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한국은 남아 있는 서지들이 주로 목판, 활자 등으로 인출된 것 위주이며 일본은 대부분이 필사본이라는 데 있다. 가마쿠라 시대 정사로 존중받는 아즈마카가미 같은 경우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전에는 인출된 적이 없으며 모두 필사본이다. 따라서 일본위키에 각종 서적의 서지를 보면 대부분 무슨 무슨 필사본 하여 서로 다른 필사본들의 내력이 적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Made in Japan 서적들이 본격적으로 인출되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 이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군담소설 등 문학작품이 자국어로 쓰인 것이 많고 이를 그림으로 직접 그려 화려하게 수식한 에마키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런 책들의 필사 그림을 .. 2024. 5. 2.
활자의 목적: 편한 교정을 생각해야 우리는 구텐베르크의 활자에 선동당하고 있기 때문에 활자인쇄는 대량생산이 목적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경우 활자의 역사가 유구하지만 정작 대량생산은 목판 몫이었다. 활자는 몇 부 안 찍었다. 앞서 이야기한 실록은 다해서 5부이니 교정쇄까지 해도 7-8부일 것이고 우리가 편찬한 의방유취는 동양 최대 의학서라 무려 266권 264책으로 성종 때 활자로 인출했는데 딱 30부 찍었다. 너무 방대한 책을 너무 적게 찍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모두 사라지고 일본이 임란 때 털어간 1부를 가지고 에도시대에 목판으로 찍어 보던 것을 한국에서 역수입한 것으로 안다. 우리는 이렇게 적은 권수를 찍으려면 도대체 활자로 조판하는 품을 생각하면 차라리 필사하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 2024. 5. 1.
필사와 활자 우리의 활자가 대량인쇄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왕조실록처럼 달랑 5부에 교정용으로 한 두 부 더 찍는다 해도 많아 봐야 6-7부 정도 찍을 책까지 활자로 인쇄한 것은 왜 그랬을까? 필사보다 활자로 인쇄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어서 그랬을까? 필자 생각에는 활자로 5부를 찍는 것보다 필사를 하는 편이 실록 5부 만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숙련된 사람이 필사하면 활자로 찍는 것 못지 않은 속도가 났을 것이다. 실제로 왕조실록에는 활자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필사본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 도대체 왜 활자로 찍었을까? 필자 생각에는 이렇다. 교정을 위해서일 것이다. 5부를 찍되 교정은 한 장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장에서 오탈자 등 고쳐야 할 부분이 나오면 판을 엎지 않은.. 2024. 5. 1.
중국의 농경 양식을 거울처럼 비추는 요하 이동 위 그림을 보자. 근간 2019년인가 중국 쪽 고고학자들이 보고한 도작, 혼합, 잡곡 문명 유적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대략 초록색과 빨간색 점선 사이 지역이 도작과 잡곡이 함께 일어나는 혼합농경 유적지에 해당한다.  요하유역 인근을 보면, 북쪽은 모두 시뻘건 잡곡농경유적이되 요동반도 남쪽에 혼합농경과 도작 농경의 유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유적들이 산동반도 쪽에서 건너온 혼합 농경과 도작농경 유적들로서 이 흐름이 한반도로 들어와 평양 인근과 한강 유역 일대에서 북쪽에서 내려와 있던 잡곡 농경과 만나 한반도의 혼합농경이 탄생한 다음이 혼합농경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까지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쌀과 잡곡은 별개의 기원으로 이 둘이 만나 완성된 혼합농경이 된 곳은 한반도 북부와 중부.. 2024. 4. 30.
한국사와 중국 남북조 중국사에서 강남으로 이주가 본격 시작된 것은 동진 때부터로 안다. 그리고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남송 때부터로 알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화북지역 사람이 남쪽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화북은 잡곡농경, 화남은 도작농경 지역이며 그 사이인 회하 유역이 혼합농경지대에 해당한다. 동진과 남송이 강남으로 옮겨 간 후 다시는 화북과 통합되지 않고 동진과 남송이 계속 유지되고, 그 후 동진과 남송이 북벌과 고토회복을 계속 꿈꾸며 살았다고 치자. 그게 한국사다.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한국사는 잡곡농경지역과 혼합농경지역이 병존하고 있었는데 삼국통일 과정에서 잡곡농경지역이 이민족에게 함몰되어 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거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는 두 지역은 합쳐지지 않고남쪽 혼합농경.. 2024. 4. 30.
부여 고구려 문명의 기초로서의 잡곡 농경 우리는 한국사에서 도작 이전의 잡곡농경을 매우 저평가하면서도부여와 고구려 문명이 한반도 남부보다 빨리 일어났다는 점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것 모순이 아닌가? 부여 고구려 문명은 고구려의 남천 이전에는 도작에 기반한 적이 없으며남천 이후에도 한강유역을 획득하기 전에는도작이라는 것의 맛을 제대로 보았을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결국 부여 고구려 문명은 남만주-한반도 북부 일대의 잡곡농경에 기반한 문명일진대, 이는 사실 쌀만 제대로 된 곡식으로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생산성에 의문을 가질지 모르나, 사실 찬란한 황하문명도 바로 조, 수수, 기장에 기반한 잡곡문명이었다는 점을 하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본다. 여기 여러 번 쓴 것 같지만, 도작문명과는 별개의 잡곡문명권을 도작문명사 만큼이나..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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