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 2840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5) 카터의 발굴팀 – 당대 최고의 전문가 집단 이후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가 투탕카멘 왕묘를 발견하게 된 경위는 앞선 시리즈에서 살펴본 대로입니다. 진짜 문제는 세기의 대발견 다음부터 발생합니다. 그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었고 이와 같은 관심과 열기에 힘입어 카터는 당대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발굴팀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 고대 이집트 문헌학자 앨런 가디너 Alan H. Gardiner (1879~1963)·영국 화학자이자 보존전문가 알프레드 루커스 Alfred Lucas (1867~1945)·메트로폴리탄박물관 보존전문가 아서 메이스 Arthur Cruttenden Mace (1874~1928)·영국 발굴 건축기사 아서 캘린더 Arthur Callender (1875~1936).. 2022. 12. 6. 1962년, 백옥빈 씨가 브라질행 치차렌카 호에 몸을 실은 까닭은? 치차렌카호에 실은 반세기 전 브라질 이민의 꿈 송고시간 2014-04-30 17:25 김태식 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브라질 속의 한국인' 특별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옥빈(白玉彬) 씨는 지구 반대편 머나먼 브라질 산토스항을 향해 정오에 부산항 제2부두를 출항한 화란(和蘭) 선적 치차렌카호(號)에 몸을 실었다. 12월 18일, 남쪽이라 그런지 그가 항구에 도착한 이른 아침에는 날씨가 영하로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몹시도 쌀쌀"한 추위에 "오돌오돌 떨었다". 이날 부산 기온은 최저 1.9도, 최고 9.6도. 서울 영등포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그만둔 서른아홉 살 백씨는 남편이자 의사인 고계순 씨, 그리고 슬하 아들 3명과 딸 1명과 함께 탔다. 그를 실은 배는 오키나와와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를.. 2022. 12. 6.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4) 하워드 카터와 카나본 경 1905년 영국과 프랑스 간 외교분쟁으로 하이집트 유물 총괄 감독관 Chief Inspector of Antiquities, Lower Egypt 직을 사임한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는 이집트에 계속 머물면서 관광가이드 화가 골동품 거래상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꾸려나갔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영국의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 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 경이 요양차 이집트를 방문했습니다. 부유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막대한 재산은 있었으나 인생의 뚜렷한 목표가 없던 카나본 경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스포츠를 즐겼으며 열정적으로 예술품.. 2022. 12. 4.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3) 하워드 카터 – 기록화가에서 고고학자로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는 1874년 5월 9일 영국 런던 서부 켄싱턴 Kensington 에서 11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존 카터 Samuel John Carter 는 신문 삽화가이자 동물화가였습니다. 카터는 영국 동부 노퍽 Norfolk 주 스와팜 Swaffam 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년시절 대부분을 보냈는데 건강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화가 재능을 물려받은 카터는 이웃에 살던 제2대 애머스트 남작부인 메리 세실 Mary Rothes Margaret Cecil, Second Baroness Amherst of Hackney (1857~1919) 추천으로 식물학자이자 이집트학자인 퍼시 뉴베리 Percy Edwar.. 2022. 12. 2. 금사金史 본기 18권 전체를 독파하고서 모든 죽어가는 장면은 비장하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고, 송을 핍박하고는 신하로 만들었고, 서하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했다. 고려는 금의 뿌리인 여진을 위무하는 위치였다가 나중에는 전세가 대역전되어 신하로 굴종해야 했다. 몽골 제국이 흥기하여 금을 압박하자, 시종 금에 억눌려 절치부심하던 송은 복수심에 불타 이때라고 해서 금을 남쪽에서 압박했다. 거인이 쓰러지자 사방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서하 역시 칼을 금에 칼을 겨누었다. 하지만 서하와 금이 무너지고, 몽골이 들어오자 그 앞잡이가 되어 주구 역할을 하던 송 역시 이내 멸망하면서 사직이 문을 닫았다. 100년을 지탱한 거인 금이 쓰러질 때 마지막 황제 애종이 남긴 말은 비참하기만 하다.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죽지 않은 군주가 없다." 고 했다.. 2022. 12. 2. 19세기 평양 기생들의 추억 《녹파잡기綠波雜記》 2006.05.25 09:33:47 '녹파잡기'에 기생 67명 문학적 형상화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43세가 되던 해인 1792년에는 부인 덕수이씨(德壽李氏)를 잃었으며, 이듬해에는 그렇게 의지하던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마저 저승으로 먼저 보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미스런 일에 휘말려 관직에서 쫓겨난 그가 경상도 안의현감으로 있던 자신을 찾아오자 연암 박지원은 13살 난 어리디 어린 기생을 그날 밤 제자격인 박제가 침소에 밀어넣었다. 이튿날, 연암은 초정에게 그 기생을 "데려가 소실로 삼도록 하라"고 한다. 하지만, 중늙은이 주제에 '어린소실'을 맞이했다는 주위의 눈총을 의식한 초정은 거절하고는 내키지 않은 발길을 돌.. 2022. 12. 1. 이전 1 ··· 339 340 341 342 343 344 345 ··· 47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