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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1721

안서도 둔전을 현화사에 시주했다는 기사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을 읽어가다 보면 그 11년, 1020년 8월에 왕이 안서도安西道 둔전 1,240결을 현화사玄化寺에 시주하니 양성兩省에서 두 세 차례나 논박했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八月. 以安西道屯田一千二百四十結施納于玄化寺. 兩省再三論駁, 不納.] 고 하거니와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난 이것이 무슨 뜻일가 몹시도 궁금하다. 혹 이에 관한 선행 연구가 있기는 할 법한데 찾아보지는 않았다. 안서도라면 고려사 지리地理3에 보이는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를 말할 것이어니와 그 수도는 해주海州라, 이는 지금도 도시 이름으로 남았거으니, 이에 의하면 이곳은 태조 왕건이 군郡 남쪽에 큰 바다가 있어 해주海州라는 이름을 내리고 성종 2년(983)에 12목牧을 설치할 때는 해주에도 그 하나가 설.. 2024. 2. 13.
1925년 풍납토성을 답사한 일본 인류학자 기요노 겐지[清野謙次] 일본의 저명한 형질인류학자로 기요노 겐지라는 인물이 있다. 청야겸차 清野謙次 라 쓴다. 1885년에 태어나 1955년에 사망했다. 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독일 유학 뒤에 귀국해서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활동하면서 일본인은 아이누 후손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일본인 독자 형성론 혹은 혼혈론으로 주창해 열렬한 칭송을 받았다. 수집벽이 정신병적이라, 사찰 보물을 훔쳐내다가 잡혀서 유죄판결을 받아 면직되는가 하면, 이 사태로 당시 교토제국대 총장이면서 한국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신화적 인물로 추앙하는 하마다 코사쿠 빈전경작 濱田耕作 이 사임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친구가 길러낸 제자 중에 731부대장이 있어, 이런 인연을 발판으로 생체실험에 깊이 간여한다. 전후 처리에 미국과 일본의 밀약으로 극적으로.. 2024. 2. 13.
AI로 복원한 도산 춘원 민세 단재 나혜석 AI 증폭 기술을 이용해 저화질 구린 서비스 사진 서비스가 이뤄지는 근세기 안재홍 안창호 이광수 박한영 신채호 나혜석 을 증폭해 봤다. 다른 데서는 문제가 안 생기는데 나혜석 할매는 얼굴 그림자를 수염으로 인식한다. 저런 건 후손질 포토샵을 활용해야 한다. 나머지는 그냥 써먹어도 왜곡 논란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2024. 2. 13.
왕가도, 거란 선제공격을 주장한 매파(2-2) 두 건의 찬반투표 현종이 죽고 그의 아들 덕종德宗이 재위하던 시절 이야기다. 왕가도는 덕종의 장인이기도 하다. 덕종이 칭제하기 시작한 그 원년 1031년 6월 3일, 내내 고려와는 문제를 일으킨 거란 6대 황제 성종聖宗이 사망하고 그 아들 야율종진耶律宗眞이 즉위하니 이가 7대 황제 흥종興宗이다. 종주국으로 섬기는 왕조 황제가 사망했으니 공식 사절 조문단을 파견해야 했다. 그 소임을 공부낭중工部郞中 유교柳喬와 낭중郞中 김행공金行恭이 뽑혀 가게 됐다. 한데 거란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 이를 틈타 부마駙馬 필제匹梯가 동경東京을 근거지로 삼아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태를 어찌 할 것인가? 이때 왕가도는 대 거란 강경파 선두주자에 서서 “거란은 우리와 우호를 맺고 예물도 교환하지만 매번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2024. 2. 13.
거란과 여진, 정복으로 성장한 왕조는 정복이 끝나면 몰락한다 정복왕조는 거의 비슷한 성장 곡선을 겪는데 창업주가 한창 개고생하며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힘의 제국을 이룩하며 이를 바탕으로 두어 세대가 지난 다음에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급속도로 몰락한다. 창업기는 겨를이 없어 거개 땅 따먹기에 주력하고 그러다가 두어 왕이 지난 다음에 거개 재위 오십년 안팎에 달하는 군주가 등장해 그 정복을 완성하고는 내실 다지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모든 정복왕조는 이 전성기를 지나면서 그 성장보다 빠른 속도로 곳곳에서 분열을 일으키다 결국 자멸하고 만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성장동력을 상실하는 까닭이다. 정복왕조 빛나는 급성장 비결은 말할 것도 없이 정복 그 자체다. 하지만 언제까지 마상馬上정치를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또 무엇보다 이제는 내실을 다질 때라 해서 내정에 골몰하나 그.. 2024. 2. 13.
왜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은 이색을 개망신 주었는가? 역성혁명에 동참도, 동의도 못한 목은 이색은 충신의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신왕조 개창에 죽음으로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성계에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막중해 이미 당대에 유학의 종장, 오야붕으로 통했다. 역성혁명 무렵 이색을 죽이라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이성계가 죽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명분이었다. 죽여서 골치 아픈 지식인 한 명 처단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여진족에 다름 없는 성계는 찬탈이란 오명을 두려워했다. 그 찬탈을 선양으로 미화하려면 목은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역시 목은은 거부했다. 실로 소극적이었지만 그는 결코 찬동하지 않았다. 이런 그는 씁쓸히 고려가 패망하는 장면을 목도하고는 4년인가를 더 살다 생을 마감..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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