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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233

고쳐 쓰는 것보다 혁명이 더 쉬웠던 조선 조선이라는 나라. 19세기 호적 하나만 봐도 완전히 누더기다. 편법과 각종 불법이 횡행하고 없어져야 할 특권과 말도 안되는 관행이 그대로 남아 이런 호적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혁명 후 전 국민이 일시동인하나의 호적체제에서 관리되는 나라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조선이라는 나라. 분명히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들끓는 멜팅 폿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만, 변화가 너무 늦었고, 새 시대를 담기에는 나라가 너무 후진 상태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고쳐 쓰는것 보다는 혁명 외에는 답이 없는 나라였다는 점은 틀림없다. 2025. 10. 5.
적서간의 라이벌 관계 물론 적자가 생각하면 서자는 상대도 안되는 부류였을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또 어찌 생각하면 적자가 볼 때 서자는 잠재적 위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보면, 18세기 이후가 되면 적자보다 서자가 숫자가 더 많아 지는데 사람이라는 것이 적자가 서자보다 항상 똑똑하고 잘나게 나올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서자와 적자를 똑같이 대우한다는 것은 결국, 집안 재산 분배에 있어 경쟁이 심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가끔 서자 자손이 과거에 장원을 해버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던 것을 보면, 서자들이 금고가 풀려 과거를 마음대로 보고 경쟁하게 되면이는 곧 적자들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전자와 서자의 관계를 지나치게 협조적 내지는 순종적으로 보는 듯 한데, 상식적으로.. 2025. 10. 5.
그 많은 서자 자손들은 어디에? 위 그림은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34_0020_0020_0010_0020#ftid_131) 우리역사넷(2) 서얼인구의 양적 증가와 질적 변화  조선시대 서얼의 개념 속에는 양반의 첩자녀와 그 자손뿐만 아니라 부계가 사족이더라도 모계쪽의 어느 한 가닥이라도 사족이 아닌 혈통에 연결되어 있contents.history.go.kr여기서 받아왔다. 조선시대 서자 숫자는 최소한 적서 숫자와 대등하거나 이보다 더 많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시대 반가에서 첩을 두는 것은 전혀 불법이 아니었던 데다가그 사이에서 나오는 서출은 서양에서 말하는 사생아와도 달랐다. 적법한 자손이지만 모계 때문에 차별받는 .. 2025. 10. 5.
다음번 대동보는 가능할까? 일제시대 우리나라 출판물 발행 1위가 무엇이었을까?바로 족보였다. 우리는 문학 동인지나 잡지나 아니면 이광수 춘원의 소설 아니었을까 싶지만일제시대 베스트셀러 1위는 대동보였다. 일제시대에도 이미 수십 만을 거느린 대 씨족이 출현한 바이곳에서 전체 씨족으로부터 수단하여 대동보를 찍어내게 되면수만 부 판매는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19세기 족보만 해도 씨족에 따라서는 족보에 "서자"라는 딱지를 족보에 떡 하니 붙여 놓고는 하였는데, 20세기 족보에서는 그런 딱지는 전부 사라졌다. 그런 딱지를 붙이다가는 같은 문중 사람들의 항의는 둘째 치고, 대동보 판매도 장담 못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대동보나 파보는 틈만 나면 찍어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2025. 10. 5.
하재일기 독서 시작 조선시대 일기를 하나씩 시간 나는 대로 읽어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재일기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국역한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기 시작했다. 구한말의 일기인데, 필자가 연구하는 검안자료의 시기와 겹쳐 도움이 될 것 같다.틈틈이 비망기 삼아 올려두겠다. *** 편집자주 *** 저 하재일기荷齋日記가 나로서는 생소한데, 이르기를 도자기를 생산하던 분원공소分院貢所 공인貢人 지규식池圭植이 조선 고종 28년,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 7개월 동안 쓴 일기로. 총 9책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원본은 소장되어 있다 한다.경기도 양근군 남종면 분원리(현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도자기 만드는 일을 한 평민 지규식이 1891년 1월 1일부터 1911년 윤 6월 29일까지 20년.. 2025. 10. 5.
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 최근에 안동권씨 성화보를 배독한 바, 이런 규모의 족보가 1476년에 이미 발간되었다는 데서, 이 집안의 당시 명망을 알 수 있겠다. 책 하나를 편집하려 해도 원고가 도착하는 때가 들쭉날쭉으로 마지막까지 원고를 보내지 않고 결사저항하는 저자가 부지기수인 바 저때라고 달랐겠는가? 같은 동성의 같은 파보를 만들어도 수단이 제대로 안 되어 20세기나 되어야 파보를 제대로 만들어 내는 집이 널렸는데, 1476년에 사료로 가치도 풍부한 이 정도 규모의 족보를성도 다른 여러 문중으로부터 수단하여 만들어 낸 것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극심한 근친혼 콩가루 사회를 증명한 안동권씨 족보https://historylibrary.net/m/entry/%E3%85%87-836069 극심한 근친혼 콩가루 사회를 증명한 안동.. 202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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