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족보 이야기331 같은 후손 호적의 다른 직역 호적을 보면, 족보에는 별 차이 없는 형제, 혹은 사촌끼리인데 직역이 다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17세기 초반 직역이 형제끼리인데도 누구는 유학인데 누구는 업무業武나 업유業儒인 것 같은 경우이다. 이런 경우 높은 확률로 후자는 서자다. 물론 업무나 업유도 평민의 직역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양반의 직역은 아니다. 우리 학계는 이를 분명히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 문중의 항의 때문일 거라 본다)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데 조선후기에 전체 양반 후손 중에 서자가 적지 않았다. 필자 생각으로는 적자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왜냐. 길고 긴 족보의 리니지에서한 번만 서자가 조상 중에 나와버리면그 집안은 금고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내가 서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 조상 중에 서자가 있.. 2025. 8. 29. 유학으로 다시 도망간 선무군관選武軍官 학계 이야기를 보면 선무군관은 양인 중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추려낸 것으로 되어 있지만, 호적을 보면 글쎄올씨다다. 왜냐하면 선무군관으로 직역을 받은 사람들 선계를 따라 올라가면 대부분 유학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18세기 중엽이므로 (균역법 시행 당시) 18세기 중엽 이전에 유학이라면 아무리 양반 끝자락이라한들 이들이 최소한 스스로를 평민으로 의식하고 있었는가 하면 천만의 말씀일 것으로 본다. 이들은 유학을 어거지로 붙이면서 양반 끝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망정 스스로를 평민이라고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들 선무군관들은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이전까지 부담하지 않던 군포 1필을 부담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불만이 없을 수 없으니 당시 정부에서는이들에게 군관이라는 직역명도 붙여주고 비록 형.. 2025. 8. 29. 밍기적대다 결정적인 한 방을 놓친 정조, 삼정 문란을 부르다 물론 호적이란 게 동네마다 달라 일반화하기 이른지 모르겠지만, 균역법 시행후 일반 백성들에게서는 군포 1필을 줄이는 대신 이 모자란 군필을 원래는 양반들에게 부과하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영조의 균역법은 이 모자란 군액을 수포군관收布軍官, 혹은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이름으로 원래 군포軍布를 부과하지 않던 이들에게 새로 부과하면서 충당했는데 이들은 양반의 아래 끄트머리, 중인, 부유한 상민층에 해당했다. 문제는 위로 양반들의 면역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면세특권이 남아 있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다시 양반 면세 특권을 향해 사람들이 질주하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시점이 대략 정조연간에 해당한다. 이 정조연간에 양반들에게 군포를 부과하고 서얼 허통이 되어버렸으면 19세기 조선의 .. 2025. 8. 29. 느닷없이 얻어터진 유포遊布, 미래를 호시虎視하다 조선후기에는 이른바 저 유포遊布라는 존재가 있다. 쉽게 말해서 한유자閑遊者, 곧 한가롭게 놀고 먹는자에게 군역軍役을 부과해서 포를 걷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양반의 최하말단으로 호적에는 유학을 업무로 삼는다 해서 업유業儒, 무관을 업으로 삼는다 해서 업무業武, 그리고 균역법均役法 시행 시기에는 이른바 선무군관選武軍官, 수포군관收布軍官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호적에는 드물지만 사료에 교생[校生 아닌가?]이라 하는 사람들도 여기 들어간다.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호적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아주 반복무상하다. 어떤 때는 유학을 칭하다가 업유나 업무를 칭하다가균역법이 시행된 직후에는 선무군관이 되기도 한다. 균역법 이전에는 교생이나 업유, 업무라 하여 양반의 말단으로 군역을 원.. 2025. 8. 29. 잿더미에서 기적처럼 부활했다는 한국인 한국인과 한국사가 역사상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면필자가 보기엔 몽골 간섭기도 아니고, 임진왜란도 아니고, 바로 한군현 시기와 일제시대다. 이 두 시대는 한국을 침략해 들어온 두 세력과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역량이그야말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한국사 자체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전자의 경우 당시 한 제국의 영향 하에 들어간 지역 중 그 후 독립하여 별도의 문명을 형성한 지역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점에서 (베트남은 천년 후 독립)그 당시 한국인의 조상이라 할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 사람들이얼마나 큰 위기였는지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제시대로 이 역시 이 시기로 들어가기 전 조선 사회가 18세기 말까지도 노비사역이 끝나지 않은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낙후된 상.. 2025. 8. 28. 욕망의 멜팅 폿 19세기 우리 역사에서는 19세기 하면, 삼정 문란, 척왜양이,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만 보지만필자는 이 시기는 거대한 욕망의 멜팅폿이었다고 본다. 일단 그 전 세기까지 노비였던 전 인구 절반은어쨌건 호적상 양반이라는 유학까지 성공적으로 진입하여자신감이 나름 충만한 상태였고, 노비사역이 해체되고 지주 전호제를 기반한 소농사회에서 소작으로 떨어져 간신히 먹고 살던 양반 최하층들은 이 끝도 없는 악순환에서 어떻게든 탈출해 보려 했을 것이며, 지난 이백년간 권력을 독점하여 잘 먹고 잘 살던 경화사족들은어떻게 하면 다가오는 환란을 잘 넘겨서 이 부와 권력을 대물림할 수 있을까 골몰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 와중에 우국충정 지사들도 있었을 테고 그분들에게는 마땅한 존경을 표할수 있겠지만, 문제는 세상이 그런 흐름에 .. 2025. 8. 25. 이전 1 ··· 30 31 32 33 34 35 36 ··· 5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