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3175 사전私田과 결합한 무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중국의 당대, 한국의 통일신라말, 일본의 헤이안 말 이후 공통의 과제는 토지에 대한 공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출현하는 사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혼란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결국 벌어지는 사건들이 당말의 혼란 라말여초 그리고 헤이안 말의 무가의 등장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안의 심각성은 그렇게 불거져 나온 사전들이 무력과 결합하면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중국 오대시기의 절도사 체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혼란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라말여초 호족의 대두가 동네 농민들 끌고 다녔다고 생각하는가? 그 밑에는 자기 토지를 가지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력을 끼고 다니는 동네 건달들, 아니 신흥 무인세력이 있었다. 이들이 호족 밑에서 이를 옹립하여 떠 받드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 2024. 1. 7. 사후에야 탈세 혐의를 벗었다는 나폴리 수호신 디에고 마라도나 축구 영웅 마라도나, 30여년만에 '나폴리 탈세' 혐의 벗어 송고시간 2024-01-06 02:46 축구 영웅 마라도나, 30여년만에 '나폴리 탈세' 혐의 벗어 | 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뛸 당시의 탈세 혐의를 마침내 벗었다. www.yna.co.kr 나폴리에서 마라도나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근자 현지 방문을 통해 실감했으니 나폴리가 현재의 나폴리로 정착한 직접 시점은 기원전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는데, 그때 수호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 자리를 대체한 까닭이다. 그 어떤 신도 이곳에서는 마라도나를 대체할 수는 없다. 나폴리가 한때는 위광을.. 2024. 1. 7.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말하는 1915년 능산리 고분 발굴 ***세심한 번역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긴 것이니 상세한 인용은 직접 고고학잡지 1916년 6-3호를 보라. 나는 지난 메이지 42년(1909) 한국 탁지부 촉탁을 받아 다이이谷井 문학사 구리아마栗山 공학사와 더불어 백제 고도인 공주와 부여의 유적을 조사한 일이 있지만 본년 7월 곡정 문학사 및 후지타後藤 공학사와 조선총독부 촉탁을 받아 다시 부여에 이르러 그 부분을 답사하고 6일 두 사람과 갈라져 공주에 이르러 그 산성 연구를 시도했다. 앞선 조사에서는 성벽 유적의 외곽 형태 외에 백제시대 유물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분묘 발굴을 시도한 결과 당시 분묘 양식도 분명히 알게 되고 또 부장품이나 성벽 유적 출토 고기와의 문양이 크게 우리 나라시대의 그것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2024. 1. 7. 고려 정벌을 반대한 소적렬蕭敵烈 날로곤涅魯袞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적렬蕭敵烈은 자가 낱로곤涅魯袞이다. 재상 소달렬蕭撻烈의 4세손이다. 식견과 도량이 크고 원대하여 향리에서 받들었다. (관직 진출) 처음에 우군창사牛群敞史가 되었는데 황제가 그가 똑똑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러 입시하게 하고는 나중에 국구상온國舅詳穩으로 옮겨 주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황제가 어러 신료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康肇가 그의 군주 송誦(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그의 족형 순詢(현종)을 세우고는 그의 재상을 하고 있으니 그를 대역으로 처벌해야 한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 죄상을 물어야 할 것이다”고 하니 여러 신료가 모두 그래야 한다 했다. (하지만) 소적렬이 간언하기를 “나라가 해마다 정벌하느라 사졸이 지쳐 있고 나아가 폐하도 상중이십니다. 올 농.. 2024. 1. 7.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와 병사 수, 그리고 훈련도감 간단히 적어둔다.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에서 1석은 남성 성인 1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이다. 막번시대 일본에서 가장 큰 번이 가가번加賀藩이었다고 하는데 가가번은 호왈 가가백만석이라고 해서 백만석짜리 번이었다고 한다. 이대로 믿어 본다면 이 번에서는 백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 수는 어떨까? 100석당 병사 1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가번의 경우 가용 병력은 1만 명인 셈이다. 조선후기 훈련도감군은 병력 증감이 있었는데 대략 5천명선이었다고 하니 일본으로 친다면 50만석 짜리 번이 유지할 수 있는 직업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당시 파악하고 있는 인구가 6백만선이었다고 감안하면, 국가에서 6만 병력은 유지가 가능해야 했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 오군영이 그렇게 국가에 막대한.. 2024. 1. 7.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왜 없겠는가? 에도시대에 무슨 무과가 필요하겠는가? 가마쿠라 막부에 무과가 왜 필요하겠는가? 군인이라는 직역이 세습되는 사회에서는 무과란 필요가 없다. 고려시대에는 흔히 행오에서 군인을 발탁하여 썼므므로 무과가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이게 뭐 논산 훈련소에서 뽑아 놓고 잘 뛰는 사람을 위관 영관 장관급으로 춣세시켜 썼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차피 군인은 세습했다. 그게 군인전이다. 직역이 세습되고 있었으니 무과가 필요 없는 것이다. 2024. 1. 7. 이전 1 ··· 1562 1563 1564 1565 1566 1567 1568 ··· 386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