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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므린 파초 이파리 같은 마음 한시, 계절의 노래(321) 대신 써주다 두 수[代赠二首] 중 첫째 [당(唐)] 이상은(李商隱, 812~858) / 김영문 選譯評 누각 위에서 황혼 무렵바라보려다 그만 둠은 옥 계단 끊어진데다고리 같은 달 때문 파초는 잎 못 펴고라일락은 꽃잎 맺혀 함께 봄바람 향해서각자 수심에 젖네 楼上黄昏欲望休, 玉梯横绝月如钩. 芭蕉不展丁香结, 同向春风各自愁.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현제명, 「그 집 앞」) 사랑은 보고픈 마음이다. 포근한 봄날 저녁 파초는 새 순을 뽑아 올리고 라일락은 진한 향기를 발산한다. 임 그리는 마음 참을 수 없어 ‘그 집 앞’을 서성이지만 오히려 임의 눈에 띌까 부끄러워 다시 발걸..
서울 남산의 애국선열 조상造像 추상의 시민종교 교의 애국심을 구상으로 해체하라 1970년을 전후로 전국에 걸쳐 동상이 들어섰으니 그 건립지점은 사람들 내왕이 잦은 곳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공원이나 광장 같은 데가 집중 건립지점이었거니와, 이 운동은 어떤 세력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서울 남산에는 그런 흔적이 농후했으니 기슭마다 이런 동상이 들어서 남산도서관에는 이곳이 학문의 전당이라 간주했음인지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이 있다. 그 반대편 서울 구심을 바라보는 쪽에는 김유신 동상이 있고 저짝 장충단공원 동국대 쪽에는 사명대사 등이 있다. 광화문광장엔 이순신 동상이 있으며, 기타 조사하면 이런 동상 천지다. 이들 동상을 건립한 주체는 두 곳인데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그것이다. 서울신..
Three storied Stone Stupa at Shinwol-dong, Yeongcheon 경북 영천 신월동 삼층석탑이다. 꽂이 지는 이맘쯤 언제인가 이곳을 찾았더랬다. 떨어진 꽃잎 우려 낸 물에 잠겼으니 탑 수중산화 공양이라 해야 할까?
피안彼岸으로서의 사막과 초원, 그리고 실크로드 나는 북방과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초원에 대한 열망이라고 본다. 그래서 걸핏하면 우리는 알타이 민족의 시원을 찾는답시며 바이칼 호수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서역 혹은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사막과 오아시스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라고 본다. 초원과 사막은 한국 문화권에는 없다. 그래서일까? 그런 우리에게 각인한 유목과 사막은 진취와 광활, 야성, 그리고 원시의 표상이다. 사막과 초원을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강인하다는 이미지로 우리는 각인했다. 그들이 실제로 그러한지 아닌지는 관심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늘 그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표상들로써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사막과 초원에서 우리의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려 했는지도, 혹 하려는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늘 사대..
누나, 엄마 다음의 엄마 우리도 이렇게 컸다. 누나가 동생들 업어 키웠다. 낳기는 엄마요 키우기는 누나였다. 엄마의 다른 이름, 그것이 누나였다. 2009년 8월 13일 울란바타르 인근 몽골 초원에서. You raised me Up!
남산을 산화하는 꽃비 늦었다. 꽃은 이미 끝물이다. 곳곳엔 선혈낭자 꽂잎 시체 즐비하네. 지난주말 밤에 올라 이번주를 견뎌낼까 했더랬다. 그렇게 남산 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스스로가 목숨 끊곤 장렬히도 사라지네. 그들이 스러져간 자리에는 풍차마을 마실온 히딩크 친구들이 올긋봉긋 함실방실. 복사 역시 한창이라 지구촌 방방곡곡 도화녀桃花女 풍년이라 단군자손 원주민 도화녀에 동남아 도화녀 넘쳐나고 가끔은 로서아 도화녀에 일대제국 미국 도화녀도 보인다. 남산타워 범벅이라 뱃가죽 덕지덕지 기름기 빼겠다 성큼성큼 계단계단 오르는데 저 타워 오늘따라 참말로 멀고멀다. 아시바다. 노트르담 아른아른 타워도 아시바? 살피니 망사팬티 씨쓰루라. 무삼일인가? 생소함에 한번 더 쳐다보는데 그 새 봄은 저만치 줄행랑친다.
놓고 버리고 바꾸고 집착? 놓으면 된다. 신념? 버리면 된다. 지조? 바꾸면 된다. 살아보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이 세 가지더라.
아파트형 사찰, 진화하는 불교 서울 목동 파리공원 옆에 있는 법안정사라는 도심 사찰이다. 몇년 전 이곳에 들릴 일 있어 그때 촬영해 둔 것인데 도시화 시대 불교가 변용하는 한 양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법 재미있다. 공간 이용 극대화 차원인지 중층으로 맹글어 아래는 관음전, 위는 대웅전을 놓았으니 말이다. 이리 되니 협시보살을 부처가 깔아앉은 모양새다. 하긴 그 반대였다면 이상하지 아니하겠는가?부처를 보살이 깔아뭉갤 수는 없다. 몇년 전 이 SNS 포스팅에 남준기 기자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아파트도 마찬가지!윗집에선 초상 나고 아랫집에선 애기 낳고!" 이런 사례는 전통시대 불교 건축을 생각할 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변용 혹은 진화를 고려에 넣어야 한다고 본다. 현지 사정에 따라 얼마든 그랜드디자인은 모습을 바꾸기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