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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불륜의 씨앗 디오니소스와 그를 돌보는 여인들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 소재 A. 살리나스 고고학 박물관[A. Salinas Archaeological Museum] 서기 2세기 무렵 로마시대 바닥 모자이크 한 장면이다. 사티로스Satyr와 메나데Menade가 보인다. ​ 메나데는 방랑자 디오니소스Dionysus와 동행하는 여성들이다.제우스가 바람을 피워 세멜레Semele라는 여인한테서 낳은 아들 디오니소스는 태어난 후 제우스 조강지처로 질투의 화신 헤라Hera한테서 보호하고자 헤르메스Hermes가 메나드 여인들한테 맡겨 이 여인들한테서 양육되고 보살핌을 받았다. 2024. 8. 16.
호태왕비에는 연나라와의 싸움이 없다 재미있는 부분은-. 삼국사기의 광개토왕 기사는 영락 6년의 백제토벌 이전의 백제와의 싸움, 그리고 연나라[후연]와의 싸움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광개토왕비에는 연나라와의 싸움이 거의 기록이 되어있지 않고 반면에 삼국사기에는 없는 한반도 남정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호태왕비는 서로간에 교집합부분이 크지 않고 별개의 사건을 각각 적고 있는 셈이다. 왜 그럴까? 필자 생각으로는 광개토왕비가 세워지던 당시까지도 호태왕이 싸웠던 연이 그대로 존립하고 있었던 부분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말해 이 부분에 있어서도 광개토왕비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직필한 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많이 감안한 기록이라는 김단장의 의견에 공감한다. 광개토왕비문이 객관적인 사서에 준하는 기록물.. 2024. 8. 16.
광개토왕의 남정이 사서에서 빠진 경위 현재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김부식이 손을 많이 댔다기 보다, 전해 내려오는 고구려 사료를 많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고구려본기 앞부분은 신집의 내용을 그대로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나 보다. 그런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 기록을 보면, 전술한 바와 같이 광개토왕의 남정기사,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사실,신라의 요청으로 출병한 사실, 왜병을 신라영토에서 구축하고 가야까지 쫒아갔다는 사실 등 일련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제와의 기록이 전무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남정기사 이전의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 그렇다면-. 광개토왕비에는 있었던 남정기사가 언제 기록에서 누락되기 시작했을까. 이를 추정해 보면, 첫 .. 2024. 8. 16.
이제는 국가를 약탈할 때다 나는 여타 부문과 마찬가지로 문화재 업계 박물관업계를 드리운 국가주의라는 그 짙은 폐해의 문제를 집요하게, 줄기차게, 계속해서 지적하면서 연대해서 이걸 때려부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저 국가독점주의가 헌법이 보장한 국민기본권을 위배한다고 보는 까닭이다. 그래 헌법까지 가면 너무 거창하고 나아가 우리한테 절실한 저 박물관 절대 존립 기반 혹은 절대 존재 가치라는 측면에서도 저는 무엇보다 저 아이콤 박물관 정의를 빌린다면 accessibility와 diversity와 직결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과 다시 결부하면 저 문제는 결국 인구감소와 더불어 작금 한국사회 화두인 지방소멸문제와 직결한다. 지방을 살린다 말만 하면 뭐하는가? 저 문제를 문화재 박물관으로 좁히면 국가가 모조리 문화재를 .. 2024. 8. 16.
광개토왕의 남정은 왜 교차검증이 안되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호태왕비를 액면 그대로 취신하는 흐름은 아래 두 개의 토대 위에 있다. 첫째는 일본의 입장-. 무엇보다 신묘년 조 때문에 호태왕비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료이다. 특히 호태왕비는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고구려와 왜, 두 세력의 대결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사의 입장에서도 반드시 취신해야 하는 사료가 되겠다. 둘째는 우리의 입장-. 무엇보다 고대사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입장에서 서기 5세기 당대의 문자 자료라는 점에서 도전을 불허하는 측면이 있다. 비록 비문을 보면 백제와 신라, 가야가 골고루 망신을 당하고 있지만, 어차피 최후의 승자가 같은 한민족 국가인 고구려인데 어떠랴? 다만 신묘년 기사가 문제인데, 그것만 잘 방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취신할 만하겠다. 그런데 .. 2024. 8. 16.
광개토왕비와 신공 49년조: 일관성의 딜레마 앞에서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와 광개토왕비는 사실 거의 비슷한 구조의 글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근초고왕 시대에 있었다는 남정을 일본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가 전남 지역까지 정치적으로 통합했다는 근거로우리측에서 이 기록을 이용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측에서 이 기사를 이런식으로 믿는다 해도,정작 왜의 시각-. 즉 백제가 남정 이후 왜를 주인으로 섬기기로 했다는 부분은 우리가 또 믿지 않는다. 같은 기사에서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는 광개토왕비를 보자. 광개토왕비의 내용, 특히 이 시대 광개토왕의 남정기사 일체,백제에게서 항복을 받았다던가,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가야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며 정벌하고, 인심좋게 신라 수병에게 .. 2024.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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