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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樂浪公主) 고려 태조 왕건의 맏딸로 귀순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에게 시집갔다. 이후 신란공주(神鸞公主)라 불렀으며, 죽어 받은 이름인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낙랑국(樂浪國) : 이상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이 곧 평양성(平壤城)임이 마땅하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이고,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하지만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또한 백제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된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태조(太祖)가.. 2018. 4. 9.
왕철(王鐵)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때 고려의 태상(太相)이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맞게 했다. 2018. 4. 9.
범공(梵空)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막내아들로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때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바꾼 승려 이름. 법수사와 해인사에 주로 있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와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는지라 왕태자(王太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해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1,000년 사직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2018. 4. 9.
김봉휴(金封休)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할 적에 항복 문서를 들고 간 신라 관료.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와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는지라 왕태자(王太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해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1,000년 사직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2018. 4. 9.
신회(神會)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神會)가 외직(外職)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都城)이 황폐한 모습을 보고는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으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 2018. 4. 9.
경애왕(景哀王) 신라 제55대 왕의 시호. 재위 924∼927년. 박씨이며 본명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다. 허울만 남은 신라 말기 왕으로 왕건과 궁예의 치열한 패권 다툼에 견훤의 침략을 받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경애왕 : 경애왕(景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위응(魏膺)이고 경명왕 친동생이다. 원년(924) 9월에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禮訪)했다. 겨울 10월에 몸소 신궁에서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했다. 2년(925) 겨울 10월에 고울부(高鬱府) 장군 능문(能文)이 태조한테 투항했지만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 보내니, 그 성이 신라 왕도(王都)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11월에 후백제 임금 견훤이 조카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모로 보냈다. 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2018.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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