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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않는 나라에는 미래는 없다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책을 너무 안 읽는다. 남녀노소 애들 영감 할 것 없이 책을 거의 안본다. 우리나라 한글이 쉬워서 문맹이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글을 읽고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 온라인 댓글을 보면 도대체 글을 제대로 이해는 하고 쓰는 것인지 황당한 말도 많다. 일 때문에 만나 이야기해 보면 가방끈이 정말 긴 사람들도 논리적 사고가 안 되는 사람이 많다. 책을 안 읽어서 그렇다. 한국? 책 안 읽는다. 미국애들이 놀고 먹는 것 같지만, 걔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이 읽고 쓴다. 교양? 우리보다 걔들이 낫다. 도서관? 동네 도서관 가봐라. 미국 영감들이 바글바글하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책을 너무 안 읽고, 이런 풍토가 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준다는 생각이다. 책을 안 .. 2024. 2. 6.
한국학의 세계화는 입으로 되지 않는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 내는 책을 해외에서 팔아 먹을 수 있게 판매망부터 정비하는 것이다. 지금? 책을 찍어도 어떻게 팔아야 되는지도 모른다. 그 책을 해외에서 읽을 만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국내에서 책을 찍으면 아예 팔 방법이 없다. 80년대에 벌써 현대차는 미국에서 차를 팔아 먹었다. 같은 시기 삼성은 전 세계에 반도체를 팔아 먹었다. #한국출판 #한국학세계화 2024. 2. 5.
누가 토건정부인가? 아마도 다음달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숫자가 100을 돌파하는 모양이다. 그 효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 출범하기가 1995년 무렵인가 하거니와 마침내 백을 돌파했다. 이런 기관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때는 놀랍게도 노무현 시대다. 개발의 광풍, 토건국가라면 보수집권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겐 당혹스럽다. 토건 정부는 노무현 정부였다. 이 무렵 행정도시 건설이며 지방분권화 차원에서 핵심도시 기업도시 등등을 밀어붙였는데 전 국토를 헤집었다. 작금 이명박 정부를 사대강 사업을 빌미삼아 토건정부라 하지만 그보다 몇십 배 더 땅을 헤집은 정부는 노무현 정부였다. 이 시기에 매장문화재 전문기관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다가 또 한번 획기를 맞는데 이건무 청장 시절의 이명박 정부다. 매장문화재 전문기관 설립을 대폭 완.. 2024. 2. 5.
지리한 도덕 훈시로 나열한 최승로 시무 28조, 역사는 왜 그것을 전재했울까? 문제의 최승로 시무 28조 혹은 28책은 대서특필되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문을 수록했으니, 기전체인 전자는 그의 열전에서, 편년체인 후자는 그가 이를 제출한 성종 원년 982년 6월 항목에다가 전문을 실었다. 나는 모든 기록을 대할 적에 그것을 왜 편찬자들이 적었을까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주장한다. 고려사 편찬자들은 왜 이를 시시콜콜히 적었을까? 나는 그것을 궁구하는 과정이 고려사를 편찬한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는 길이라고 본다. 이는 최승로한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채록하는 고려사 사관들한테 중요했던 것이다. 최승로 본인이야 그걸 정리한다고 생똥을 쌌겠지만, 그렇다 해서 그 시무 28조를 문제작으로 그가 생각했겠는가는 별개 문제라 본다. 그건 관계없다. 우.. 2024. 2. 5.
쥐어 뜯겨 겨우 남은 고려사, 이른바 최승로 시무 28책(1) 앞서 우리는 거란 침입, 특히 이른바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 개경이 함락당하면서 실록까지 몽땅 불타버렸고, 그렇게 망실한 그 시대 역사를 왕명을 받들어 황주량이 겨우 기워 놓은 것이 지금의 목종 이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전반기 기록이며, 그런 까닭에 부실하기 짝이 없음을 보았다. 그 시기 일어난 일 중에 그 유명한 이른바 최승로 시무 28조 상서上書가 있으니, 이 역시 딱 그에 해당하는 다 뜯어먹기고는 겨우 남은 흔적에 지나지 아니한다. 이 시무 28조는 고려사에서는 대서특필하거니와, 한마디로 국가 경영책이라, 조선시대 이와 비견하는 방책이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다. 최승로 이 시무책을 생각할 적에 먼저 고려해야 하는 사실은 이는 그가 자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임금의 부름에 응답한 .. 2024. 2. 5.
고고학은 자연과학, 한성백제박물관 동물뼈 분석에 부친다 옛날이라 해 봐야 고작 20년 전, 10년 전 일밖에 더 되겠지만, 이제 고고학은 자연과학이다. 각종 이름으로 그것이 과학입네 하며 포장해 그것을 분석한다는 시대는 저 멀리 가고 없다. 이제는 고고학 조사를 통해 수십하는 정보는 경험으로 축적한 그 무엇으로 측정하는 시대가 아니다. 고고학은 그것이 표방하는 궁극이 인문학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나, 그에 이르는 과정은 철저히 자연과학에 기초하며, 또 그걸 토대로 해서 도출한 결론 또한 철저히 자연과학 영역이다. 이제는 자연과학이 수행하는 분석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보고서조차 쓰기 힘든 시대다. 내가 매양 비판하는 한국고고학이 전근대성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문학이라는 허울만 있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과학을 배제한 자리에는 .. 2024. 2. 5.
경기장에서 쓰레기 줍기 (2) 경기장에서 쓰레기 줍기는 일본 전통으로 한국은 이 전통을 베끼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일본에서 나왔나 보다. 어디가 원조냐 한국에서 이런 쓰레기 줍기가 자생적이냐 뭐냐 하는 이야기 이전에, 축구 보러 간 사람들이 경기 끝나면 자기가 버린 것이나 들고 나와 버리면 되지 쓰레기 봉투까지 들고 다니며 청소하고 다니는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경기 끝나서 피곤하기 짝이 없을 선수들이 라커룸 다 청소하고 나가는 것이 정상적인가 하는 생각부터 해봐야겠다. 이런 부분이 우리 사회에 의외로 많다. 선진국 기준을 일본에 두는 것인데 필자가 보기엔 소위 선진시민 의식 운운하지만 일본의 행동방식은 전 세계 좀 산다는 나라에서 본다면, 상당히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이러한 패턴은 한국이 굳이 벤치마킹할 필요가 없는 것이 수두룩하.. 2024. 2. 5.
거미줄처럼 친 위원, 또 하나의 꼴불견 비단 내가 몸담은 업계만 아니라 사회 전반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은퇴 이후 혹은 현직 중에도 직업적 학문종사자들이 보이는 또 다른 꼴불견이 위원이라는 위원은 걸리는 족족 다 걸치는 양태라, 다른 부문은 내가 어두울 수밖에 없으니 이쪽 문화재 업계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문화재 관리시스템은 크게 관리 주체로 보면 중앙정부와 지차체로 나뉘거니와, 이 지자체는 다시 광역과 기초로 나뉘어 진다. 중앙정부에서는 문화재청이 주도하는 이른바 문화재위원회와 무형문화재위원회를 필두로 각종 위원회 혹은 자문위가 상설 혹은 임시로 난립하거니와, 이 위원회 도입 취지야 여기서 새삼 재론할 필요는 없겠거니와, 이게 시간이 갈수록 감투용으로 전락하고, 그런 감투용이 아주 자주 쥐꼬리 만한 영향력을 부당행사는 고리가 되기도 하.. 2024. 2. 5.
탁본이 노출한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 利川長岩里磨崖菩薩半跏像이다. 경기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 (장암리)에 소재하며 종래에는 보물 제982호로 분류됐다. 2000년 주변 정비와 배수로 개설을 위한 공사 중 장대석이 노출되어 당시는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시절이 아닌가 하는데 그쪽에서 긴급조사를 진행했다. 저 탁본은 그때 친 것이다. 이 연구소는 두어 해 지난 뒤에는 한백문화재연구원이 출범하면서 주력 인력이 거의 다 그쪽으로 빠지게 된다. 방유리 한백문화재연구원 실장 제공이다. 현장 가서 보면 알겠지만, 육안으로는 알아보기도 힘들다. 귀중한 장면이라 전재한다. 2024. 2. 5.
중도유적 청동기시대 집터 탄화 넙적 판대기는 뭘까? 춘천 중도 유적 청동기시대 주거지 중엔 이처럼 목재가 탄화한 상태로 발견되기도 한다. 이건 이 발굴에 참여하는 다섯 기관 중 한백이 한창 발굴 중인 곳이다. 저 편편넙적 판재 기능이 몹시도 궁금해 물었더니 방유리 실장이 문짝인 거 같기도 한데 아직 잘 모르겠다 한다. 나 또한 내심 그게 아닌가 싶어 물었던 것인데 공동발굴단 예맥문화재연구원 정연우 원장은 벽체시설이 그대로 안쪽으로 무너져 내린 구조라 한다. 그에 의하면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근간이 귀틀집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천기 가까이 나온 청동기시대 주거지 입구 쪽이 어딘지 궁금해진다. (2014. 8. 8) *** 저 의문이 발굴보고서에서는 어떤 식으로 추정 혹은 결론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발굴보고서가 거질로 나오기는 했다. 레고랜드 건설 과정에서.. 2024. 2. 5.
[202401 독일풍경] (5)라이프치히 ① 느린 시간속으로 from 장남원 함부르크에서 라이프치히까지는 기차로 3시간 남짓. 지금도 작센주에서 가장 큰 도시고. 공업이 발달하여 부유했던 도시다. 그래서인지 교통의 교차점인 이곳 기차역은 상당히 크고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50년가까이 동독에 속해서인지 첫 인상은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오래된 바우하우스 스타일 전형적인 아파트와 좁고 낡은 트람들... 구 시가 지하철 역에서는 순간 모스크바가 떠올랐다. 마침 중심 아우구스투스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때 설치한 대 관람차가 있어, 오랫만에 타 보았다.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담하지만 짜임새 있는 멋진 도시다. 괴테가 “작은 파리”라고 불렀을 법 하다. 그리고 젊은이가 많아 보였다. 이 도시는 유수한 역사와 예술, 철학과 문학, 그리고 과학의 도시다. 15세기에 개교한 라이프치.. 2024. 2. 5.
강감찬과 최항, 경운기 vs. 페라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종합하면 강감찬은 성종 2년(983) 12월 연말에 실시된 특별전형에 합격해 등단한다. 절요 이 시점 기록을 보면 왕이 진사進士를 뽑으라는 명령이 있음에 따라 실시된 이 시험에는 왕이 직접 임헌臨軒하여 복시覆試를 실시하고는 강은천姜殷川을 비롯한 세 명과 명경明經 1명을 급제케 했다고 하면서 복시를 치르는 일이 이때 시작했다고 한다. 강은천이 바로 강감찬姜邯贊의 본래 이름이다. 이 일이 고려사 권73 지志 권 제27 선거選擧에는 좀 더 자세히 보이는데 정광正匡 최승로崔承老와 좌집정左執政 이몽유李夢游, 병관어사兵官御事 유언유劉彦儒, 좌승左丞 노혁盧奕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왕께서 복시覆試를 보시어 갑과甲科 강은천姜殷川, 을과乙科 2명, 명경업明經業 1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고 했으니.. 2024. 2. 5.
초고속 승진 가도 달린 최항, 이삼십대에 이미 지공거 최언위 손자인 최항崔沆이 역사 전면에 등장한 시점은 고려 성종成宗 10년(991)이라, 이해는 윤달이 끼어 그 윤2월에 실시된 과거시험에 그가 급제해 등단한 것이다. 고려사 그의 열전에는 이때 나이 20세로 갑과甲科에 급제했다 했으니, 972년, 광종 23년에 태어났다. 20세 등과는 상당히 빨랐으니, 서희 역시 이 나이인가 더 빨리 등단했으니, 할아버지 아버지 위광이 있었다 해도, 대단한 재능을 발휘한 천재임을 엿본다. 유의할 점은 그는 77세로 장수한 할아버지 최언위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보았듯이 최언위는 이미 944년 사망한 것이다. 이는 마흔두살 다 늙어서 고려로 귀환한 최언위가 귀국 뒤에 새 장가를 갔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어린 놈이 잘나서 이뻤는지 성종은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 2024. 2. 4.
왜 남이 버린 축구장 쓰레기까지 치우는가? https://sports.news.naver.com/news?oid=108&aid=0003212952 [카타르 현장] 김민재 미담 이어... "대단한 韓팬들" 경기장 청소 화제, 현지팬들 감탄[스타뉴스 | 도하(카타르)=이원희 기자] 클린스만호를 응원하는 한국 팬들. /사진=OSEN대표팀 수비수가 지난 8강 호주전을 마치고 한 축구팬에게 유니폼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OSEN'괴물 수비수' sports.news.naver.com 초등학생도 아니고 국제경기에서 남들 버린것 까지 다 치우고 나오는 것은 그만들 좀 했으면 한다. 자기가 만든 쓰레기만 치우고 나오면 되는 것이지 다른 잘 사는 나라들도 남들것 까지 쓰레기 봉투 들고 다니며 치우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런 것이다. 경기장에 치우는 사.. 2024. 2. 4.
기구한 인생을 산 최언위 네 아들, 국제 이산가족 작금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고려 조정 신료 중에 최항崔沆(?~1024)이라는 이가 있어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온다. 그가 바로 최언위 손자다. 그의 아버지가 최광원崔光遠인데 최언위 셋째 아들로 그의 아들 중에서는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아 생전에 관직이 비서소감秘書少監까지 이르렀다. 맏아들 최광윤崔光胤은 아버지처럼 일찍이 아버지와 비슷한 코스를 걸어 빈공진사賓貢進士로 후진後晉936년~946)에 가서 유학했지만 인생이 꼬이고 말았다. 후진을 침략한 거란에게 사로잡혀 거기서 벼슬살이를 한 것이다. 귀성龜城이란 데로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려는 것을 알고 글을 써서 번인蕃에게 부탁하여 알렸다 했으니 이 일로 고려가 군사 30만을 뽑아 광군光軍을 조직하게 된다. 둘째 최행귀崔行歸는 북쪽.. 2024. 2. 4.
"신라를 악의적으로 헐뜯고자 한 위작" 1989년의 화랑세기 가짜론 임창순 "화랑들의 활동이나 화랑도의 성격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군음 혼음 관계를 중점적으로 서술한 이 필사본의 내용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인용한 것과도 크게 다를 뿐더러 사람의 성격 묘사 등이 마치 문학작품에서처럼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후대의 사람이 신라사회를 헐뜯기 위해 쓴 악의에 찬 위작으로 보인다" "자체와 사용되고 있는 용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당시의 것들이라 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고 더구나 이것들이 일본의 사료들에 나타나고 있는 특징들과 많이 닮아 있어 위작이라도 우리나라 사람이 행한 것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필사본의 출처가 불명확한 점도 위작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 "이 사료가 진품일 경우 신라시대의 역사가 완전.. 2024. 2. 4.
다양한 입춘첩 입춘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만 쓰는 줄 아는데, 이 문구로 굳어진 건 오래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전에는 시를 지어서 붙이는데, 1구와 2구는 대문 밖 좌우에 3구와 4구는 대문 안쪽 좌우에 붙였다고 한다. 미암 유희춘은 그의 일기에 지은 문구와 붙인 위치를 정확히 써 두었다. 어떤 이는 주련을 입춘마다 바꾸기도 했더라. 전근대시대 문집에 남은 수많은 입춘첩이 그것들이다. 권근(權近, 1352~1409)이 세상을 떠나던 해인 1409년 1월 12일 입춘에 지은 입춘첩은 이 궁벽한 곳에 딱 맞기에 인용한다. 〈입춘 첩자(立春帖子)〉-기축년 1월 12일- 북두성 자루 처음으로 돌아와 北斗星初轉 동풍에 봄기운이 이미 새롭네 東風氣已新 하늘은 후하고 박함이 없어서 天心無厚薄 촌구석에도 푸른.. 2024. 2. 4.
성당시대 지배층 여성 설유순薛柔顺 석관 벽화묘 서안서 출현 서안西安 당唐 설유순薛柔顺 석관벽화묘石棺壁画墓는 서안시西安市 행복림대幸福林带 동쪽, 북령장락동로北邻长乐东路에 위치하며 2023년 섬서성고고연구원陕西省考古研究院이 신성구新城区 장락동로长乐东路区 개발구역을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 무덤은 무덤 안쪽으로 비스듬히 파고 들어가는 출입시설인 사파묘도斜坡墓道를 갖추고 묘실 지붕에 3개 뚫음이 있는 삼천정三天井에 묘실은 하나인 단실单室이며 재료로는 벽돌로 쌓은 전실묘砖室墓에 속한다. 이미 도굴 피해를 봐서 석문石门과 묘실墓室 천장은 파괴됐고 묘실 내 유물로 대부분 도굴당해 겨우 소량 도기陶器 조각들만 건졌을 뿐이다. 묘도 양쪽에는 두 개 벽감壁龛이 있으며, 그 내부에는 닭、개、낙타 등 동물용动物俑 70여 건을 그나마 건졌다. 묘실 서쪽에서 석관 1구가 발견.. 2024. 2. 4.
낙양 북망산에서 출현한 위진魏晋시대 고위 관료 가족 공동묘지 https://haokan.baidu.com/v?pd=wisenatural&vid=8905354517960629528 낙양洛阳 맹진구孟津区 송장촌送庄村 동남쪽 지구에서 3개 묘장墓葬을 남북 방향으로 안치하고서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차례로 만든 위진시대 가족 공동묘지가 발굴됐다고 낙양시고고연구원洛阳市考古研究院이 최근 발표했다. 이들 무덤은 모두 시신을 묻는 공간인 묘실墓室은 북쪽에 두고 그 반대편 남쪽에다가 묘실 안쪽으로 통하는 출입구인 묘도墓道를 설치했다. 이번 발굴 책임자인 연구원 부연구원副研究员 유빈刘斌에 의하면 낙양에서 발견된 위진시대 묘장은 매우 드문 상황에서 고위 관료를 역임한 가족 공동묘지가 처음으로 낙양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조사단은 이들 무덤에 대해 각각 M1、M2、M3라는 구별 명칭을 .. 2024. 2. 4.
나말여초 문단 거물 최언위와 그의 네 아들(1) 나말여초 문단을 호령한 인물로 최치원崔致遠(857~?), 그리고 견훤을 섬긴 최승우崔承祐(?~?)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같은 경주최씨로 그보다는 열한 살 어린 최언위崔彦撝(868~944)다. 치원과 언위 둘은 당나라 유학파로 그에서 급제한 인생 행로가 아주 비슷한데, 또 세트로 움직이기도 했으니, 다만, 최치원은 나말에 해인사로 은거한 뒤에는 행적이 묘연한 데 견주어, 최언위는 달라서 오래산 까닭도 있지마는 고려가 건국한 다음에는 아예 주거지를 경주에서 개경으로 옮기고, 고려 조정에서 문한을 담당한다. 고려사 열전이 정리한 그의 행적을 보면 초명初名이 신지愼之라 했으니, 이는 삼가고 삼갈지니라 하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라, 다만 그 바꾼 이름 언위彦撝는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내가 아직 추적하.. 2024. 2. 4.
Best of best, 수선전도首善全圖의 수선首善 조선시대 도성都城이라 하면 글자 그대로 성곽으로 두른 도읍을 의미했으니, 구체로는 현재 우리가 한양도성이라 일컫는 나성羅城이 둘러친 공간 구역 안쪽을 말한다. 이곳이 서울이라 지금의 서울 종로구와 중구 일대가 본래는 엄격한 의미의 도성이며, 이곳이 바로 서울이다. 이 도성은 조선 왕조 건국 직후에 이미 둘러치기 시작해 후대에 끊임없는 보수가 있었지만, 그 공간 구역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 오백년 내내 저 구역은 그대로였다. 물론 도시 구역이 성밖으로 계속 확장해가기는 했지만, 한양도성은 죽죽 그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제작한 도성지도란 곧 저 한양도성 안쪽 지도를 말한다. 실제 그런가는 차치하고 생긴 모양은 천상 자궁 딱 그것이다. 조선시대, 특히 그 후기 도성을 .. 202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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