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19906 무관에서 경찰까지, 제주에 부임한 지방관들의 특징 1. 제주 현지인들을 제주 지방관으로 본격 기용(?)하는 것은 빨라도 헌종, 철종 때쯤부터다. 그 전엔 거진 다 육지에서 왔다(영조, 정조떄 조금씩 나타나기는 하지만서도). 제주인이라 하더라도 상피제는 얼추 지켰던 것 같다(가령 제주목 사람을 대정현감 시킨다던가...). 2. 관서, 관북 사람이 제법 지방관으로 많이 온다. 그 시절의 서북청년(?)인가...차별받던 지역 사람들인지라 격오지로 돌린 것일까? 반대로 제주 사람들이 관서나 관북 지방관으로 간 사례도 있을 법한데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다. 3. 대개는 무과 급제한 무관들이 목사 또는 판관, 현감으로 오곤 한다. 4.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No.1을 '도사島司'라고 불렀다. 근데 이 사람들은 모두 경찰 출신이다. 그것도 그냥 경찰이 아니고 경부, 경.. 2023. 5. 7. 진상하는 말이 죽어 파직된 경주 최부자 집안 제주 정의현감 1. 지금의 성읍민속마을이 있는 곳은 조선시대 정의현이라고, 제주 남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고을의 읍치邑治가 있었다. 조선 태종 때 고을을 만들고 조정에서 현감縣監을 파견해 다스렸다. 2. 정의현감을 지낸 사람들 중에 뒷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과 등을 뒤적거려보는데, 흥미로운 분을 만났다. 현종 때 정의현감을 지냈던 최국성(崔國成, 1626~?)이라는 분이다. 3. 이 분은 경주慶州가 본관이고 경주에 살았다. 경주의 경주최씨라...뭔가 생각이 날듯말듯해서 찾아보니 정말로 그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과 관계가 있는 분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1대 최진립(崔震立, 1568~1637)의 동생 최계종(崔繼宗, 1570~1647)의 손자이고, 2대 최동량(崔東亮, 1598~1664)의 당질(최.. 2023. 5. 7. 1953년 6월 한국전쟁 와중에 교사도 없이 애들을 모아 놓고 수업하는 이 사진 한 장이 결국 일제시대 한국이 어떤 길을 실제로 갔었어야 했는가를 웅변해 주는 것이다. 1953년에는 먹을 것이 많아서 학생들을 가르쳤겠는가? 저때 국민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이 결국 7년 후 4.19의 주역이 되었고, 70, 80년대 고도성장시대의 고학력자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일제시대에 한국을 근대화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대학을 만들어 놔도 시원찮은 시대에 소학교 설립. 일제시대는 한국사에서 시간낭비였던 기간이다. 2023. 5. 6. 식민지시대, 조선에 필요했던 것 이제 결론 삼아 글을 쓴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1910-1945년의 기간, 그리고 개항이후 식민지가 되어버렸던 1876-1910년까지의 기간을 다 합치면 무려 70년 가까이 된다. 이 기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한 후 1924년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조선이 개항해서부터 해방될 때까지 70년간 조선땅에서 했어야 할 일은 1945년 당시 소학교가 전국에 몇개 설치.. 그런 수준의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초등, 중등, 고등, 대학 교육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설치되고 (비록 날림이겠지만) 놀고대학생이라도 대졸자를 양산해 냈어야 하는 기간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1945년 당시 소학교 설치가 몇 개였네 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식민지근대화론을 퉁치자 하는건 아무리 모르는.. 2023. 5. 6. 일본이 조선에 소학교를 증설해야 했던 이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측에서 항상 들고 나오는 것이 조선에 소학교가 일제시대에 증설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면 중학교는? 고등학교는? 대학교는? 이란 질문에 답을 낼 수가 없다. 일본은 조선땅에 중학교 대신 고등보통학교를, 고등학교는 0개, 대학교는 경성제대 빼고는 전부 전문학교에 묶어 놨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 대로면 조선인은 고등교육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상위학교에 진학이 어려워진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진학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은 원칙적으로 고등학교, 전문학교, 대학예과 졸업생 모두 진학이 가능했지만, 대학에 들어갈 때 우선순위는 고등학교와 대학예과에 우선권이 있고, 전문학교는 후순위였다. 한국에서.. 2023. 5. 6. Rotary Grinding Mill 연자방아 National Museum of Korea. Seoul 국립민속박물관 Rotary grinding mills were driven by an ox or horse and used to millgrain. Rotary mils, where the upper mill stone ran horizontaly on the base stone through the power of work animals, were much more efficient than hand mils with mortars and pestles, which utilized pressing and rotating motions. During the grinding, one person held reins ofthe ox or horse p.. 2023. 5. 6. Phallic symbols in Korea 성기 신앙물 Phallic-shaped Objects of Worship 연대 미상 Undated 복제 Replica 국립민속박물관 Ntional Folk Museum of Korea Phallicism is a type of religious sorcery that can be found widely throughout the world. It regards male and female reproductive organs as the origin of life and worship objects made in their image. Phallicism in Korea venerated rocks and geographical features shaped like male or female sexual .. 2023. 5. 6. 벌통 깨부셨다는 반달반달곰 또 역마살 도진 반달곰 '오삼이'…충북 영동에 다시 출현 송고시간 2023-05-05 10:03 4일 오전 민주지산 나타나…"마주치면 뒷걸음질로 자리 떠야" 또 역마살 도진 반달곰 '오삼이'…충북 영동에 다시 출현 | 연합뉴스(영동=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지리산서 태어난 뒤 서식지에 머물지 않고 한반도 중남부를 광활하게 떠돌고 있는 반달가슴곰 '오삼이'(코드번호 ...www.yna.co.kr 매양 하는 말이지만 사라진 것은 사라진 이유가 있으니, 그 이유가 인위일 때 복원의 본능이 특히 강해서 인간의 무지 혹은 욕심이 아니었던들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내 탓 공방을 하며 우리를 자책한다. 하지만 없어진 그 과정이 자연도태일 수도 있고, 섭리일 수는 없는가? 이건 그런 자택에 따라 복원한 그 새로운.. 2023. 5. 6. 아키야마 요시후루 秋山好古 (1859~1930): (2) 전술한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프로필에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아키야마는 육사 졸업때 까지 정규교육은 거의 날림으로 다녔다. 국가가 육사 졸업때까지 이런 날림교육에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당시엔 다 이랬다. (2) 아키야마는 자기 돈 땡전 한푼 안내고 유학까지 마쳤다. 그는 국가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국가의 도움에 러일전쟁의 기병전 승리로 갚았다. (3) 아키야마는 메이지 유신 당시, 신정부군에 맞서 막부편에 섰던 번의 최하급 무사였다. 그런데도 메이지 유신 기간 내내 승승장구하여 육군의 최고직위인 대장까지 올랐다. 군부는 사쓰마 죠슈 출신이 독점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인이라면" 능력만 있다면 승진에 있어 유리천장은 거의.. 2023. 5. 6. 아키야마 요시후루 秋山好古 (1859~1930): (1) 흔히 일제시대를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 시대에 한국에 소학교가 몇 개가 지어졌다던가, 연평균 성장률이 몇 프로였다던가, 이 이야기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식민지시대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한국이 독자적 근대화를 하고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드리겠다. 아래는 일본 메이지시대 군인 아키야마 요시후루 秋山好古이다. 시바료타로의 "언덕위의 구름"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연보를 아래에 써 본다. 安政6年(1859年)1月7日(1859年2月9日): 시코쿠 마쓰야마번의 무사계급 3남으로 출생. 이 집안은 아시가루보다 겨우 한단계 높은 최하급 무사집안이었지만 사무라이는 사무라이였다. 藩校인 明教館에 입학하여 배웠고, 목욕탕인부로 일했다. 明治8年.. 2023. 5. 6. 낙양 한위고성漢魏故城을 마주하는 문장론 강화講話 일례 洛阳市文物管理局、汉魏古城保管所热忱欢迎您的到来 중국어는 몰라도, 한자만 대강 읽을 줄 알면 무슨 뜻인지 짐작한다. "낙양시문물관리국 한위고성보관소에서는 당신의 왕림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물론 이에서 열렬히는 '졸라리'의 다른 이름이다. 한데 이 문장은 한국어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사족이 있다. 내가 환영하는 객체는 당신이지 당신의 도착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 문장 중 '的着來'는 필요없다. 함에도 이것이 왜 붙었는가? 첫째, 수식의 욕망이다. 너 당신 이라고만 하면 왠지 허전한 까닭에 저리 사족을 단 것이다. 둘째, 이것이 중요한데 저 문장 대표적인 가분수다. 문장 구조를 보면 '낙양문물관리국 한위고성보관소'가 주어요 그에 대한 빈어가 '졸랄 환영 블라블라'다. '的着來'를 빼어 버리면 문장 균형이 안맞는다.. 2023. 5. 6. 글은 미다시와 첫 줄이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1938년 4월 4일 새벽, 피레네 산맥의 눈이 녹아 수량이 불어난 스페인의 에브로 강둑 위로 물에 흠뻑 젖은 두 남자가 차가운 물속에서 나와 기어 올라온다. 둘 다 미국인이다." 이제 펼치기 시작한 애덤 호크실드 지음, 이순호 옮김 《스페인 내전》(갈라파고스, 2018) 본문 첫 줄이다. 우리네 직업적 학문종사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글 못 쓴다. 강렬하지 아니한가? 이 한 줄은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논문이 글을 죽이고 말았다. (2018. 5. 6) **** 나처럼 한때 혹은 제법 길게 영문학과 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스페인 내전은 《두 팔이여 안녕》으로 수렴하니, 기타 그에 더해 나는 20세기 신종 독재의 한 형태로서 파시즘을 떠올리곤 한다. 이 사건이 참전용사이기도 한 어네스트 헤.. 2023. 5. 6. 식민지 청년의 비애 흔히 식민지 청년의 비애라는 말을 쓴다. 일제시대를 수식할 때 흔히 들어가는 말이다. 식민지 청년의 비애라. 말은 그럴 듯한데 구체적으로 뭐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 실생활에서 와닿지 않는 이야기란 아무 소용도 없다. 식민지 청년의 비애라는것이 뭔가 하면, 결국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왜 이 이상 출세를 못하냐. 이게 식민지 청년의 비애다. 일제시대 조선인은 똑똑 한 사람일수록 민족 차별을 많이 느낄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병도를 봐라. 그는 한 나라의 역사학계를 이끌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해방 이전 그의 신분은 학사출신 시간강사였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망국을 가장 슬퍼했을 사람들은 누구일까? 농민?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농지개혁이 있기 점에는 농민의 생활수준, 경제수준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선.. 2023. 5. 5. 신라는 왜 1만 군사를 내주었는가를 다시 묻는다 앞서 나는 순망치한이라는 논리로 475년 신라가 쓰러져가는 백제를 구원하고자 1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백제로 파견했다고 했다. 그걸로 모든 의문이 명쾌히 해명되는가? 앞서 말했듯이 저 파견이 신라로서는 실상 고구려와의 전면전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7일 낮 7일 밤만에 백제 왕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참수한 다음 그대로 한성에 주둔한 상태였다면 한성에서는 2차 대전이 벌어질 것임은 한밤중 불을 보듯 뻔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신라 조정과 자비마립간은 왜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불사했는가? 첫째 신라 내부의 자신감이었다. 우린 어느 누구와 붙어도 그네들을 깨뜨린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이참에 고구려를 확실히 꺾어놔야 한다는 매파가 득세했다. 나는 그 진원지로 벌지와 덕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 2023. 5. 5. 여름으로 가는 길목을 만개하는 작약 한 포기 꼴랑 어쩌다 도심 화단도 아닌 데 터잡은 작약이 간밤에서 이어지는 비바람에 꽃망울 터뜨렸다. 작약이야 화왕花王이 가고 나야 비로소 피는 아왕亞王이어니와 추적한 비내음에 그 향내는 찾을 길 없지만 저 균열이 몹시도 반가움이 혹독한 가뭄 끝에 만난 빗물과 곁들여 심포니 꼭지를 찍는다. 내일이면 어드메쯤 군락 이룬 아왕 밭 찾아보려 하노라. 2023. 5. 5. 고종은 잘못이 없다 왜냐 원래 저 시대의 귀족, 고급관리, 사대부란 다 바보기 때문이다. 고종은 그냥 자기 하던 수준대로 한 것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런 바보가 지 맘대로 하게 내버려운 쪽에 책임이 있을 뿐. 일본의 경우 막말을 묘사한 글을 보면, 천황까지야 대 놓고 바보라고 하지 못하겠지만 기타 등등 공경과 고급무사 (우리로 치면 사대부 반가 쯤 되겠다) 는 죄다 바보로 묘사한 경우가 많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막말 유신기의 주체는 누구인가. 일본의 경우, 막말유신기-메이지시대의 주체는 바로 하급무사들이다. 상급무사들에 의해 저 놈들 사무라이는 맞냐고 천대받지만 농민들에게는 그래도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라는 평을 듣고, 자신들도 사무라이라는 강렬한 의식을 가지고 있고, 공경대부는 죄다 바보라고 우습게 볼 수 있었던.. 2023. 5. 5. 김옥균 목을 딴 희대의 풍운아 홍종우 홍종우(洪鍾宇, 1850~1913)라는 인물이 있다. 근대 한국의 풍운아風雲兒가 한둘이 아니지마는 이 사람도 '풍운아'라는 이름에 크게 부끄럽지 않은 행적을 남겼다.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시골을 전전하다 프랑스 1호 유학생이 되고, 돌아오는 길에 또 다른 희대의 '풍운아'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목숨을 거뒀으며, 황제의 신임을 받고 한 나라의 국정개혁을 주도하는 자리에까지 오른 사나이. 하지만 그의 전성시대는 너무도 짧았다. 1903년, 그는 이 땅의 남쪽 끝 제주목사로 내려온다. 프랑스 선교사가 엮은 '이재수의 난' 사후처리를 위해 조정에서 프랑스통인 그를 보낸 것이다. 홍종우는 제주에서 약 3년 지냈는데, 국어학자 김윤경(金允經, 1894~1969)은 그 시절의 홍종우를 '제주도의 나폴.. 2023. 5. 5. 김유신이 계백한테 초장에 네 번 당한 이유는 5만이라는 덩치 때문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들이칠 때 동원한 군사는 물경 5만이었으니 이런 대규모 군사 동원은 기원전 57년 혁거세에 의한 신라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그 구성 내력을 보면 어중이떠중이 집합소였다. 그 총사령관 김유신은 백전노장, 신출귀몰했지만 이 어중이떠중이는 골차 아프기 짝이 없었으니 덩치만 큰 코끼리 하마 기린이었지 날렵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어 쪽수는 오천밖에 되지 않으나 해병대 udt 같은 훈련을 받고 상명하복이 철저한 계백이의 치고빠지기에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다. 황산에서 만나 네 번 접전했다가 네 번 내리 패한 김유신은 패인 분석에 골몰했으니 그 문제가 바로 쪽수 덩치에 있음을 절감하고는 계백이의 강점을 그대로 파고들었으니 오천으로 오만을 맞선 그 전술을 뒤집어 희대의 전술을 개발하는데 이는 그 자신이 .. 2023. 5. 5. 수나라 군은 왜 무너졌는가 아래 김단장께서 쓰신 글을 보고 생각나는 바 있어 글을 더한다. 고구려, 신라군이 삼국전쟁기에도 1-3만 정도 동원하는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며 이것이 최대치였다는 이야기-. 이 부분에 대해 조금 써 보고자 한다. 수나라군이 고구려를 쳐들어갔을 때 호왈 113만인가를 이야기 했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당시 수나라 군이 패망한 것은 100만 대군이 아닐지라도 저 군대 규모 때문에 패망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군대가 움직이면 그 군대 하나 보내고 끝이 아니다. 먹여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먹이기 위해 움직이는 군대는 그 자체 또 그냥 먹지도 않고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다. 식량을 수송하는 군대 자체도 또 먹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통시대의 국가-사회수준에 따라 움직일 수 .. 2023. 5. 5. 신라의 결단, 백제 구원병 1만의 무게감 475년 백제가 실상 고구려에 멸망하고 개로왕까지 사로잡혀 참수된 참혹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간과한 중차대한 사실이 있으니 이 난국에서 신라가 취한 자세다. 왕도가 포위된 위급한 상황을 알리면서 구원병을 청한 백제 문주한테 신라와 자비마립간은 물경 1만에 이르는 대군을 파견했다. 이 1만이 주는 무게감을 아무도 심각히 보지 않았다.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에 이르기까지 삼국이 총력전 체제에서 동원가능한 군발이 숫자는 3만~5만 명이었다. 일통삼한 전쟁 와중에 신라가 전국에서 징발한 군발이는 5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것도 보급부대까지 합친 규모다. 장수왕이 개로왕 목을 딸 때 동원한 군대도 3만이었다. 저 무렵 삼국 공히 국가 명운을 건 전쟁에 동원 가능한 숫자는 삼만이 최고였다. 광개토 담덕가 5만을 동원.. 2023. 5. 5. 광해 이 쓉쌔, 극락왕생으로 포장한 저주 금광명최승왕경金剛明最勝王經 Transcription of Sovereign Kings of the Golden Light Sutra 1622 동국대학교 박물관 인목대비가 페위된 후 서궁西宮에 감혀있을 때 발원한 것으로 아버지 김제남金悌南, 어머니 노씨,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과 딸 정명공주의 장수와 자손 번성을 기원하였다. 사경을 발원한 다음해 인조반정으로 왕대비로 복위되었으며, 몇 해 후 수종사 석탑에 불상을 조성하여 안치하였다. 이상은 서울역사박물관이 한양여성 문밖을 나서다 특별전에 저 유물을 대여 전시하면서 내건 안내판이라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1584~1632)는 조선 선조宣祖의 두번째 정식부인으로 슬하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두었으니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그의 비극은 광해가 후궁 소생으로 .. 2023. 5. 5. 이전 1 ··· 420 421 422 423 424 425 426 ··· 94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