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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379

고려의 사민徙民과 발해민의 투항 1. 고려전기는 조선전기 만큼이나 활발히 북진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고려 태조의 건국 이후 약 100년간 압록강 하구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흥미로운것은 고려 전기에는 사민 기사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누락되었을 수도 있지만, 완전히 없지는 않으니 대표적인 것이 아래 몇 가지다. 서경에 사민하라는 전교 (918년):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서경에 고관대작 집안을 이주시키라는 전교 (922년): 是歲, 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남쪽 백성을 북쪽으로 옮기라는 전교.. 2022. 12. 24.
사민徙民... 농업국가의 영토개척법 우리 역사는 만주를 상실했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렇지 사실 지속적인 영토확장의 역사이기도 했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영토는 계속 북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농업국가이다. 이 때문에 영토가 확장된다는 것은 곧 徙民의 역사이기도 했다. 문제는 徙民을 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땅으로 이식된 사람들이 제대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이들을 지켜낼수 있는 군병력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고려 조선시대 영토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농민과 군병력을 동시에 전진시키는 병진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할수 있다. 조선시대 사민정책을 보면, 눈물겨운 부분이 있다. 새로 영토로 추가된 압록강 두만강 일대의 땅을 지키기 위해 삼남 지방에서 농민들이 대거 이주하였다. 세종대에는 한.. 2022. 12. 23.
조선전기에는 마운령비의 존재를 몰랐을까? 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이렇게 되어 있으니, 고려사 기록을 보면, 이때도 비 자체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 세종은 왜 윤관비를 두만강 너머에서 찾고 있었을까? 이 비를 고구려 비로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신라비라고는 감히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2022. 12. 23.
고려사에 나오는 진흥왕 순수비 앞서 윤관 북벌이 미친 지역이 진흥왕 때 순수비가 서 있는 지역 안쪽과 거의 비슷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에 보면 이를 시사할 만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 윤관이 정벌하여 획득한 땅에 대한 설명이 그 열전에 이렇게 나온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 만하였다. 본디 고구려 소유로 옛 비석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2022. 12. 23.
한국사가 특필해야 할 정안국定安國 정안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 그 유민이 세운 나라로 발해 멸망 후 부흥운동을 설명할 때 나온다. 이 나라에 대해서는 주목해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간단히 써 본다. 1. 우선 정안국이라는 나라는 존속 기간이 아주 길다. 사서에 나오는 부분 그 전기간을 존속했다고 본다면 938년에서 985(혹은 986년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존속했다. 후백제 존속기간이 36년 정도다. 2. 정안국은 발해 땅 중에서도 대체로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에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그 주민은 말갈계가 아니라 예맥계였던 모양으로 중국 사서에는, 定安國本馬韓之種 이라 해놨다. 발해에 대해 중국이 끈덕지게 속말말갈 딱지를 붙이려 했던 것과 비교해서 이례적이라 할.. 2022. 12. 22.
진흥왕대 국경선 아래 김 단장 쓰신 글을 쓰고 덧붙이면, 신라가 진흥왕 때 동해안을 따라 멀리 북상했는데, 저때 신라는 가다가 멈춘 것이 아니라 종족적인 면에서건 지리적인 면에서건 거의 갈 때까지 간 상태였다고 봐도 옳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신라의 저 동북쪽 경계선은 돌파가 지난하여 그 후 900년이 지난 세종대에야 겨우 돌파하여 두만강 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윤관의 북벌은 여러가지 이설이 있지만 그 북쪽 경계가 진흥왕의 북벌선 이북으로 못 올라갔으리라 본다. 윤관의 북벌 북상 최대를 두만강 넘어 선춘령으로 본 것은 희대의 천재 세종이 육진을 우리 땅으로 굳히기 위한 명분쌓기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실제로 윤관 북벌의 북상치는 지금 황초령, 마운령비정도였을 것이라 본다. 윤관도 이때 지리적 경계, 종족적 경..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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