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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949

경주 사천왕사와 명랑법사의 문두루법, 밀교를 의심한다 아래는 내가 연합뉴스에 몸담은 무렵 같은 제목으로 2006년 11월 2일 기사화해서 송고한 글이라, 이는 실상 기사보다는 논문이었다. 이 글이 간간이 인용되곤 해서 전재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문두루법은 흔히 불교 계통 푸탁거리 계열 밀교 전통으로 보지만, 철저히 도교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도교를 모르면 안 된다. 내가 보는 밀교는 그 대부분이 인도 전통이랑은 눈꼽만큼도 관계없고 도교다. 이는 문두루법을 분석하면 그 처절한 실상이 고스란하다. 더 간단히 말한다. 사천왕사는 불교가람이면서 도교사원인 도관道館이었고 명랑법사는 불교승려이면서 도교승려이기도 했다. 내가 틀린 말 하는 거 봤어? 경주 사천왕사와 명랑법사의 문두루법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 왕실(혹은 조정)에서 직접 관리한 성전사원.. 2024. 2. 28.
지리산 쇠말뚝의 난동[2005] 정다산 묘에서 철심이 발견된 데 대한 우리 언론의 보도행태와 그것을 가능케 한 밑도 끝도 없는 일제에의 저주를 ‘저주’한 블로그 글을 내가 올린 것이 불과 두 달 전인 2005년 4월30일이었다. 철심만 발견되기만 하면, 쇠말뚝만 발견되기만 하면 우리는 자동 빵으로 그것이 일제의 소행이라 하며, 그런 짓거리가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철심은, 그러니 쇠말뚝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순수 민족혼의 저 고향을 상정케 하는 절대 도덕률이며, 우리가 그것을 뽑아냄으로써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린다는 정언적 정당성을 담보하는 제1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 일이 며칠 전 지리산에서도 발생했다. 2005년 6월 26일자 우리 연합뉴스 경남 산청발로 보도된 기사는 이렇다. 한배달 민족정기선양.. 2024. 2. 27.
기분 잡친 정약용 묘 쇠말뚝[2005] 내가 쇠말뚝이 일제와 하등 관계가 없음을 설파한 글을 올린 것이 (2005) 4월 28일. 그러다가 경기 남양주발로 정약용 묘에서 쇠말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 어제, 그러니까 4월 30일. 그 소식 마지막 구절에 보니 남양주 市 관계자 말을 인용한 “일제의 정기 말살 의도” 운운한 언급이 보이기에 회사 내부 게시판에 “쇠말뚝과 일제는 하등 무관계하다”는 글을 올린 바 있다. 이 글은 이내 130여 조회수를 기록한 시점에서 내려버렸으니, 그 까닭은 혹여 이 글로 인해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동료기자를 비판한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지 않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데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보아하건대 내가 예고했던 대로 이 쇠말뚝은 무속인 소행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내가 언제인가 이 쇠말뚝.. 2024. 2. 27.
임진년에 쇠말뚝을 꽂은 명나라 술사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八道總論) 중 경상도 중 선산(善山) 조 기술이다. (상주) 남쪽에 있는 선산은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 전해 오는 말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에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 [南則善山, 山川比尙, 尤淸名穎秀, 故諺曰, 朝鮮人才半, 在嶺南, 嶺南人才半, 在一善, 故舊多文學之士] 임진년에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명나라 술사術士가 외국에 인재가 많음을 꺼리어 군사를 시켜 고을 뒤 산맥을 끊고 숯불을 피워 뜸질을 하게 했다. 또 큰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는데, 그 뒤로는 인재가 나지 않는다. [壬辰, 天兵之過此也. 術士忌外國多人才, 使兵卒斷邑後脈, 熾炭灸之, 又揷大鐵釘壓住, 而自是人才衰.. 2024. 2. 27.
은사기념과학관을 위탁운영한 조선교육회란? 3) 조선교육회 조선교육회는 이전에 경성교육회라 칭하였고, 1902년(명치 35) 5월 창립되어 회원은 겨우 20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10년(명치43) 12월 조직을 변경해서 조선교육회로 개칭하였으며, 조선 각 도에 걸쳐 1,400여 명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어서 1915년(大正 4) 9월에 다시 조직을 변경하여 회명을 조선교육연구회로 고쳤으며, 회원은 3,105명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에 그해 10월 30일 기관지 '조선교육연구회잡지' 제1호를 간행(중간에 잡지명을 조선교육으로 개칭)하여, 명실공히 조선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서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22년(치 11) 2월, 새로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자 이 회는 각 도 교육회를 지회로 하고, 각 도 교육회는 각 부府·군郡·.. 2024. 2. 27.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 대정 천황 내탕금으로 비롯한 한국과학의 효시 2) 은사기념과학관 1925년(大正 14) 5월 10일 다이쇼大正 천황 성혼成婚 25주년 기념 축전을 거행하는 때를 맞아 사회교육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내탕금 17만 원이 하사되었다. 이를 주요 재원으로 설비비에 충당하고 경상비는 국고 보조(첫해 보조 예산 5만 원)를 받아, 왜성대倭城臺 구舊 총독부 청사를 이용해 1926년(大正 15) 1월 은사기념과학관을 창립하고 1927년(昭和 2) 5월 10일부터 개관했다. [515] 은사기념과학관은 재단법인 조선교육회 교화부의 사업으로 이를 경영하게 하여 널리 내외의 교화 자료를 수집하고 현대 문화의 축도縮圖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실지로 문명의 혜택을 평이하고 간명하게 전달시키며, 민중의 과학적 상식을 계몽·배양하고, 이용후생이 과학에 근거해 왔음을 이해시키며..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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