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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2291

노자老子와 장 자크 루소 : 텍스트의 열림성 이른바 고전이라는 존재는 텍스트의 열림성을 생명으로 삼는다.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음으로써 생명력을 확장한다. 이른바 창조적 오독이라는 말도 있지만, 텍스트가 그것을 소화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인식에 따라 왕청나게 달라지거니와 그 극단을 오간 것으로 노자와 루소를 나는 자주 든다. 노자. 이거 참말로 묘해서 딩가딩가 놀자판의 텍스트로 해석한 이가 압도적으로 많거니와, 실은 노자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해석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아 위진남북조시대 현학玄學이라는 기풍이 일면서 장자와 한묶음이 되어 부어라 마셔라 하는 권리장전이 된다. 그러면 그 이전 노자는 어떠했는가? 압도적인 독법은 제왕학의 텍스트였다. 왕이 통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전범을 제시한 것이 노자였으며, 노자의 그러한 노골적인 정치성-이는 실.. 2024. 1. 28.
[대물大物 이야기] 거근巨根의 창시자 노애嫪毐 (5) 빡친 젊은 시황제 진 시황제 7년, 기원전 240년, 시황제 아버지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의 생모인 하태후夏太后가 죽었다. 장양왕 아버지인 효문왕孝文王의 왕비 화양태후華陽太后는 남편 효문왕과 함께 수릉壽陵이라 일컬은 무덤에 같이 묻혔다. 시황제를 기준으로 할머니인 하태후랑, 증조모인 화양태후까지 모두 죽은 까닭에 당시 진秦나라 왕실에서 왕실 여성 어른은 시황제 엄마인 조희趙姬, 곧 조태후趙太后밖에 남지 않았다. 조나라 출신으로 그쪽에서는 여불위 첩이었다가 훗날 여불위가 장양왕 자초한테 바친 여성 말이다. 앞서 봤듯이 조태후는 남편이 죽자 홀로 밤을 참지 못하고 걸핏하면 여불위를 잠자리로 불러들였고,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난다 생각하는 여불위는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매달아도 끄떡없다는 대물 거시기의 소유자 노애嫪毐를 고자 내시인.. 2024. 1. 27.
철저히 이익에 기반하는 군신君臣관계 군신 관계가 실은 철저한 이해득실에 기반한 관계임은 전근대 왕조시대 그것만큼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일이 드물다. 이런 계약이 장 자크 루소 이후라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이다. 내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 신하는 주저없이 군주를 떠나고 때론 칼을 겨누었다. 조선시대 산림山林은 실은 반란자의 소굴이다. 충忠은 언제나 효孝에 완패했다. 충효忠孝는 일란성 쌍생아가 아니라 늘 전자는 후자에 붙어 기생하는 파리목숨이었다. 권력이 언제나 충을 효에 등치코자 그리도 몸부림친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남녀 관계, 부부 관계도, 심지어 부모자식 관계도 이에서 하등 어김이 없다. (2016. 1. 2) #충효忠孝 #공사公私 #효제孝悌 #이익 #이익사회 *** 한비자가 갈파하기를 "권력이란 군주에게 연못과 같으며 신하란 그 .. 2024. 1. 27.
기분 더러운 고려사 현종본기 고려사 현종본기를 죽 읽어내려가면 기분 더럽다. 어느 정도로 더러운가? 더럽게 더럽다. 옛날에도 그렇고 요새 고려거란전쟁 방영에 즈음해 다시 읽는데 역시 똑같이 더럽다. 왜 그런지를 이야기하려 하는데, 하도 기분이 더러워서 감정 주체가 쉽이 아니해서 제대로 정리가 될지는 모르겠다. 왜 더러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심연을 후벼파고는 남들 앞에서 폭로하는 까닭이다. 쪽팔림과 부끄러움 그 극치인 까닭이다. 그 쪽팔림이 어느 누구도 아닌 나인 까닭이다. 2024. 1. 27.
인간 심연을 후벼파는 죽음의 공포, 이현운의 경우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은 강조를 고려사 편찬자들은 당연히 반역叛逆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그의 충절은 높이 살 만했으니, 통주성通州城 남쪽 전투 현장에서 거란군에 사로잡힌 그는 투항하라는 거란군주 야율융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앉힌 강조는 그것을 구실로 토벌을 앞세운 거란 40만 대군을 맞아, 30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당시 고려 조정 최고 실권자로서 직접 전장에 뛰어든다. 보통 최고 권력자는 최전선에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데 견주어 그 자신이 직접 나섰다는 점이 이채롭다. 다만 이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어처구니 없는 판단 미스로 그 자신이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다는 점에서 그는 지장智將이라 볼 수는 없으며, 우직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 2024. 1. 26.
고려거란전쟁과 초조대장경 대장경 목판은 어마어마한 문화재다. 필자 생각으로는 이건 한국 같은 크기의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볼륨의 문화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금속활자만 해도 적은 카피수를 다양하게 찍고 싶다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가. 한국적인 인쇄 전통이라 할 것이다. 금속활자는. 반면에 고려시대 대장경 사업은 그 무지막지한 분량. 게다가. 초조대장경은 조판이 1011-1877까지 만들었다는 설이 옳다면 993-1018년의 고려거란전쟁의 후반기와도 겹치는 것이니, 전쟁하랴 대장경 만들랴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대장경을 두 번을 만들고 그 사이에 의천의 교장까지 있었으니 이 당시의 고려는 싸우고 남는 시간에 목판을 죽도록 팠던 셈이겠다. 참고로 지금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1236-1251년에 조판한 것으로 1231-125..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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