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족보 이야기233 왜 양반 수는 불어만 가는가 조선후기 양반 수가 불어가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우리는 기존의 양반들 후손들이 예를 들어 벼슬길이 오래 끊기거나 아니면 서자 집안이라 제대로 된 양반에 결격사유가 생기면 순순히 우리는 양반 아니오 하고 내려갔을 것 같지만천만의 말씀이다.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한번 양반 후손들은 순순히 양반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 특히 호적에 유학, 그게 아니면 양반의 끝자리인 업유, 업무라고 적는데 민감하여결사적으로 이에 달라 붙어 쉽게 내놓지 않는다. 어쩌다 호적을 좀 빡빡하게들 조사했는지원래 유학이었다가 업유나 업무, 재수 없으면 선무군관으로 밀렸다고 치자. 다음번 호적 때는 반드시 유학으로 원상 복귀를 시도한다. 당대에 안되면 아들이라도 아버지 직역을 학생으로 반드시 고쳐 놓는다. 그도 그럴것이 호적에 유학으로 .. 2025. 9. 1. 뒤 늦게 불 붙은 장작 우리나라 호적은 시계열 자료로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전국에 몇 군데 안된다. 이 몇 군데 안되는 자료로 조선후기의 계급의 변동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이 나온다. 하지만 이 지역들이 조선 전체를 반영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의 농업발전에 있어서 현재 호적이 남아 있는 곳이 낙후되었던 지역이 아니라 이앙법이 도입되는 단계부터 수리시설의 증대까지 당시 전국을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지역이 낙후되었기 때문에 노비가 그렇게 많았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앙법 도입만 해도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빨랐다. 이 17세기 부터 19세기까지 시계열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뒤늦게 불붙은 장작이다. 일본과 비교한다면 옆나라는 17.. 2025. 9. 1. 1690년. 양반인구 7.4 퍼센트 우리나라 조선시대1690년에 양반 인구는 전체 인구의 7.4 퍼센트 였다. 이 당시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후손을 남겼다면지금 우리들 중 1690년에 양반 조상을 둔 사람은 10명에 1명도 안되는 셈이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1790년 경에도 전체 인구 중 양반 인구는 30프로가 안 되었다. 우리 중 1790년에 양반 조상을 둔 사람은 10명 중 3명도 안 되는 셈이다. 노비인구를 보자면, 1678년에는 62%, 18세기 전반에는 40∼50% 사이, 18세기 중엽에는 30∼40% 사이로 18세기 중엽까지도 전체 인구의 1/3이 아직 노비였다. 이 문제를 우리 학자나 역사의 독자들이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지만 한국의 근대사는 제대로 볼 수 있다. 집집마다 전부 양반 조상이고, 19세기의 양반모칭자.. 2025. 9. 1. 과거가 없어져 분통이 터진 이승만 부친 우남 이승만의 회고를 보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거가 캔슬되어이제는 과거시험 더이상 없다고 했을 때, 이 대통령 부친도 평생을 과거 시험 보러 다녔던 모양으로 땅을 치며 통분해 마지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자신의 영달 마지막 수단으로 과거를 노렸던 것인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너무나 분통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 집안은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이지만이미 오래전에 벼슬이 끊겨 영달하지 못한 집안으로 알아서 아마도 이대통령의 부친이 과거시험 볼 때도 준호구를 떼서 들고가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유학, 친가 3대 외조 학생처가 3대 외조 학생이리 적혀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참고로 [일성록]에서고종 28년(1891)의 과거시험 기록을 확인해 보니10만 명 이상이 응시한 시험을 이 해에만 26회 실시했다고 한다.그.. 2025. 8. 31. 족보와 호적에 솔직하지 못하면 한국근대사는 없다 언젠가 한 번 이야기 한 거 같지만일본 미츠비시상사의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는 岩崎弥太郎에도시대 그 집안이 완전하게 쫄딱망한 향사 집안으로 향사집안 자체가 사무라이 계급에서는 바닥인데아버지 대인가 할아버지 대인가에는 그 바닥을 치는 사무라이 자격까지 팔아버리고 말 그대로 거지 같은 신분이 되어 있었다. 일본 이토추 상사의창업자인 伊藤 忠兵衛는 에도시대 직물 소매상을 하던 집 출신이며, 미쓰이 그룹은 에도시대 옷집인 에치고야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재계 막론하고 양반 후손 아닌 사람들이 없어서 재벌 집안까지도 조상들은 양반집이라는 것인데필자가 보기엔 모두 19세기에 흥기한 새로운 유학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마도 20세기 일제시대와 대한민국 독립이후 활동한 많은 사람들의 가계를.. 2025. 8. 31. 호적에서 믿지 못할 정보 하나 나이 족보와 호적을 대조해 내려가다 보면, 양측에 서로 보완하는 기록도 있고 영 안 맞는 기록도 있다. 예를 들어 이름이 호적과 족보의 이름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1-2대 아래의 호적을 보면 정정 되는 경우가 있다. 대개 어쨌건 양반들은 3대조 이름을 적게 되어 있으므로 위 대에서 다른 이름이 1대 내려오면 족보 이름과 매칭되는 경우가 나온다. 이런 경우 호적과 족보가 서로 이름이 다른 경우는 요즘도 볼 수 있는 사례이므로 특별한 부분은 아니다. 유난히 호적과 족보가 상충되는 것 중의 하나가 군역이 무조건 면제인 상층부 양반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평민이나 면제가 아슬아슬한 양반들의 경우 호적에 올라 있는 나이를 믿을 수가 없다. 군역은 조선시대에 16-60세까지인지라,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유난히 .. 2025. 8. 30.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 3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