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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현황과 연혁] 대한민국 1호 공립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 기초자료가 2016년 개관 70주년 기념해 이 박물관에서 펴낸 책자들이기에 이후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이는 추후 보강키로 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어려웠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박물관 건립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28세의 젊은 미술학도였던 이경성은 일제에 의해 흩어져 있던 여러 자료들을 동분서주하며 수습하였다. 미군정과 협의를 통해 부평 조병창에 버려져 있던 중국 철제 유물을 미군 트럭에 실어오기도 하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족박물관에서도 유물을 빌려와 박물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박물관 건물은 인천 중구 송학동(현재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자리)에 있던 옛 독일계 무역상사인 세창양행의 사택으로 결정되었다. 이경성은 인천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건축 자재를.. 2024. 3. 12.
[自述] 돈 끌어와 개최한 고구려 고분벽화 학술대회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따로 놀기 마련이라, 좋은 의미에서 시작한 일이 꼬이는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고구려 고분벽화 전시회 개최와 관련해 주최한 학술대회가 그러했으니,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연합뉴스가 일본 교도통신, 한국의 서울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인류의 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2006. 9. 2∼10. 22)을 개최했거니와, 이 전시회는 현재까지 나로서는 내가 직접 간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였으니, 이후에도 간접으로 회사 주최 전시회에는 이런저런 식으로 손을 대기는 했지만 다 간접이었으나, 이 전시만큼은 내가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 이 전시회 관련 논급은 여러 군데 했으니, 중복을 피하기로 하고 이 전시회를 막상 개막하고 나니 뭔가 하나 허전한 게 있었으니, 관련.. 2024. 3. 12.
용어와 개념과 분류는 행정의 알파요 오메가다 물론 이걸 추진하는 쪽에서는 다른 이유를 댈지 모르지만 문화재보호법 근간을 뜯어고치게 된 출발은 그 첫째도 둘째도 명실名實의 불일치였다. 첫째 문화재라 했지만 이 문화재는 자연유산을 포함하지 못한다. 그래서 특히 자연유산을 하는 쪽에서 불만이 팽배했고 이럴 것 같으면 우리는 환경부로 가겠다 협박을 일삼았다. 이것이 직접 동인 중 하나였다. 굳이 저 일이 아니라 해도 왜 문화재라 하면서 자연유산까지 포함하느냐는 불만이 팽배했던 건 엄연한 사실이다. 둘째 그 하위 분류는 더 처참해서 일정한 준거나 기준도 없는 막말대잔치가 벌어졌다. 모양이 있고 없고가 기준이면 오직 유형과 무형이 있을 뿐인데 민속문화재가 따로 있고 기념물도 따로 있었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잡자 나서 만든 것이 국가유산기.. 2024. 3. 12.
문화재청 핵심 존재 가치는 지정이 아니라 서비스다 국립문화재연구원더러 나는 고고학 발굴조사 이젠 손떼야 한다는 말 여러 번 입이 아프게 지적했다. 지들이 왜 발굴이란 말인가? 마찬가지로 문화재청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정 중심에 행정이 가 있다는 점이다. 이 놈들은 지정하는 것 아니면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없다. 지정이 그 행정 일부일 수는 있지만, 이젠 이 지정 업무도 손떼야 한다. 대국민 서비스 기관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한가롭게 지들이 지정 놀음이란 말인가? 이 알량한 일을 권력이랍시고 까불 생각 말고 이 업무는 손을 완전히 떼고, 이 업무는 문화재위원회를 완전히 독립케 하고 그쪽으로 완전히 넘겨야 하며, 문화재청은 그에서 남는 여력으로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말로만 문화재 서비스? 웃기는 소리 좀 작작하고,.. 2024. 3. 12.
고려와 서하, 직접 접촉이 없는 희한한 교유 역사학을 통용하는 교류 혹은 국제관계라면 으레 직접한 접촉을 말하지만, 천만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간접파동이다. 정보유통이 제한되었다고 생각하는 전통시대로 갈수록 이걸 따지는 작자가 그리 많은데, 내가 볼 땐 더 중요한 것이 직접 교유가 없는 교유다. 고창국과 고구려, 이들은 직접 통교가 없었다. 물론 있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없었다고 보아도 대과가 없다. 물론 당나라에 조공할 적에 사신단끼리 마주하며 필담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전연 교유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고구려는 알고 있었다. 고창국이 망했다는 사실을. 그 망한 일에 고구려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하와 고려. 보다시피 서하와 고려가 직접 접촉할 창구는 없다. 가로 막힌 데다, 저쪽으로 가려면 일단 송이.. 2024. 3. 12.
遼가 강이 아닌 지역을 말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요동遼東 요서遼西가 달라진다. 저 요동군 요서군은 말할 것도 없이 遼를 기점으로 그 동쪽이라 해서 요동군이라 하고, 그 서쪽이라 해서 요서군이라 한 것이다. 이를 압도적으로는 遼를 강으로 보아 이 강을 기점으로 그 동쪽을 요동군이라 하고, 그 서쪽을 요서군이라 구분한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이 遼라는 강을 지금의 어느 강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한다. 이른바 강단사학이니 재야사학이니 가릴 것 없이 저 遼를 강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하등 차이가 없다. 그 강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지금의 요하遼河, 요수遼水로 보는 이른바 강단사학과 그렇지 않은 다른 강으로 지목하는 재야가 갈라질 뿐이다. 하지만 저 遼가 강이 아닌 지역이라는 어찌 할 것인가? 삭朔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 관념으로는 대..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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