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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렬의 한국어 연구 특징 앞서 월북 국어학자 류렬과 관련한 그의 국어학 주장 요지 하나를 소개했으니, 아래 기사는 그 무렵 그와 짝해서 별도로 작성해 송고한 내 기사다. 2000년 당시 여든두살 류렬은 이산가족방문단 일원에 포함되어 딸 류인자(당시 59세) 씨를 상봉했다. [2000.08.17 송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그리하여 이 부문(국어)의 연구에서 부르죠아 반동학자들과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앞잡이들이 퍼뜨리고 있는 온갖 그릇된 관점과 주장, 방법론, 그리고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과 민족 분렬책동을 합리화하려는 궤변들에 대하여 리론적으로나 자료적으로나 응당한 타격을 주고 짓부셔버려야 한다". 1983년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나온 『세나라 시기 리두에 대한 연구』 서문에서 이 책 저자인 류렬(82)은 이렇게 .. 2024. 1. 30.
삼국시대 지명 분석을 통해 동일민족설을 주창한 월북 국어학자 류렬 앞에 강민경 선생이 월북한 저명한 국어학자 김수경金壽卿 관련 글을 기고했기에, 비슷한 처지였던 월북 국어학자 류렬柳烈(1918~2004)에 관한 기억이 나서 2004년 내가 쓴 관련 부고 기사를 전재한다. 1918년이라는 생년은 남쪽에 남은 같은 국어학자 허웅 선생, 이강로 선생과 같다. 류렬이 특히 비판한 남한 국어학 거물 이기문은 1930년생이라 나이 차이가 좀 난다. 기사 본문에서 보듯이 허웅 이강로 두 선생 논급이 있다. 그의 연구성과 중 《세나라시기의 리두에 대한 연구》는 특히 중요하다. 삼국시대에 보이는 지명은 거의 다 망라하여 그 유래를 추적했다. 물론 그의 주장을 모두 따를 수는 없겠지만,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월북 국어학자 류렬 박사교수 별세 연합뉴스 2004.08.02 11:.. 2024. 1. 30.
페라리 타고 도망가던 현종, “너무 왔나?” 앞서 보았듯이 코앞까지 밀어닥친 거란군을 피해 고려 현종 왕순은 1010년 12월 28일 임신壬申, 양력 2011년 2월 3일 남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드라마는 현종이 끝까지 개경을 사수하려다가 할 수 없이 피했다고 해서 고뇌에 찬 군주의 모습을 그렸지만, 실상은 전연 달라 이날 밤 몰래 후비后妃 몇 명과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을 포함한 금군禁軍(궁궐 수비대) 50여 인과 더불어 아주 단촐한 규모로 경성을 빠져나갔다.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꼼수였다. 밤새 달린 현종은 이튿날인 1010년 12월 29일 계유季酉에는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이란 곳에 이르고 다시 그곳을 떠나 날이 저물어서야 창화현昌化縣이란 곳에 이르렀다. 앞 지도를 보면 이날 임진강을 도하했음을 본다. 아마 그쪽 현 치소에서 머물.. 2024. 1. 30.
남쪽으로 튄 현종, 보름 만에 날아서 나주에 닿다 성종이 친정한 이른바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결국 개경까지 함락 당할 위기가 닥치자 현종은 1010년 12월 28일 임신일에 남쪽으로 줄행랑치기 시작해 1011년 1월 13일 정해丁亥(양력 2월 18일)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에 입성하니 개경 출발 기준 불과 보름 만이었다. 왕의 행차가 이렇게 빠를 수는 없으니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줄행랑이었다. 예서 궁금증. 남쪽은 고려시대 당시에도 개경을 기준으로 삼아 크게 두 가지 통로가 있었다. 나주로 곧장 남진하는 코스와 소백산맥 넘어 경주 방면으로 가는 길이 그것이었다. 두 길은 천안, 구체로는 갈기비가 있는 데서 갈라진다. 현종은 단 코스를 선택했다. 왜? 저 코스는 전반으로 보아 평탄하나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천안.. 2024. 1. 30.
장성을 왜 쌓았을까 우리 역사에는 몇 차례 장성 축조 역사가 있다. 고구려, 고려 때 두 차례 천리장성이 있고 전술한 대령강장성도 어느 시기엔가 쌓았던 6백리짜리 장성이다. 연길에도 장성이 있다. 이것도 고구려 시대라는 주장이 있는데 알 수 없다. 장성을 왜 쌓았을까. 흔히 문명과 야만의 경계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여유가 있었을까. 나이가 들면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는데 한국사는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적이 없는 역사인데 그 없는 살림에 필사적으로 군대도 운영하고 대장경도 찍고 금속활자로 100부 되는 다품종 책도 찍어내고 한글도 만들고 했던 나름 근검 절약 빡센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처럼 호화막대한 건물 유적은 별로 없어도 수천년 무지막지한 침략에도 살아남고 수 없는.. 2024. 1. 30.
강동6주? 서희가 강제로 탈취했지 거져 얻은 것이 아니다 저 강동육주江東六州라는 말은 전통시대 사서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이 못내 옛날부터 미심쩍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대로 저 시대 역사를 설명할 때는 편리한 점이 많아 그대로 따르기는 했지마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우리한테 각인한 이미지는 서희라는 세 치 혀로 무장한 뛰어난 고려시대 외교관이 80만 대군이라 설레발 친 거란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지어 그 자리서 저 땅을 받았다고 하지만 천만에. 당시 양쪽 조정을 대표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밀실 야합이 있었는지는 고려사(절요 포함)와 요사 모두 침묵하지만, 이후 전재된 양상으로 보건대 명확해서, 또 많은 이 시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고려는 송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끊고 이제부터는 거란을 종주국으로 섬겨 요나라에서 조공 책봉을 받겠다. ..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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