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작약에서 대파, 대파에서 죽순까지 절간 찾아다나다 보면 비구니 사찰과 비구 사찰을 구분하는 법을 대강 터득하게 된다.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는 그곳에 똬리를 튼 이 용담사龍潭寺라는 절은 그 이름과 연원은 오래이나 지금의 이 용담사가 그 용담사는 아닐 것으로 본다. 대개 지정 성보문화재 근처에는 그것이 유래하는 사찰 이름을 내건 신흥 사찰이 들어서는 일을 자주 보거니와, 혹 이 용담사도 그런 데가 아닌가 하는데 자신은 없다. 한데 이 용담사를 대략으로 훑으니 비구 사찰에선 느끼기 힘든 면모가 있으니, 무엇보다 사찰 전체가 무척이나 끼끗하고 곳곳에 작약이며 붓꽃이며 하는 꽃 천지라 이건 여성의 손길 아니면 있기 힘든 현상이라 비구니 사찰 아닌가 상상해 본다. 부처님오신날 지난 직후임에도 연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사세寺勢가 있..
딱풀로 붙이는 원시청자 보존처리 딱풀로 시도하는 두번째 보존처리 절강성 덕청 출토 원시청자 붙이기다. 두 동강 난 것을 붙였다. 접착제가 유별나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 석장은 붙은 상태다.
이왕팔사마二王八司馬와 영정혁신永貞革新, 특히 유종원과 유우석 제목이 말하는 이 사건은 비단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중국문학사에서 중대한 위치를 점한다. 당 제국이 무너져 가는 중당中唐 말기, 그 무너지는 제국을 다시 일으키겠다며 개혁 혹은 혁명을 표방한 그룹이 나타났으니, 그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 중에 우두머리가 공교롭게도 두 왕씨이며, 이들을 뒷받침하며 혁신 그룹에 속한 젊은이 8명이 정변이 실패한 뒤에 모두 사마로 좌천된 까닭에 이 혁신, 혹은 반동을 주도한 이들을 싸그리 뭉뚱거려 2왕 8사마라 한다. 이들이 이런 혁신, 혹은 반동을 실행한 때가 당唐 순종順宗 영정永貞 원년(805)이라 해서, 그 혁신 운동을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 부른다. 물론 이들은 혁신 혹은 개혁을 표방했지만, 그에 반대해서 집요하게 그들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마침내 권세를 회복한 사람들 눈에는 ..
Germany to return 500-year-old monument to Namibia Germany to return 500-year-old monument to Namibia(summary) (CNN) Germany is set to return a 15th Century artifact it took from Namibia known as the Stone Cross. Minister of State for Media and Culture Monica Gruetters on Friday said the gesture showed that Germany was committed to accounting for its colonial past.The 3.5-meter high navigation landmark, erected by Portuguese explorer Diogo Cão, ..
떼죽음한 때죽나무 봄 밀어내고 여름 최촉하는 비가 죙일 서울에 내린다. 간밤 가로등 비친 산딸나무 꽃 하도 은은해 비맞은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찾아나섰더랬다. 산딸은 여직 싱싱해 며칠은 더 버틸 듯 바로 옆 떼죽 언뜻 보아 절정이나 오르가즘 지난 듯 아래 보니 온통 시신으로 범벅이라 사뿐히 즈려 밟기엔 길이 좁아 먼발치 장송葬送만 한다. 떼죽아 산딸아 너는 봄인가? 여름인가?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옆 목화반점 천안아산역 하차와 더불어 곧장 읍내동邑內洞 당간지주幢竿支柱로 날았다. 내비로 11키로..대략 이십분 걸린단다. 앞서 소개한 평촌리 석조석가여래입상과는 가까웠다는 기억이 있고, 십여년전 이 당간지주가 기차역에서는 더 가깝다는 기억이 있어서다. 보물이라 그런지 주변이 쏵 정비되었다. 그땐 바로 곁에 느티나무 같은 게 있지 않았나 하는데 암튼 너무 달라져 이질감이 없진 않다. 안내판도 확 바뀌어 깔끔하긴 하다. (안내판 전문은 아래 참조) 이 당간지주가 여타 지역 현존하는 동질 당간지주에 견주어 이렇다 할 특징 혹은 차별이 뚜렷하다 할 순 없다. 도지정문화재 정도가 적당치 않을까 하는데 암튼 보물이다. 보다시피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다. 저 분이 168센티로 크다. 주변에 분명 이 당간지주가 건립되던 시절..
Nirvana 황룡사 중천을 지난 해가 서쪽 선도산 너머로 진다. 반세기 이승을 딩굴며 난 무엇을 남겼을까? 아니 남겨야 했을까? 空手로 왔다 空手로 갈 뿐이다.
그땐 다 그랬다 vs. 김원룡만 그랬다 세계 고고학상 유례없는 졸속발굴의 대표본 무령왕릉 발굴조사를 옹호하거나 혹은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리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다. 그게 우리의 수준이었다. 고 말이다. 이 유례없는 도발굴 총감독 김원룡은 내 머리가 돌았다느니 환장했다 하면서 그나마 이 졸속발굴이 곧이어 전개된 경주 발굴에서는 교훈으로 작동했다고 자위한 바 있다. 앞 사진은 황남대총 남분 발굴 현장이다. 아마 1974년 무렵일 것이요 무령왕릉 도굴로부터는 불과 3년이 지난 뒤다. 그때는 다 그러했는가? 그게 우리 수준이었는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김원룡만 그러했고 김원룡만 그런 수준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삼불은 고고학도, 발굴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김원룡의 수준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봐라..동시기에 일어난 발굴인데 천마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