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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과 국가주의 일본제국주의도 그쪽의 덜 떨어진 놈들이나 황도皇度니 신도神道니 이러고 다녔지일본제국주의의 정말 무서운 인문학적 위협은필자 생각으로는 그쪽에서 동양문명을 대표한다고 자임하고 중국 조선 일본사를 모두 아울러 입론을 시도했던 자들얘들이 정말 무서운 놈들이었음. 필자 생각에 나이 60이 넘어가면 국가의 짐은 이제 벗어버리고세계사적 조망이 안 된다면 동양사적 관점에서라도 우리와 이웃을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60이 넘어서도 한민족이 어쩌고 일본놈들이 어쩌고 중국놈이 어쩌고 하는 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 건 젊은이들 맏기고 영감들은 최소한 동양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도 조망해야지 나라밖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문화 어쩌고 알면 보인다고 하면서 젊은 애들에게 맞지도 않는 이야기를 아직도 전.. 2024. 7. 21.
바올리baoli or 바브Vav, 가뭄을 이기기 위한 인도의 몸부림 계단우물 360도 뷰 감상은 아래 https://www.google.co.il/travel/entity/key/ChcIm-CrmNasqsKQARoKL20vMDI3ejV4cRAE/photos?ap=EgNDQXcwAA&ei=7mAoZbmgNq-PrcUPvq-iuA4&g2lb=4159845%2C4207876%2C4208993%2C4220293%2C4223281%2C4242898%2C4252106%2C4253230%2C4254153%2C4254308%2C4256748%2C4258168%2C4250437%2C4253015&hl=en&rp=SAI&sa=X&ts=CAEaBAoCGgAqBAoAGgA&utm_campaign=sharing&utm_medium=link&utm_source=htlswww.google.co.il 인도에.. 2024. 7. 21.
파라오, 등 밀어드려요? 람세스 2세 조각상 뒷모습이다. 이태리 타올로 등을 빡빡 밀어드려야겠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Close up back detail of the statue of King Ramesses II. At Egyptian museum in Cairo. 2024. 7. 21.
분노가 힘이다, 절망은 구렁텅이다 나를 돌아봐도 내가 무엇인가 악다물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 대로 결실이라도 보게 된 힘은 근간이 분노다. 다른 분들이야 내가 섣불리 예단하기 어려우니 제껴두고, 내 경우 책을 두고 말해 본다. 첫 책 풍납토성 오백년 백제를 깨우다는 분노가 출발이었다. 그런 까닭에 훗날 혹은 지금 쳐다 보니 성긴 곳 천지지만, 나는 첫째 그때까지만 해도 맹렬 문화재 투사라, 나 아니면 문화재가 다 없어진다 절박했고, 나아가 그 과정에서 입으로만 문화재 보존을 떠드는 이쪽 업계 사람들이 실로 증오스러워 그들을 고발하는 심정을 썼다. 그 이듬해 2001년에 나온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역시 분노의 자식인데, 그 즈음 나는 역사학계, 특히 고대사학계와 전면전을 불사하는 전투를 벌였으니, 이 책은 그 불사하는 쟁투의.. 2024. 7. 21.
논어의 힘과 에도 막부 에도 막부 260년간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사서의 가르침에 깊이 침잠하여 메이지유신 전야에는 수많은 사무라이가 공자의 가르침에 공명했다. 바로 이 점이 공자의 위대한 부분인데 전쟁과 권모술수로 날을 새던 일본에 교학의 질서를 가져다 준 힘은 에도막부가 주자학을 관학으로 채택했다는 그 사실보다도 바로 공자, 그 중에서도 논어가 가지고 있는 감동의 힘에 있다.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섭공이 공자는 어떤 사람인지 (그 제자) 자로한테 물었지만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공자가 (자로한테)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대답을 하지 않았단 말이더냐? 그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발분하여 먹을 것도 잊고 근심을 잊어버리는 일로 낙을 .. 2024. 7. 20.
뼈다구만 앙상하게 남은 고인돌묘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야와에 전시 중인 울진 나곡리 1호 고인돌이다. 저 안내판 박물관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지석묘(支石墓, 고인돌 무덤)는 원래 울진군 북면 나곡리 662번지에 있었으나, 2023년 정밀발굴 조사된 후 전시를 위해 이곳으로 이전ㆍ복원되었다. 고인돌 무덤은 주로 청통기시대 무덤으로 그 형식은 크게 탁자식卓子式, 기반식碁盤式, 개석식蓋石式으로 분류된다. 탁자식은 4개의 편평한 돌[판석板石]을 세워 장방형의 돌방[석실石室]을 구성하고 그 위에 덮개돌[상석上石]을 올려놓은 것으로 돌방이 땅 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반식은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았는데, 덮개돌 아래에 받침돌[지석支石]을 고인다. 개석식은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받침돌 없이 덮개돌로 돌방.. 2024. 7. 20.
[막말인물전-3] 기도 다카요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1833~1877] 는 일본 소설에 보면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 かつら こごろう]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나온다. 유신 삼걸[維新の三傑] 하면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다. 이 셋 중에 집안은 기도 다카요시가 제일 낫다. 나머지 둘,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는 둘다 잡병 집안 출신이다. 기도 다카요시는 유신을 주도한 3개 번- 죠슈, 사쓰마, 도사 번 중에 죠슈번長州藩을 사실상 움직인 인물이다. 그 자신 메이지 유신 이후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지만 워낙 그때까지 업적이 큰 덕분에 유신 후 그 집안은 화족으로 후작이 되었다. 기도 다카요시 집안은 죠슈번의 번의藩醫로 먹고 살 만한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먹고 살만한 사무라이 집.. 2024. 7. 20.
[막말인물전-2]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는 우리의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아 절명한 제국주의의 첨병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長州藩 출신으로 막말 활발하게 활동한 유신지사에 해당한다. 이토 히로부미 집안은 아버지 때까지도 평민이었는데 아버지 때 최하급 무사인 잡병 아시가루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그의 아버지와 이토가 함께 사무라이 계급 최하층으로 편입되었다. 쉽게 말해 그의 할아버지 때에도 그냥 농민이었으며아버지 때에도 이토가 태어난 후에 아시가루 신분을 얻었으니 말이 좋아 하급무사지 그냥 농민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최하층에서 입신했지만죽을 때에는 그의 집안은 화족이 되어 공작가가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만 그런 것이 아니고 메.. 2024. 7. 20.
일본 여행 붐: 그 문화에 관심있는 분들께 드리는 조언 요즘 일본 여행 붐이라 그 문화에 관심있는 분도 많으리라 본다. 가서 무엇을 느끼는가 무엇을 배워오는가는 전적으로 그 개인의 몫이고, 몇 가지만 조언을 드리자면-. 1. 일본의 박물관 유적 등에 적어 놓은 이야기 중 팩트만 적어 놓은 경우는 거의 믿어도 좋지만, 유적에 대한 평가는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경우도 국뽕이 만만치 않은 나라라 뻥튀기가 중국 못지 않다. 대략 에도시대 이전의 역사는 국뽕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 경우가 많다고 본다. 2. 일본의 유적 복원은 정도가 우리보다 더 심하다. 원형 복원이라고 하지만 근거가 있는 한에서는 최대한 폼나게 복원한다는 말이다. 한국 같으면 흙으로 덮고 잔디로 포장한 후 놔둘 유적에 일본은 같은 자리에 천수각을 올린다. 경주 황룡사는 일.. 2024. 7. 20.
[막말인물전-1] 사무라이 축에도 못 낀 잡병 출신 오키타 소지 간략히 일본사의 막말-메이지초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신상을 리뷰한다. 이 친구들 인생이야 인터넷 찾아보면 다 나오니 여기 자세히 쓸 생각은 없고 출신 신분만 리뷰하도록 하겠다. 오키타 소지[沖田総司, 1842?~ 1868. 7.19], 요즘 젊은 친구들 보는 애니메이션에도 많이 나오던데 신센구미라는 막부측 막말 무력집단에서 가장 검술실력이 좋았다는 사람이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전 폐병으로 죽었다. 신센구미 관련한 영화나 애니에서 미소년으로 나오며 기침하며 객혈하지만 칼만 휘두르면 적이 쓰러지는 컨셉으로 나온다. 오키타 소지의 집안은 잡병 출신이다. 에도막부시기에는 사무라이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크게 보아 대략 말타고 달리는 제대로 된 사무라이와 그 뒤를 뛰어서 쫒아가는 잡병으로 나뉘어진다고 보면 된다.. 2024. 7. 20.
사이고 다카모리의 경천애인 그리고 세한도 메이지유신의 소위 유신삼걸이라는 인물 중에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남긴 유묵 중에 경천애인이라 쓴 것이 유독 유명한데 이 자는 어렸을 때부터 유학에 단련된 사람으로 그 인품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일본에는 있다. 특히 그가 선동한 소위 서남전쟁은 전통적 사무라이 계층의 복고취향으로 이 경천애인이라는 유묵은 여기저기 사이고와 관련된 유적지라면 많이 새기고 복사하고 해서 전시해 놓았다. 경천애인이라는 문구는 사실 유학자라면 다 아는 이야기라 새로울 것이 없다. 유학의 axiom이라 할 것이다. 경천애인이라고 쓴 저 붓글씨도 필자는 이에 대한 조예가 없어 모르겠지만 저 글씨의 가치는 붓글씨의 예술적 각도에서 조망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이고라는 사람의 인생이 있고 그 인생 아래에서.. 2024. 7. 20.
네 신선이 쳐다보 안 보고 제껬다는 울진 월송정越松亭 월송정越松亭 Wolsongjeong 동해를 조망하는 누정 울진 월송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연산군 때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고려말 안축의 취운정기 (1331)에 고려 충선앙 4년(1312) 이미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휠씬 이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월송정은 1980년에 새로 세운 지금의 월송정 남서쪽 약 450m 지점에 있었다. 본래의 정자는 없어졌다. 흔히 달과 소나무라 해서 月松이라 알기 쉬우나 이짝은 달을 싫어한듯 소나무를 뛰어넘어 놀기를 좋아한듯 넘을 월 솔 송을 써서 越松이다. 그 이름 유래는 이곡의 동유기. (1349)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소나무 만 그루 가운데에 월송정 이 있는데.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기 때.. 2024. 7. 20.
사고 팔던 사무라이 일본은 웬만하면 자기쪽 누가 될 만한 소리는 잘들 안하다 보니 막말 유신기의 일본의 정황에 대해 굉장히 과장하고 미화한 경향이 있다. 우선 막말이 되면 각 번마다 재정 상태가 안좋아져 중-하급 사무라이, 성을 쓰고 칼 두 자루 차는 자격 정도는 돈 받고 팔았다. 따라서 좀 먹고사는 농민이나 상인은 이 권리를 사서 사무라이가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잘 아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집안이 이런 경우다. 이 집안 본가는 상인인데 무사가 되었다, 이렇게 두리 뭉실하게 적어놨는데 돈주고 샀을 것이다.에도시대 후반으로 오면 사무라이 신분은 돈주고 사고 팔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좀 먹고 사는 농민들 중에는 격검 도장도 나가고, 칼도 차면서 사무라이 흉내내는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 2024. 7. 20.
개나 소나 떠들던 근왕양이勤王攘夷 메이지유신 전야에 근왕양이勤王攘夷[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도 한다]는 하나의 유행이었다. 시바료타료司馬遼太郎[1923~1996] 소설을 보면 근왕양이의 열풍에 들뜬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탈번脫藩하여 쿄토로 상경하는 모습을 자못 감동스런 필체로 묘사하는데 이와는 다른 장면을 전하는 책도 있다. 근왕양이는 그냥 구실이고 사실 실상은 막말幕末이 되면 하층 사무라이들은 녹봉으로 도저히 연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먹고 살 수가 없어 탈번하는 자가 수두룩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탈번한 이들은 우리나라 70년대 무작정 상경하듯이 쿄토로 향하고 이들이 모여 근왕양이를 부르짖으며 나대기 시작하니 치안이 불안해져 동원된 무력조직이 바로 신센구미新選組다. 웃기는 건 이렇게 동원된 신센구미도 탈번 낭인 浪人부랑자 조직이었다는 점이.. 2024. 7. 20.
메이지유신은 누가 감행했는가 메이지유신에 대한 각종 사설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슨 일본의 사무라이가 들고 일어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것처럼 해놓은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을 이야기 하자면 막번체제를 지탱한 시스템 구성원이었던 제대로 된 사무라이들은 메이지유신 때 쳐맞고 쫒겨다니기 바빴다. 메이지유신 주체는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던 하급무사와 먹고 살만해서 칼 두 개 차고 사무라이 흉내내던 부농 자제들로 이들이 막번체제를 타도하고 신일본을 세웠다. 이 메이지유신 주체는 한국으로 보자면 중인과 잔반계급이다. 동학혁명에 많은 중인, 잔반계급이 참여했는데 이들이 만약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메이지유신에 참여했을 것이다. 막번체제하에서 양성된 제대로 된 사무라이 태반은 메이지유신 하에서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선왕조가 오백년을 심혈을 기울.. 2024. 7. 20.
나폴레옹이 뽑아간 브란덴부르크 마차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 Gate 콰드리가Quadriga 동상이다. 1788년과 1791년 사이에 지은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 최초의 그리스 부흥 건물이었다. 1793년, 이 문은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프 Johann Gottfried Schadow가 디자인한 콰드리가 동상을 장식함으로써 화룡점정했다. 하지만 이런 포지셔닝이 또 다른 분쟁을 불렀다. 1806년,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했다. 이 야심만만한 프랑스 황제는 전쟁 전리품이자 승리의 징표로 콰드리가를 파리로 이송한다. 반달리즘 느낌도 살짝 나지만 그냥 약탈이고 쟁취다. 콰드리가Quadriga란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다. 2024. 7. 20.
이순신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를 다시 보며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이순신의 북방 전투를 그린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다. 이 수책거적도를 다시 보면, 이 그림 주인공은 여진족도, 이를 방어하는 조선군도 아니고바로 뒤편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조선의 농부다. 성채 바깥에 펼쳐진 밭인지 논인지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병사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둔전일 수도 있겠지만 병사가 이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구한말에는 심지어는 이런 군대의 보호없이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청의 봉금封禁 지역으로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농부는 땅을 갈아 먹고 살 수 있다면 어디든 간다. 고려시대 후기 오면서 이 땅에서 마침내 혼합농경이 안정적으로 경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가 북방 사민의 성공인데, 여기서 병사의 전투와 정치적 포석은사실 이 북.. 2024. 7. 19.
빚, 갚아야 하는 나와의 약속 이걸 꼭 계산적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본다. 사람이 살며 어찌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만 있으며, 그래서 필연으로 신세를 지게 되니, 이 신세에 말미암은 무형의 유산을 빚이라 한다. 내 아무리 내 잘난 맛에 산다한들 어찌 혼자서 예까지 왔겠으며, 무수한 관계로 특징짖는 네트워크에서 내가 때로 무엇을 해준 것이 있겠듯이 내가 신세 진 사람이 어찌 한둘이리오?그렇다 해서 내가 신세 진 그 무수한 사람을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만큼은 그에 대한 나름의 갚음은 있어야 한다는 의무는 언제나 안고 간다. 이걸 나는 나와의 약속이라 부른다. 그것이 꼭 유형일 수만은 없겠지만, 무형이라 하면 너무 막연해져서 주어진 자리에서 나한테 허여된 능력 안에서는 그런대로 내가 진 신세는 되도록 갚으려.. 2024. 7. 19.
저 무덤 이름은 경주찰보리총塚 메타세콰이어인지 뭔지 접때 듣기는 했지만 까먹은 저 나무가 어찌하여 저기 저런 양태로 자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경주시에선 생뚱 맞다 해서 한 때는 제거해 버려야지 않는가 하는 논의가 없지는 않았다 기억하지만 그러게 간단히 내치기엔 이젠 놓쳐버리고 말았으니 시시각각 저 떼거리 나무가 뿜어내는 풍광이 만만치 아니해서 잎이 지금처럼 무성하면 무성한 대로 또 왁싱하면 왁싱 상태로 또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각양각색하는 풍광이 묘하기 짝이 없다. 오늘은 저 가랭이 사이로 기어들어가 봤다. 다섯그룬지 여섯그루가 옹기종기 올말졸망이라 저 나무가 묘한 것은 저 나무가 있음으로써 그렇지 아니했으면 그저그런 흔하디흔한 신라무덤에 지나지 않았을 저 씁쓸한 무덤들이 더욱 빛나게 하는 코러스가.. 2024. 7. 19.
잘만든 짜가가 초래하는 문제들 이 모습 보고선 예가 불국사로 알고 가시는 분이 의외로 많다. 진짜 불국사를 마주하고선 예도 똑같은 다보탑 석가탑 있네 하는 분도 있다면 믿기는가? 너무 그럴듯하게 만들어도 문제다. 저 모조품 역사도 제대로 정리해야 하는데 경주박물관에서 제대로 정리한 자료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 분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직접 자손이다. 그 와중에 등장한 것이며 하도 잘만들어서 진짜가 없어지더라도 저 짜가만 살아남으면 진짜를 복원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24. 7. 19.
신라통일 이후 북벌은 혼합농경 북상의 역사 앞에서 우리나라 잡곡과 도작은 기원을 달리하여 요서에서 남만주를 거쳐 들어온 잡곡과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온 도작이 만나서 도작과 잡곡이 어우러진 혼합농경이 성립된 곳은 아마도 평양과 황해도 일대 서북지역일 것이라 하였다. 이 혼합농경이 더욱 남하하여 이루어진 판도가 세형동검문화와 얼추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한다. 따지고 보면 대략 고려의 천리장성 정도가 바로 혼합농경의 북방경계였을 것이라 보는데, 윤관정벌과 공민왕의 북벌, 세종대의 북벌 등은 모두 바로 이러한 혼합농경의 북벌과 궤를 같이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윤관북벌 이후 우리나라 함경도 지역의 식민은 농업 기술 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아래 지도를 보면 알수 있다. 삼국시대-고분시대 도작이 도달할 수 있는 위도는 북위 40도..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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