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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차 일나기 - 서저유이 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는 실은 민요였다. 80년대 이 시는 대구경북을 뒤엎었다. 연습장이며 책받침이며 온통 이 시였다. 그땐 작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저작권이 없던 때이니 문구 제조업자들도 누구 작품인지도 모른 채 마구마구 찍어냈다. 이 시절 소피 마르소와 피비 캣츠와 브룩쉴즈라는 책받침 모델 3대 걸물이 있었다. 그들 사진을 박은 책받침 앞장 혹은 뒷장엔 꼭 저 시가 있었다. 그 시절 대구경북지역 에프엠 방송에도 언제나 저 시였다. 마르소와 캣츠와 쉴즈는 선택이었으되 저 시는 필수였다. 저 와 책받침 쟁탈 이전투구를 벌인 다른 시가 있었다. 윌리엄 워즈워스 이었다. 내가 서울로 유학한지 며태만에 마침내 작자가 나타났다. 서정윤이라 했으며 교사라 한 기억이 있다. 갱상도에는 정유이라 부른다. 서정유이....
Peony Surrounding Time Three story Stone Stupa at Seoak-ri, Gyeongju 慶州西岳里三層石塔 /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작약이 만발했다. Photo by Seyun Oh
창녕 비봉리유적 출토 통나무배에 대한 국립김해박물관의 해명 혹은 반박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2019.05.07 17:27(수정기준) 아래 제하 글을 게재했으니, 창녕 비봉리 유적 출토 8천년전 신석기시대 통나무배를 의심한다 그에 대해 뜻밖에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이 글을 접했는지 5월 15일자로 그에 대한 해명 혹은 반박자료를 보냈다. 내가 이런 반응을 얻고자 게재한 글은 아니어니와, 내가 이해하는 블로그 글이라 함은 자신의 생각은 비교적 자유롭게 펼치는 공간이라 생각하는 까닭에 다음과 같은 김해박물관 측 설명은 실은 놀랍기만 하다. 이와 관련해 나는 두 가지 말을 우선 하고 싶다. 1.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와 같은 해명 혹은 반박을 부르게 수고를 끼친 점, 국립김해박물관 측에 송구하다는 말을 남긴다. 2. 아무리 가볍게 한 말이라도, 그에 대해 이와 ..
뒤늦게 군번을 불러준 장경호 선생 2년전 오늘(May 17, 2017) 나는 수원 장안구 경수대로 1092에 위치하는 한울문화재연구원이란 데를 갔다. 해직기자 시절 막바지였던 듯 그때 내가 의욕만 앞세워 하고자 한 일 중 하나가 문화재계 원로들 증언채록이었으니 이 또한 그 일환이라 2층 이사장실로 장경호 선생을 찾았다. 한창 인터뷰 중인데 선생을 찾는 전화가 왔다. 대화를 엿들으니 국립문화재연구소 조모 박사였다. 내 인터뷰를 방해하고자 하는 공작임이 분명했다. 듣자니 작년 장 선생을 녹취한 자료집이 출간되는 모양이다. 백부만 보내달라고 선생이 말씀한다. 두 시간가량 걸린 인터뷰를 마칠 무렵 한울문화재연구원 창립자이자 원장인 김홍식 선생이 합류했다. 장 선생이 1936년 김 선생이 1946년생이다. 기억력에 장애가 생기고 말이 어눌해진 칠..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5)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사실 주자가 회곽묘를 창안하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주자가 살아있을 당시 이미 그가 살던 중국 강남 땅에는 회곽묘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안 알려졌지만 중국쪽에도 우리와 같은 회곽묘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회곽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요장묘浇浆墓 혹은 삼합토 요장묘三合土浇浆墓라고 부른다. 이 무덤이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것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북송대에 속한다. 주희가 남송대 사람이므로 이 무덤은 주자가 생존하던 당시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셈이다.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역도 주희가 살던 양자강 일대로 내가 안다. 중국 쪽 자료에서 이 무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면 우리 회곽묘 만드는 방법과 ..
한국 최고最古 사찰의 쌍두마차 도리사와 직지사 구미 선산 도리사다. 이 심각성이 제대로 대두하지 않으나 신라 기준으로 이 도리사가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삼국 중 신라가 불교 도입이 가장 늦다 하나 현존 사찰 중 위치가 파악되는 한반도 최고最古 사찰은 선산 도리사다. 대서특필해야 할 장소다. 이 사진은 김천 직지사다. 도리사와 동시에 창건한 신라 사찰이다. 한반도 가장 오래된 사찰은 도리사와 직지사다. 경주가 아니다. 왜 김천과 선산인가? 소백산맥을 넘어 경주로 향하는 교통로인 까닭이다. 사기와 유사에 의하면 신라 불교는 눌지왕 시대 고구려를 통해 유입됐다.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에서 불교가 침투하는 격절이 바로 김천이었다. 그 고개가 추풍령이다. 그 고개 지나 경주로 가는 길목에 도리사가 있다. 나는 언제나 사찰을 모텔로 보며 고속도로휴게소에 견준다.
직지사와 지끼사 사이 직지사直指寺.. 신라에 제도로서의 불교를 도입한 시초인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에서 황악산을 바라보며 저 산 기슭이 절을 세울 만하다고 손가락으로 곧장 가리켜 세운 절이라 해서 이리 부른다 하거니와 김천에선 직지사라 부르지 아니하고 지끼사라 발음한다. 뭐 구개음화니 하는 말이 있으나 신뢰하지 아니한다. 그런 직지사, 아니 지끼사가 이리도 아름다운 줄 미쳐 몰랐다. 의무감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대덕산 수도산 기슭에 살 적엔 소풍 갈 데라곤 수도산 청암사 밖에 없었노라 했거니와 그래서 그런 청암사가 죽도록 지겨웠노라 토로했거니와 김천고 입학과 더불어 대덕산을 떠나 김천 시내로 자취생활을 떠난 내가 그 삼년간 김천에 살 때는 놀러갈 데라곤 지끼사밖에 없었다. 마치 청암사가 그러했듯이 지끼사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묘표墓表에 쓴 추사 글씨는 낯이 설다 추사 김정희가 만년에 쓴 비문, 임실서 발견송고시간 | 2019-05-16 14:07전주최씨 최성간 묘비…"장중하면서 짜임새 있는 작품" 광화문 복원 즈음, 그 현판 글씨를 어찌해야 할 지를 두고 한창 논란이 벌어지던 와중에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얼마나 진심을 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추사 김정희 글씨를 집자하는 방법도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못내 캥기는 점은 있는지, 내 기억에 스스로 말끝을 흐리기를 "한데 말이야, 추사 글씨는 현판에는 안 어울려" 라고 했다. 아마 어떤 기자간담회 석상이 아니었는가 싶은데, 실은 기자들 반응을 떠보고자 함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서 내가 받아쳤다. "추사는 경복궁과 전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추사는 경복궁을 구경조차 못해 본 사람이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