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1624 대중강연 둘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대중강연이 정말 어렵다. https://www.yna.co.kr/2023-site/traveler03 K컬처 아카데미 여행자 학교 3기 | 연합뉴스K컬처 아카데미 여행자 학교 3기 | 연합뉴스www.yna.co.kr 어제 했던 강연. 오늘 해야 할 강연. https://museum.kangwon.ac.kr/index.php?mp=6_1&BID=46&cmd=view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는 제2기 박물관대학 수강생을 다음과 같이 모집합니다. 이번 박물관대학의 주제는 ‘문명의 태동과 교섭Ⅰ’입니다. 올해는 인도를 시작으로 서역과 중국, 동남museum.kangwon.ac.kr 내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오늘 조금 더 다듬어 강단에 서얄 듯. 2023. 5. 24. 백운거사 집에 목필화가 피었네 이규보 집에는 꽃과 풀, 곧 화초도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의 집 뜨락에 봄이 찾아왔다. 꽃봉오리가 붓끝을 닮았다 하여 목필화라고도 하는 목련이 어느새 꽃을 틔운 것이다. 고개 들어 한참 바라보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부추 잎처럼 길쭉한 풀들이 자라났다. 옛날 중국 한나라 때 학자 정현이 제자를 기르던 곳에서 났다는 서대초다. 길고 질겨서 책을 묶는데 썼다는 풀, 거기에 붓을 닮은 꽃까지. 글자로서 몸을 살찌우고 술로 영혼을 먹일 우리의 백운거사는 금세 시 한 수를 지어냈다. 하늘이 무슨 물건 그리려 먼저 목련을 피게 했는지 좋구나 서대초와 더불어 시인의 뜨락에 심었음이 天工狀何物 先遣筆花開 好與書帶草 詩家庭畔栽 [주-D001] 목필화木筆花 : 신이화辛夷花의 이명.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 2023. 5. 23. 룩소르의 추억 – 새들의 노랫소리 by 유성환 룩소르에서 아침을 먹을 때 창가에서 벌어진 풍경입니다. 참새들이 접시 위의 남은 음식을 먹으러 몰려들었습니다(아래 사진).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체계에서 참새(Gardiner Sign-List: G37)는 ‘악의 새’(bird of evil)로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참새가 중후장대(重厚長大), 즉 무겁고 두껍고 길고 큰 성질에 반대되는 경박단소(輕薄短小), 즉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성질을 나타내는 단어들의 의미 한정사(determinative)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참새는 “결핍”이라는 의미 범주를 지시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아울러 “좋다”의 반대말인 “나쁘다” • “차다”의 반대말인 “비다” • “건강하다”의 반대말인 “아프다” • “존속하다”의 반대말인 “소멸하다” 등과 같은 부정적.. 2023. 5. 23. 한국사의 무신정권은 일본 무가정권과 다른가 의외로 이런 믿음이 학계에까지 퍼져 있는 경우를 본다. 한국사의 무신정권은 외형상 일본 무가 정권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 설명이다. 그 한가지 예로 한국의 무신정권은 무가정권처럼 기존의 군주를 정점으로 한 왕권과 완전히 독립해 있지 않아 완성된 무사정권으로 보기 어렵다는 믿음이다. 실제로 그런가? 이런 설명을 할 때 모델이 되는 일본의 "무가정권"이라면 에도막부인 경우가 많다. 이 시대는 헤이안시대부터 내려오는 공가와 완벽히 분리된 행정조직으로 지방까지 통제하는 막번체제가 정비되어 일본사 무가정권의 최종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이 시대와 비교하면 당연히 무신정권은 뭔가 함량미달이 되겠다. 하지만 일본의 무가 정권에는 에도 막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마쿠라 막부 이전에는 헤이시정권이 있었는데.. 2023. 5. 23. 똥폼으로 장식한 문방도文房圖 병풍 문방도 2폭 병풍 [文房圖二幅屛]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보다시피 각각 2폭 병풍인데 저런 쫍다란 걸로 어딜 썼는지 모르겠다. 팔폭인데 각각 짤라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세트는 크기가 달라 같은 병풍 세트는 아니다. 고궁 설명은 이렇다. 궁중의 실내 공간을 장식하는 동시에 좁은 공간의 시야를 가리는 용도로 삼은 병풍이다. 쌍아올린 책들 사이로 벼루, 붓, 필통과 갈은 문방구와 골동품, 도자기, 화초, 과일 등의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책과 문방구류는 학문과 배음에 대한 열망, 그리고 좋은 문방구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취향을 나타낸다. 불수감, 수선화 등은 부귀와 다산의 소망을 담은 것이다. 진귀한 물건들, 경사스러운 의미를 갖는 소재들을 망라하여 지적이고 문화적인 취향뿐.. 2023. 5. 23. 서원지의 부정확성, 필암서원의 경우 송준길의 《동춘당집》 권16에는 〈장성(長城) 필암서원(筆巖書院)을 옮겨 세우는 고유문 -이 서원은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을 모셨다.-〉이 실려있다. 그 내용을 보면 "원우(院宇)의 지세(地勢)가 좋지 못하므로 오래전부터 옮겨 세우기를 논의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여름 장마에 크게 파손되었기에 상의한 결과 모두 동의하였으므로 추산(秋山) 아래에 있는 중등촌(重登村)으로 옮겨 세우고자 하여, 감히 그 사유를 고합니다" 라는 짤막한 내용이다. 이 기록과 기왕의 《필암서원지》 기록을 종합하면 기산리-증산-중등촌-현위치인 해타리(海村)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첨부한 지도에서 보듯 중등촌은 지금의 중동 마을이다. 몇해 전 나는 심곡서원 역시 관련 기록을 통해 중창 연도 등이 잘못되.. 2023. 5. 23. 김유신, 金庾信과 金裕神 김유신(595~673)은 생전에 왕위에 있는 적이 없음에도 신라 하대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봉되었다. 그의 직계 후손이 왕이 되었다면, 이런 추봉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음에도 신하였던 그가 사후에 대왕으로 추봉된 것은 파천황의 사례다. 나는 이 대왕 추봉이 산신에 대한 대왕 책봉, 혹은 무속에서의 대왕 추봉과 비슷한 맥락에서 본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중요한 것은 대왕으로 추봉되면 이제는 이름을 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시점에 대해서는 흥덕왕(826∼836) 때라는 삼국사기와 경명왕(재위 917∼924) 때라는 삼국유사 두 가지로 갈라진다.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역시 이 두 가지로 갈라진다. 이 중에서도 어느 쪽이 더 타당한가? 나는 흥덕왕 때임을 지.. 2023. 5. 23. 글이 글을 낳은 힘, 글쟁이는 죽을 때까지 간단없이 쓰야 한다 아껴서 저축 비축한다 해서 좋은 글 좋은 논문 좋은 책이 연타로 나오는 건 아니다. 열라 쓰다 보면 또 튀어나오는 게 글이다. 글을 쓰는 원동력은 글이 있을 뿐이다. 원고 서너 편을 두고 첫째 어떤 것을 해직 1탄으로 할까 고민했고, 둘째 1탄과 2탄 사이에 어느 정도 기간을 둘까 고민했다. 아다시피 1탄을 나는 《직설 무령왕릉》으로 질렀고, 2탄은 틈을 두지 않기로 했다. 주변에선 많은 이가 말렸다. 소진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글은 쓸수록 쏟아지는 법이다. 남들이야 다작이라 하건 말건 나로선 그 하나하나가 다 나름 의미가 없을 수가 없으니 걸리는 족족 질러버리려 한다. 2탄 가제는 《박제상, 충신에서 국민으로》다. 전통시대 충신의 표상 박제상이 국민국가 시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국민의 표상으로 변모.. 2023. 5. 23. 월성 성벽을 깔고 누운 시체들(2) 순장殉葬 금지 주체는 지증왕? 혹은 소지왕? 앞서 본 대로 삼국사기 신라 지증마립간본기에 의하면 同王 3년(502) 봄 3월에 임금이 令을 내려 순장을 금했다고 하거니와, 이 조치가 하필 왜 이때였을까? 나는 일전에 이때 나온 순장 금지를 지증왕 전왕인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일명 비처 마립간毗處麻立干 주체로 볼 필요도 있음을 역설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이 순장 금지 율령을 반시頒示한 이는 분명 지증왕이지만, 그것을 가능 혹은 추동케 한 원인으로 소지왕의 유훈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증왕본기 관련 기록을 더욱 세심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에 이르기를, 三年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라고 했거니와, 下令한 주체가 분명 現王인 지증왕이고, 그 대상이 王陵이라는 점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풀면, 왕.. 2023. 5. 23. 장인이 되어 버린 자비왕비 파호巴胡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20대 자비왕의 왕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본기 4년(461) 봄 2월 조에 이르기를 "임금이 서불한 미사흔未斯欣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王納舒弗邯未斯欣女爲妃]"라고 할 뿐이다. 그 자비왕비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다. 삼국유사에서는 그 왕력편을 보면 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에 대해 "비는 파호갈문왕巴胡葛文王의 딸인데, 미질희각간未叱希角干 또는 미사흔각간未斯欣角干의 딸이라고도 한다. [妃巴胡葛文王女 一作未叱希角干 一作未斯欣角干女]"라고 해서 실명은 거론치 않으면서 그 아버지 이름만 희한하게 '파호巴胡'라고 했다. 자비왕비는 누구인가? 巴胡 다. 자비왕비 이름이 바로 파호다. 따라서 이 둘을 종합하면 이렇다. 눌지왕 아들로 신라 제30대 왕이 된 자비는 재위 4년째에 막.. 2023. 5. 23. 전시과와 장원정리령: 그 한 끗 차이란? 한국사의 전시과제도와 일본사의 장원정리령은 율령제의 붕괴과정에서 산출되어 나오는 토지의 사적소유를 억제하고 토지공전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기득권의 시도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본사의 장원정리령은 토지공전제를 침탈하는 장원의 확대를 막는 덴노의 명령으로-. 다분히 수세적이고 방어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한국사의 전시과제도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이전에 분출되어 나온 나말여초의 호족의 발호를 일거에 일소하고 토지공전제를 고려 국초에 확립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러한 차이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 필자는 이 차이야 말로 한국사와 일본사의 바탕에 흐르는 가장 큰 차이-. 결국 한국사는 일본사보다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에 보다 취약하여 공전제를 유지하여 막대한 군사력을 국.. 2023. 5. 23. 무신정변武臣政變과 헤이시정권平氏政権 무신정변 (1170년)과 최씨 막부 성립(1196년). 일본 최초의 무가武家 정권인 헤이시정권平氏政權의 성립 (1160년대 ~ 1185년) 이 두 사건이 거의 동시기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의 한국과 일본사 전개를 보자. 한국: 후삼국과 호족의 시대 (892-936) 대 일본: 각지에 무사단 성립 (10세기) 한국: 전시과제도 (10세기-11세기 성립) 대 일본: 장원정리령 (10세기-12세기) 한국: 무신정변(1170년)과 최씨정권 (1196-1258) 대 일본: 호겐의 난 (1156), 헤이지의 난(1159-1160)과 헤이시 정권 1167-1185) 한국과 일본사는 몽골침략기까지는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사와 일본사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2023. 5. 22. 학예사들의 또 다른 습관 : 온전히 전시를 즐기지 못하는 이유 언젠가부터 전시를 즐겁게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전시를 전시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것도 습관이자 강박이라면 그렇다 할 만 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난번 에피소드에 끼워넣지 못했기 때문에, 별도로 쓴다는 것을 고백해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 이런 말을 들은 때가 있었다. “학예사인데 다른 전시를 보며 느꼈던 점이 없냐고.' 새로운 전시 구성안을 내밀었더니, 다른 전시를 보고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냐고 물으시면서 하셨던 말이었다. 어떤 의도로 하신 말인 지는 지금은 알지만, 전시를 몇 번 하고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나는 학예사가 되기 전에도, 전시를 열심히 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작품에 쉽게 감동하는 스타일도 아.. 2023. 5. 22. 덴노天皇의 카운터 리볼루션: 장원정리령荘園整理令 일본사에서 무가정권은 율령제-공전제를 부수면서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첫 단추가 바로 무사단이라 하였다. 그 무사단이 한국사에서는 라말여초의 호족에 상응한다고 하였다. 일본사에서도 율령제-공전제를 부수고 성장하는 무가정권에게 순순히 기존 권력이 자리를 내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수시로 공전제로의 복귀를 희망하였는데 그러한 시도는 모두 덴노의 "장원정리령荘園整理令"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장원정리령은 쉽게 말해서 토지의 사적 소유인 장원을 공전제로 되돌리자는 시도였다 할 수 있다. 덴노의 장원 정리령은 서기 10세기초부터 12세기 중엽까지 수시로 내려왔는데, 모두 장원을 억제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 아래는 일본사에 보이는 장원정리령이다. 延喜の荘園整理令 902年(延喜2)醍醐天皇 この整理令以.. 2023. 5. 22. "추사체는 구제불능" 오경석이 평한 추사 글씨 우리나라의 글씨는 옛날에는 진晉나라 사람 글씨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순전히 팔을 써서 그저 모양만 추구하였고, 예로부터 서학書學에 대해 강론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따금 글씨에 능한 명필이 배출되었더라도 일종의 거칠고 속된 기운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근일에 김 추사秋史 글씨가 성행하는데, 경솔한 데다 더욱 구속됨이 없어 드디어 마계魔界로 들어가 약으로도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일재日齋의 글씨는 결구가 원만하고 정돈되었으며 풍채가 유창하고 아름다워 비록 골력이 약간 허약하지만 고상한 운치가 넉넉하다 하겠습니다. 재주와 식견이 빼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누적된 악습에서 물결을 되돌려 홀로 깃발 하나를 세우고서 옛사람과 겨룰 수 있었겠습니까? 완상하면서 손에서 차마 놓지 못하여 이에 몇 마디를 덧붙여 공경하는 뜻을 .. 2023. 5. 22. 백제 창왕昌王의 오리무중한 매형공주妹兄公主 부여 능산리 사지 목탑지 출토 이 석조사리감 전면에는 양쪽 줄에 걸쳐 百濟昌王十三年季太歲在 /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 /는 줄바뀜 표시) 라는 문구가 확인되거니와, 이는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능산리 백제시대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저 문장은 '백제 창왕 13년, 간지로는 정해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뜻이거니와, 이를 통해 이 절을 창건한 대단월이 매형공주임을 안다. 이 절을 창왕이 직접 창건한 것으로 간주하는 글이 많고, 그에 따라 이를 근거로 하는 논설이 부지기에 이르는데 다 볼썽 사납다. 이 절을 창건한 주체는 분명히 '妹兄公主'다. 이 절을 창건한 백제 창왕 13년, 간지로는 정해년은 567년.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연표를 따를 때는 창왕 14년.. 2023. 5. 22. 룩소르의 추억 – 카르낙 신전 by 유성환 이집트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전통문화대학 복원팀과 저는 모두 4개 신전을 방문했습니다. 이들 신전은 모두 지금의 룩소르 시, 고대의 테베(Thebes)에 있습니다. 테베 중심을 흐르는 나일 강을 기준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산 자의 땅인 동안에는 순수하게 신만을 모시는 의례전(儀禮殿: cult temple)이, 태양이 지는 망자의 땅인 서안에는 주신과 사망한 왕을 함께 모시는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이 각각 건립되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방문지는 –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 복원 대상인 신왕국시대 제19왕조 람세스2세(Ramesses II: 기원전 1279-1213년) 장제전인 라메세움(Ramesseum)이었습니다. 라메세움은 당연히 서안에 있습니다. 이어 동안에 위치한 의례전.. 2023. 5. 22. 용산, 한양으로 가는 길목 Yongsan, the gateway to Hanyang 한양의 길목 용산 Yongsan, the gateway to Hanyang 조선시대 용산은 도성 서쪽의 무악산, 오늘날의 안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와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아울렀다. 그 구불구불한 능선이 한강에 이르러 봉우리를 형성하는데 전체적인 형세가 용을 연상시킨다 하여 용산이라 이름 불었다. 건국 초기 용산은 명확히 한양 땅은 아니었다. 당시 한양의 경계는 도성이었다. 다만 수도 한양을 관할한 관청 한성부는 도성과 함께 도성으로부터 10리(약 4km)에 이르는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 관할했다. 용산은 이 성저십리에 해당했다. 도성 밖 한적한 강변 마을이었던 용산에 물길 따라 포구가 발달하면서 삼남三南을 오가는 대로가 용산에서 갈라졌고, 각 지역의 세곡이 용산에서 집결되어 도성 안으로 운반됐다.. 2023. 5. 22. 한 번의 실험으로 끝난 국립박물관 국빈 만찬장 활용 과거의 오늘을 살피다 보니, 1년 전 어제(2022. 5. 20)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환영 만찬이 열린 모양이라, 이 일이 청와대 시대 청산과 더불어 그 만찬장을 어찌할 것인지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켰거니와, 그 논란 복판에 휘말린 데가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반추가 필요하다고 본다. 어느 무렵인가부터 청와대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상징처럼 통용하는 바람에 대통령 집무실이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는 아니해서, 문재인 시대에도 그것을 추진하다가 대안 부재론에 휘말려 가오 상하게도 그런 방침을 스스로 접어야 한 일이 있거니와, 그런 비슷한 공약을 내세우고 당선한 윤석열이 그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생각했음인지, 용산으로 짐을 싸 갔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문.. 2023. 5. 22. 철도병원을 탈바꿈한 용산역사박물관을 찾다 20년 넘는 용산구민이라는 내력도 있을 테고 그것 아니라 해도 이런저런 일로 자주 지나치는 까닭에 저 용산역사박물관이라는 데는 생소함보다는 익숙함이 나한테는 크다. 물론 나한테는 중앙대병원이 익숙하지만 내가 문화재 담당 기자 생활하던 때 마침 그 건물 전체가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까닭에 유심히였다고는 할 순 없지만 눈여겨 보는 정도이기는 했다. 다만 그 자세한 내력은 듣기는 했지만 흘려버리고 말았으니 그러다가 지난해인가 용산 구립 용산역사박물관으로 개관했다 해서 한번은 꼭 들려보리라 하던 차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주말 이틀을 내내 방구석에 틀어박혀 빈둥거리다간 이래서는 아니되겠다 싶어 마침 저곳이 떠올라 조금전 다녀왔다. 내 기억에 이곳은 최초의 용산구립 박물관 아닌가 하거니와.. 2023. 5. 21. 라말여초의 "호족"과 일본사의 "무사단" 우리나라 라말여초에는 "호족"이란 세력이 있어 신라의 지배가 끝나자 한반도 전역에 호족의 세상이 펼쳐졌다. 한국사 라말여초의 "호족"에 상응하는 일본사의 세력은 누구일까? 바로 일본사에서 무가로 발전하게 되는 "무사단"이다. 무사단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 발생하는데 당초에는 귀족들의 보디가드로 출발했지만, 이내 귀족들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무가정권을 수립한다.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 막부로 이어지는 사무라이 정권의 기원이 바로 이 무사단에 있다. 이 무사단은 그냥 몰려다니는 군사조직이 아니다. 무사단 자체가 땅을 차지한 봉건영주가 된다. 헤이안시대 말기에는 지방 영지를 점유하고 중앙의 통제(소위 율령체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무사단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각지에 성립한 무사단이 서로 이합집산하며 싸우기 .. 2023. 5. 21. 이전 1 ··· 495 496 497 498 499 500 501 ··· 1030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