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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714

열렬한 중앙집권에의 찬양가로 흐른 고려거란전쟁 거란 혹은 고려거란전쟁이라는 종래에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소재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일단 후한 점수를 줘야 한다고 본다. 기타 장점이 많거니와, 이런 기회를 빌려 나 또한 어줍잖은 글나부랭이라도 긁어댈 수 있으니 더 고맙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없지 아니해서, 단언하고 전제하지만, 나는 작가적 상상력만큼은 최대한 존중하되,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문제적 시각도 적지는 아니해서 개중에서도 한두 가지만큼은 지적하고 싶다. 이 드라마는 시종일관해서 유쾌통쾌상쾌를 지향하는 사극이라, 그 유쾌 통쾌 상쾌는 거란이라는 당대의 거인하고 맞붙어서도 고려라는 작은 나라가 굴하지 아니하고 궁극으로는 승리를 쟁취한 이야기를 강감찬과 현종을 중심으로 시종일관해서 이야기한다는 .. 2024. 2. 25.
[귀주대첩] (15) 왕 노릇 11년 만에 왕이 된 고려 현종 왕순 국교 정상화라는 개념이 전근대랑 현재는 조금 다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상대국에 상시로 주재하는 전문 외교관이 있느냐 없느냐다. 한국사의 경우 상시 외교관 주재 제도 자체는 구한말에 가서야 가능했다. 그 이전에는 종주국이라 삼는 중국 역대 왕조에 이런 제도 자체가 있을 수도 없었으니, 때마다 사신을 왕래하는 일이 공식 외교관계의 형식이었다. 이를 흔히 조공 책봉 관계라는 말로 치환하고는 하지만, 일본 동양사학에서 유래한 이 개념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층위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3차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고려와 거란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는 말을 앞서 했거니와, 전쟁 중에도 두 왕조는 꾸준히 사신을 왕래했다. 다만 하도 치고받는 .. 2024. 2. 25.
AI가 살려낸 화랑세기 필사자 남당 박창화 화랑세기를 필사한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 선생이라. 한성사범학교 출신으로 식민지시대에는 일본 황실 도서관인 서릉부書陵部에서 촉탁으로 오랜 기간 일했음이 그 자신의 증언은 물론이고, 그 직원 명부에서도 확인된다. 그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돌리고, 기간 알려진 사진이라 해서 흔히 돌아다니지만, 이는 실은 내가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이라 그의 손자 고 박인규 선생이 할아버지 논집을 낼 적에 그 책에다가 공개한 것이다. 다만 하도 원본 상태가 좋지 아니하고 저래서 오늘 생각난 김에 AI 도움을 받아 증폭했으니 이것이라, 그런 대로 볼 만하다. 얼굴만 따로 누끼를 땄으니 물론 AI 기술 적용은 원본 훼손 혹은 왜곡 우려가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인물 사진은 설혹 그런 면이 있다 해도 훨씬 나은 .. 2024. 2. 25.
각주, 화랑세기를 피해가는 한 방법 나는 물건 감정과 전문가는 다르다고 본다. 미술사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예컨대 도자기가 있다. 나는 도자기 감정을 잘 한다 해서 그 사람이 뛰어난 도자기 연구자로 보지는 않는다. 이 논리대로라면 가장 뛰어난 도자기 연구자는 그 진위를 감정하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인사동 같은 데서 일하는 골동품 취급하는 사람들이다. 골동품 취급하는 일과 도자기를 연구하는 일은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하지만 연구자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으니, 무엇인가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단안해야 할 때는 서슴없이 해야 한다. 그것이 잘못된 감정일지라도 말이다. "1989년 부산에서 발견된 이른바 화랑세기에는 김흠돌 모반의 전말이 확인된다. 그러나 아직도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의가 진행 중.. 2024. 2. 25.
[귀주대첩] (14) 또 하나의 제국, 승리가 초래한 변화 귀주대첩이라는 고려의 완승, 거란의 참패로 끝난 제3차 고려거란전쟁은 잦은 전쟁과 아슬아슬한 평화로 점철한 두 왕조 관계를 재편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 또한 지형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로부터 거란이 망하기까지 100년간 이른바 평화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거란의 팽창도 이 전쟁과 더불어 끝이 났다. 정복왕조 거란이 정복을 멈췄다는 것은 현상 유지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위대한 팡파르였다. 물론 크고 작은 충돌은 없지 않았고, 거란 내부 또한 이런저런 반란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지만, 종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위대한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이 평화의 시대는 고려가 피로써 이룩한 것이었다. 거란은 이 참패를 숨기고자 하고 분식하려 했지만,.. 2024. 2. 25.
한강 용산방수제와 한강교, 을축년대홍수의 유산 한강 방수제와 한강교 준공 한강은 해마다 그 연안에 피해를 입힌 바가 많은 대하천 중 하나로, 특히 경성에 근접한 관계상 일찍이 그 개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25년(大正 14)에는 미증유의 홍수로 용산·뚝섬纛島·영등포 등 연안의 피해가 실로 막심했다. 그리하여 1926년(大正15) 이후 3개년 계속사업으로서 220만 원의 예산으로 용산의 방수제防水堤, 1927년(昭和 2) 이후 120만 원의 공사비로 한강교漢江橋의 가설 공사에 착수했다. 1929년(昭和 4)에 둘 다 준공되어 9월 18일 낙성식과 도교식渡橋式을 거행하여, 경성 교외에 훌륭한 경관을 더하게 되었다. 방수제는 신·구新舊 용산을 둘러싼 것으로 총연장 8,000m, 한강교는 총연장 441.6m, 유효 폭 9.1m에 달하고 있다. [636]..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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