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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탈북자: 몇개의 단상 최근 북한과 탈북자를 보고 드는 생각을 써 본다. 1. 언젠가 북한의 역사를 유심히 보면 조선을 이해할 단초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썼다. 북한에서 배급제가 무너지고 장마당 경제가 일어나는 과정은 아마도 조선 전기의 과전법 체제가 붕괴하고 시장경제의 맹아가 분출하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경우 조선 못지 않은 폐쇄 경제이므로 지금 북한이 도달한 장마당 경제 수준이 조선시대 시장경제 모습을 상당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농업에 기반하고 딱히 뭐 경쟁력 있는 산업이 없는 상태에서 바깥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동맹 없이 고립되어 버리면 도달할 수 있는 "시장경제" 모습은 딱 지금 북한 정도가 최고점이라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이 최고점에 거의 근사하게 도달.. 2023. 3. 20.
고려 500년 부수도 남경, 서울 종로에서 처음 드러난 고려 흔적 서울 종로 공사장서 고려시대 추정 유적 발견…"공적 건물인 듯" 깨진 기와에 '승안 3년' 글자 새겨져…"서울서 이 정도 규모 발견은 처음" 문화재청, 지난주 전문가 검토 회의…인근 공사장서도 유적 확인돼 주목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서울의 한 건물 신축공사 현장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되는 건물터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확인됐다. 건물의 기초가 되는 축대, 기단(基壇·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 등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과거 어떤 용도로 쓰였을지 관심이 쏠린다. 서울 종로 공사장서 고려시대 추정 유적 발견…"공적 건물인 듯" 깨진 기와에 ′승안 3년′ 글자 새겨져…"서울서 이 정도 규모 발견은 처음"문화재청, 지난주 전문가 검토 회의.. 2023. 3. 20.
비봉에서 조망하면, 진흥왕시대 신주新州 혹은 북한산주北漢山州 주치州治는 구기동 일대! 빛 좋은 개살구..아버지는 부자지만 본인은 정작 청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장성 독거가 천지 사방 서울을 휘젖는 중이라, 그 일환으로 북한산 기슭을 휘젖는 중이라 좀 전에 전화가 왔는데 윙윙 대는 배경음 딱 들으니 비봉이었다. 비봉에 서면 그 특유한 소리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비봉이라 했다. "첨 아니슈? 비봉비가 진흥왕에 의한 유교적 왕도정치 개소리라는 거 딱 느껴지지 않수?" "두 번째요" 웬일로 그짝에서 전화질인가 했더니만, 느닷없이 북한산주 주치州治 문제를 들고 나온다. 그 아래쪽에 장의사며 하는 신라시대 전설 혹은 역사가 서린 곳이 적지 아니해서 심산으로는 그 아래 구기동 일대 어딘가에 북한산주 주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미쳤다고 순수비를 비봉에다 세웠겠소? 그 아래쪽이 주치였으니깐.. 2023. 3. 20.
관관저구 군자호구 매그놀리아 서울이 북쪽이니 아무래도 남녘에 견주어 더디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양 지바른 곳에선 목련이 터지기 시작했다. 꽃은 교배다. 나 교배하고 싶단 피력이다. 봄은 시경 이래 언제나 그랬다. 물수리 꾹꾹 우는 계절은 번식이었다. 사람 역시 그러해서 그 소리 따라 관관저구 군자호구를 찾아 나물 광주리 들고 들녘으로 갔다. 2023. 3. 19.
고고학이 그려낸 발해 강역 1천100여곳 유적으로 본 발해의 영역…'발해유적총람' 발간 Heritage / 김예나 / 2023-03-14 16:56:10 정석배 교수 등, 북한·중국·러시아 지역 발해 관련 유적 총망라 https://m.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68183193390 1천100여곳 유적으로 본 발해의 영역…′발해유적총람′ 발간(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발해(698∼926)는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이어지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뤘던 고대국가다. 9세기에는 동쪽의 융성한 나라m.k-odyssey.com 교과서 같은 데를 보면 고구려 발해 강역이라 해서 현재의 지도에 얹은 그 강역도라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은 어느 특정한 시기의.. 2023. 3. 19.
오늘 글의 보유: 해방직후 서울대의 상황 필자가 쓴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해방직후 서울대는 제대로 된 대학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서울대가 경성제대 후신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서울대에 경성제대의 교원과 연구, 교육전통이 해방이후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해방이후 경성제대는 완전히 빈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집으로 이주해 들어간 조선인 교수들은 출신 배경도 다양했다. 이들이 당시 조선에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적자원 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경성제대가 해방이후 문을 닫게 되었을 당시, 이 대학에는 불과 한달전에 조교수로 임명된 조선인 교수가 딱 한 명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로 서울대 교수로 들어간 분들은 출신 배경이 정말 다양해서, 의대의 경우에는 경성의전, 경성여의전, 세브란스의전, ..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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