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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331

일제시대 족보의 범례 요즘 나오는 대동보들 보면 편집위원회를 만들고 그 아래에 정관계 출세한 이들을 전부 집어 넣어 대동보의 위용을 과시하지만,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대동보를 내는 이들은 문중의 영감님들로 신분을 유학, 첨지, 승지, 등으로 적어놓았다. 물론 일제시대 후반은 모르겠고 일제시대 초반에 나온 족보의 이야기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어느 집안의 족보를 보면대략 60년, 2세대 간격으로 파보를 내는데첫번째 족보는 1600년대에 나오지만 그 집안 파보는 1800년에 한번,두번째 파보는 1870년 경 한번, 그리고 세번째 파보가 1920년대 (일제시대).마지막 파보가 1990년에 나오는.것이다. 여기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1870년대 족보까지도 서자기록은 그대로 적어 둔데 반해 1920년대 족보로 넘어가면서 서자를 더이상.. 2025. 10. 8.
노비 빼고 서자 빼면? 조선은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까지도 노비 숫자가 전체 인구 절반에 육박할 판이라 노비에 대해서만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데문제는 이 노비 빼고 평민 빼고 남은 양반의 절반이 또 서자였다는 데 있다. 이 시기 호적을 보면정말 군역을 담당할 사람, 세금 낼 사람이 몇 없다. 왜 아니겠는가?많은 사람이 양반집 노비라 세금을 낼 리도 없고 서자들도 아이고 우리가 서자네 하면서 세금을 내겠는가?이들도 무슨 수가 있더라도 양반 코스프레하면서 세금 회피를 주도했다. 따라서 남은 건 이도 저도 아닌 평민들뿐인데이 사람들 숫자가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이 재수 없이 걸린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그중 엄청 많은 예산을 이번에는 국방비로 쓴다. 경복궁을 왜 임란 이후 수백년간 중건을 못했겠는가. 나라에 돈.. 2025. 10. 8.
만든 목적이 달랐던 족보들 우리나라 20세기 대동보의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고 필자는 누차 쓴 바, 19세기 후반까지도 우리나라 족보들 중에는 서자를 서자라고 그대로 쓰거나 아예 서자는 족보에서 뺀 족보들이 꽤 있었다. 필자가 조선시대 족보를 전부 확인하지 못했으니 백프로 장담은 할 수 없다만 필자가 확인한 족보들 중 상당수는 그랬다. 이 족보들은 그 자체 공문서의 성격이 있어 이 족보에 실린 사람들의 사정 등은 봐주지도 않은 것이 서자인지 적자인지 헷갈리거나 남은 기록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꼼꼼히 이를 검증하여 사실 여부를 적어 놓기까지 했는데, 예를 들어 어떤 문서에 서자로 적혀 있으면이를 악착 같이 찾아 굳이 쓸 필요도 없는데 이런 문서에는 서자로 적혀 있다고 굳이 한귀퉁이에 적어 놓는 것이다. 글의 마지막에는 "아마도 잘못된.. 2025. 10. 6.
고쳐 쓰는 것보다 혁명이 더 쉬웠던 조선 조선이라는 나라. 19세기 호적 하나만 봐도 완전히 누더기다. 편법과 각종 불법이 횡행하고 없어져야 할 특권과 말도 안되는 관행이 그대로 남아 이런 호적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혁명 후 전 국민이 일시동인하나의 호적체제에서 관리되는 나라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조선이라는 나라. 분명히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들끓는 멜팅 폿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만, 변화가 너무 늦었고, 새 시대를 담기에는 나라가 너무 후진 상태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고쳐 쓰는것 보다는 혁명 외에는 답이 없는 나라였다는 점은 틀림없다. 2025. 10. 5.
적서간의 라이벌 관계 물론 적자가 생각하면 서자는 상대도 안되는 부류였을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또 어찌 생각하면 적자가 볼 때 서자는 잠재적 위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보면, 18세기 이후가 되면 적자보다 서자가 숫자가 더 많아 지는데 사람이라는 것이 적자가 서자보다 항상 똑똑하고 잘나게 나올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서자와 적자를 똑같이 대우한다는 것은 결국, 집안 재산 분배에 있어 경쟁이 심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가끔 서자 자손이 과거에 장원을 해버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던 것을 보면, 서자들이 금고가 풀려 과거를 마음대로 보고 경쟁하게 되면이는 곧 적자들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전자와 서자의 관계를 지나치게 협조적 내지는 순종적으로 보는 듯 한데, 상식적으로.. 2025. 10. 5.
그 많은 서자 자손들은 어디에? 위 그림은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34_0020_0020_0010_0020#ftid_131) 우리역사넷(2) 서얼인구의 양적 증가와 질적 변화  조선시대 서얼의 개념 속에는 양반의 첩자녀와 그 자손뿐만 아니라 부계가 사족이더라도 모계쪽의 어느 한 가닥이라도 사족이 아닌 혈통에 연결되어 있contents.history.go.kr여기서 받아왔다. 조선시대 서자 숫자는 최소한 적서 숫자와 대등하거나 이보다 더 많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시대 반가에서 첩을 두는 것은 전혀 불법이 아니었던 데다가그 사이에서 나오는 서출은 서양에서 말하는 사생아와도 달랐다. 적법한 자손이지만 모계 때문에 차별받는 .. 2025.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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