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족보 이야기233 조선후기- 광작운동은 없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시대 호적은단순히 호구의 구조 뿐 아니라 재산상태까지 엿볼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호적을 유심히 보면, 17세기에서 19세기로 가면서 일부 조선후기 연구자들이 주장하듯이광작운동에 의해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이전에는 양반의 노비사역에 의해 운영되던 농장이 해체되어 19세기에 이르면 매우 작은 단위의 소농민이 향촌의 대부분을 형성하는 것을 알 수 있다.이는 호주와 처자, 그리고 소수의 노비 (1-2명)을 거느린 작은 단위의 가구인데이전에는 많은 수의 노비를 데리고 직접 농사짓던 양반들이이 시기에 이르면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데리고 있어 봐야 생산성도 높지 않고 골치만 썩던 노비사역을 19세기가 되면 걷어 치워 버리고, 독립 소농민들 .. 2025. 8. 21. 닭고기를 내어 매를 주어 기르다 앞서 조선시대에는 꿩 대신 닭,닭이 꿩의 보조적 역할이라 썼었는데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쇄미록에 나와 있는 바, 닭을 잡아 매를 기르는 장면이다. 오희문 집에서 매를 얻어 길들이고자 할 때 집안의 닭을 잡아 매에게 먹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매를 먹일 수단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매를 일달 길들여만 놓으면 매가 꿩 사냥을 해서 거둬들일 테니결국 이익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조선시대에 닭은 꿩의 보조적 수단이었던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물론 닭은 이처럼 꿩의 보조적 역할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고, 닭을 기르는 이유 중에는 달걀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꿩은 육고기는 얻어도 알을 얻을 수가 없으니알이야 말로 꿩이 갖지 못한 닭의 최대의 장점이 되겠다. 각설하고, 오희문 집에서 닭을 .. 2025. 8. 21. 도주보다 더 무서운 사보타지 노비사역이 주가 되어 있는 당시 상황에서노비가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터-. 오희문 선생의 쇄미록을 보면 슬하의 노비 관리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바, 사실 이 양반의 고민은 시도때도 없이 도망가는 노비를 잡아오는데 있지 않았다. 그에게 정말 무서운 것은 노비의 사보타지였다. 그의 일기를 보면 밭 매기 추수하기 타작하기 등에 노비에 품팔이 인력까지 사서 내보냈는데도 이들이 제대로 일을 안해 제때 마치지 못해 씨를 파종을 다 못끝내거나 수확한 곡식을 제때 못거둬들여 쥐가 다 먹거나 썩어버린 기록이 부지기수다. 이는 노비 사역이 지주-전호제로 이행하는데 있어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우리나라 외거노비들은 주인의 사역에 동원되지만한편으로는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 2025. 8. 21. 실학은 근대의 선구가 아니다 필자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썼지만우리나라 실학은 근대의 선구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자리매김했는지 모르겠지만이들은 딛고 있는 사회적 기반도 그렇고그 이데올로기 자체도 근대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자리 매김한 것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 맹아, 근대의 맹아의 시점으로 보고, 광작운동, 자본가적 차지농 등 내재적 발전의 시점으로 설정해 놨기 때문에그에 걸맞는 근대적 사상의 단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둔갑시켜 장식해 놓은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 여러 번 글을 썼듯이필자는 근대의 선구는가짜양반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실제로 근대의 문을 열어젖혀야 했을 사람들인데이 계층 자체가 성립된 시기가 너무 늦어19.. 2025. 8. 18. 몰락양반과 가짜양반 19세기 조선사회. 마을마다 유학을 칭하는 양반호가 압도적인 숫자가 되어 있었고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몰락양반"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몰락양반"이 그렇게 흔했을까? 조선시대에 가지고 있던 재산 관리를 못하고 벼슬도 떨어져 양반이었던 사람들이 양반이 아닌 처지로 굴러 떨어진 상황이 꽤 많았을 듯하지만, 호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양반 자손들은 아무리 살림이 어렵고벼슬을 하지 못해 부, 조부, 증조부 직역이 학생이 되어 있어도여전히 호적상에서는 양반호로 잡혀 있었다. 몰락양반이란 것이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조선의 19세기에 늘어났다는 소위 "잔반"혹은 "몰락양반"이란, 원래 양반이 아니었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몰락양반"이라 주장하는 사람 상당.. 2025. 8. 18. 구한말의 주인공은 노비 후손이다? 필자는 이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도발적인 말을 하는 이유는 이렇다. 18세기 초반까지도 마을마다 절반 가까이 되던 노비사역이 18세가 후반을 거쳐 19세기가 되면 거의 사라지고 각 마을은 자기들이 양반 후손이라 주장하는 소농민들로 재편된다. 그렇다면 이전 노비는 어디로 갔겠는가, 당연히 양반이라고 주장하는 소농민들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숫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연 19세기 후반, 구한말에 들어가면 얌전히 있었을 것으로 보는가? 19세기 후반 활동하던 사람들 상당수, 심지어는 중앙정부에 발탁되어 들어간 사람들 중에도 이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으리라 보는것이 옳지 않을까.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에서 구한말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는 우리 조상이 100.. 2025. 8. 18.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3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