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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233

19세기 말 군수하던 김부장 김낙수 이야기 필자가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광고한 바 60세 이후의 작업으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대개는 구한말) 검안자료에 대한 의학적 분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자료는 작성자가 당시 군수들이다 보니, (조선시대에는 사망자 검안을 해당 지역 군수들 책임하에 했다)이 사람들이 남긴 보고서를 내가 읽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구한말 관료하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 딱 고부군수 조병갑이라아는 것도 없는 놈이 군수하며 한 탕 해 먹으려고 가렴주구에 혈안이 된 부패한 조선 말 관료를 연상하는데, 막상 이 보고서를 보다 보니 왠걸구한말 우리나라 군수들은 의외로 매우 유능하고 부지런했다.보고서를 보면, 살인사건에 대한 제대로 됨 보고서를 남기기 위해대충 적지 않는 것을 익히 볼 수 있었던 바 이 사람들은.. 2025. 12. 1.
세차하는 김부장은 2025년 서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김부장은 19세기 말 서울에도 있었고, 1905년 을사조약때 대구에도 있었으며1910년 경술국치때 광주에도 있었다. 구한말 한국 사람들이 모두 독립운동가였다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대부분은 그 당시 김부장이었다. 마누라 아들 먹여 살리려고 박박기는 아저씨들 천지였다는 말이다. 구한말 대한제국 관리의 50프로가 경술국치 뒤에관두지 못하고 총독부 하급관리로 그대로 남았다. 그 사람 모두가 친일을 하자고 그랬겠는가. 그안에는 김부장이 자기 짜른 회사에 들어가 세차하듯이 마누라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하급관리로 강등되면서도 남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김부장은 왜 공감하면서 구한말 우리 조상들은 공감을 못하는가 하면, 김부장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나와 비슷한 인생이니 공감하면서도19세기 말은 내가 .. 2025. 12. 1.
호적은 문란해진 것이 아니다 타협이 많아졌을 뿐 우리나라 19세기 삼정문란. 이 삼정 문란 자체를 모두 따져봐야 하겠지만그 중 하나로 나오는 예가 바로 호적의 문란.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18-19세기 호적은문란해 졌다고는 해도 그것이 무슨 없는 것 억지로 창작해낸 것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의 이해가 부딪혀. 충돌했을 때 이를 타협하는 방식으로 뭔가 이색적인 기록을 남기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보자, 영조 때 균역법이 1850년인가 시행되었는데이 법은 복잡하게 볼 것 없이 지금까지 군포 2필 내는 평민들 부담을 1필로 줄여준다. 이것이다. 문제는 그러면 그렇게 줄어드는 군포를 어디서 충당하느냐 이것인데, 똑똑하디 똑똑한 영조대왕이양반이 내야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양반들에게 군포를 내라고 했다가는 당장 자신.. 2025. 11. 26.
21세기의 대동보는 어떻게 해야 살아 남는가 족보라고 하면 케케묵은 고리짝 유물처럼 인식되는 세상이지만,사실 지금 족보, 그러니까 집집마다 있는 문중 대동보라는 물건은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아주 빠른 집안이 15세기 경, 좀 역사가 있는 집안도 16, 17세기 경이나 되야 족보가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족보라는건 아는 사람 다 적고문중 후손 수단도 제대로 안 되는 터라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족보의 꼴을 갖추기 시작하는건 대략 18세기 중엽 부터인데 이것도 잘나가던 집안이나 그렇지 19, 20세기에야 대동보를 꾸린 일족도 수두룩하였다. 19세기까지도 우리나라 대동보는 서자는 서자로 표시하고 아예 빼버리는 집안도 있었던 바, 족보에 서자 적자 표시 안하기 시작한 것이 일제시대부터이고,깐깐하게 따지던 절차도 없이 문중 후손이라 하.. 2025. 11. 26.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일, 무사를 박살낸 근대의 일본 농민들 일본은 다이라씨 정권 이래 무려 600년 간 무사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도요토미가 농민과 무사는 절대로 서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선을 그어버린 이래 농민은 농민, 무사는 무사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가 되고 메이지유신이 가까와지자 이전까지 무사라면 납작 업드리던 평민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전 같으면 엄두도 못낼농민의 자식들이 사무라이처럼 칼을 차고 다니며사무라이 흉내를 내는가 하면 (신센구미 상당수는 농민의 자식들이었다)아예 저 위 그림에 있는 기병대란잡병부터 일반 농민까지 이전 같으면 군대 병역을 지지도 못할 계급의평민 자식들을 깡그리 긁어 모아 기병대라는 이름을 붙여 두었는데, 이 기병대가 막부군을 격파해 버렸다.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할 것이다. 농민의 자식들이 최고급 무사로 무장한 막부군.. 2025. 11. 25.
민족이나 민중으로 정의하기 너무 복잡한 구한말 우리 구한말은민족이나 민중이라는 키워드로 정의하기에는너무 복잡한 사정이 있다. 구한말 한국인 100명은100가지 사연이 있다는 말이다. 개인이 성립하는 역사가 100개가 있다는 뜻이다. 이 복잡한 사정을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키워드로 쾌도 난마 정리하고 써내려간 것이 한국 근현대사이다. 우리 구한말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디테일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허겁지겁 밖으로부터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그 시대를 꿰 맞추다 보니 정작 점점 디테일이 추가되자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이다. 필자가 계속 주장한 바 동학운동을 "동학농민전쟁"이라 불러버리는 이런 난폭함. 이런 정도의 디테일 가지고는 이 시대의 격변을 제대로 분석 불가능함은 물론, 21세기 한국의 자본주의, 한국의 중산층, 한국의 근대화의 기원도 모두 설명 불가능이.. 2025.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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