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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6)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소지왕비 앞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삼국사를 논할 때 모두가 동국통감을 읽었다 했거니와, 그런 까닭에 신라사를 논할 적에 이 사금갑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그네들 모두가 내전분수승과 불륜하다 들켜서 복주된 비처왕 곧 소지왕의 여인을 왕비로 보았지, 후궁 중 한 명인 궁주宮主로 보지 않았다.왜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에서는 궁주라 했지만,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는 아예 왕비로 못을 박은 까닭이다.나아가 이 사건이 발생한 날짜가 삼국유사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정월 15일로 이해한 것 또한 절요와 통감에서 비롯한다는 말을 했다.조선후기 안정복이 동사강목이라는 대작을 기획하면서 소지왕 10년, 서기 488년을 기술하면서 아예 저 사건으로 복주된 여인이 당시 소지왕비 선혜善兮라고 못을 박은 까닭이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왜 .. 2025. 1. 29.
[외치이야기-17] 미라의 저주? - 2 미라의 저주는 외치의 경우에도 유명하다.외치의 발견 및 조사와 관련된 7명이 짧은 기간 동안 모두 비명에 사망했기 때문이다.이를 외치의 저주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간단히 살펴보자. 참고로 외치가 발견된 것은 1991년이다.   • Rainer Henn. 64세에 사망. 인스부르크대 법의병리학자. 당시 외치를 조사하던 책임자였다. 초기의 외치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학회 참석차 이동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 (1992년). • Kurt Fritz, 52세에 사망. 산악가이드. 외치가 발견되었을 때 얼굴을 처음 확인한 사람이라고 한다. 외치를 알프스 산에서 헬리콥터로 들어 내리는 작업과 관련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눈사태로 사망 (1993년).  • Rainer Hölz, 47세에 사망. 외치가 발견 당시.. 2025. 1. 29.
[외치이야기-16] 미라의 저주? - 1 외치가 순동시대 사람임을 처음 밝힌 콘라드 스핀들러는 비교적 일찍 사망하였다 (2005년).그의 죽음을 미라의 저주와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도 사실 이 일을 하다 보면 꼭 미라의 저주 이야기에 대한 질문을 자주 듣는다. 글쎄. 필자의 기억으로는 지금까지는 미라의 저주라고 부를 만한 일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것 같다.하지만 미라 보고가 워낙 센세이셔널 한 뉴스이다 보니미라와 관련된 언론 보도가 나가는 날은 하루종일 뭔가 뒤숭숭한 것은 사실이다.미라의 저주는 서구사회에도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거리이다. 아마도 미라의 저주에 관련하여 가장 처음 나온 이야기는 투탕카멘 왕릉을 발굴한 카터 발굴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카터 발굴단 사람들은 발굴 직후 비명에 간 사람이 꽤 있다.이를 호사가들은.. 2025. 1. 29.
[외치이야기-15] 사기극 소동 외치와 관련하여 잊지 못할 일은 이른바 “가짜 미라” 소동이었다. 외치의 발견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자 어느 언론사 모 기자는 느닷없이 외치는 사실은 이집트 미라인데 명예와 부를 탐한 사람들이 알프스 산 꼭대기에 이를 옮겨 놓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리고 그 근거의 하나로 “왜 하필 저 유명한 라인홀트 메스너가 그 부근을 그날 어슬렁 거리고 있었는가.메스너가 다른 사람들과 짜고 이집트 미라 하나 산꼭대기로 옮겨 놓은거 아닌가”라는 주장을 했다.  메스너야말로 외치 발견사에서 가장 초연한 입장에 있었던 사람의 하나인데 느닷없이 유탄을 맞은 것이다. 메스너로서는 황당 무계하고 억울한 사건이겠지만 어쩌면 이 사건으로 그는 외치의 저주를 액땜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메스너와 함께 이 주장으로 맘 고생을.. 2025. 1. 29.
[외치이야기-14] 불거지는 소송 외치가 처음 발견되어 인스부르크로 이동할 때까지만 해도이 발견이 순동시대 미라를 발견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이 사건은 평범한 조난자에 대한 사망조사로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조사과정에서 이 사건이 무려 5천년 전 미라일 수도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많은 사건이 터졌다. 그 중 몇 가지 이야기만 해보자.  우선 외치가 유럽 순동시대 미라라는 것이 알려진 후 이 미라가 실제로 엄청난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 후 많은 분쟁이 뒤따랐다.이 미라를 처음 발견한 독일인 부부는 죽을 때까지 미라를 발견한 보상금에 대한 소송으로 세월을 보냈다.  미라를 처음 운반해 간 북 티롤과 남 티롤 지역도 외치 소유권 문제를 놓고 한판 싸움을 벌였다.남티롤 지역 주장은.. 2025. 1. 28.
[외치이야기-13] 순동시대의 유물을 발견하다 인스부르크 대학으로 옮겨진 외치Ötzi는 곧 이 대학 연구진의 조사를 받았다. 이 당시 찍힌 사진을 보면 여느 법의학적 변사자에 대한 조사와 거의 비슷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장소는 평범한 대학 부검실인듯 하고 변사자의 사망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사를 받아야 할 터였다.   인스부르크 대학에 옮긴 시신은 곧 이 대학 연구자들이 조사할 기회도 갖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이 케이스가 단순한 법의학 케이스가 아닐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이때 이 대학 고고학부 교수 콘라드 스핀들러 (Konrad Spindler)는시신과 함께 발견되어 운반된 유물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때 특히 그는 외치가 발견된 곳에서 함께 수습한 유물 중 순동 도끼를 보고 놀랐다.   자신이 아는 한 이런 종류의 유.. 2025. 1. 28.
[외치이야기-12] 인스부르크로 옮겨진 시신 정상 부근에서 발견된 이 불행한 사망자를 끌어내리기 위한 작업은 곧 시작되었다.도대체 언제 사망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행정 절차상 이 작업 책임자는 당연히 법의관이 맡게 되었다. 몇 명이 함께 올라가 외치 주변 얼음을 녹여가며 조심조심 그를 빙하에서 들어냈으며 외치 주변에 혹시 이 사람의 유류품으로 볼 만한 것이 없는지 샅샅이 찾았다. 이때 그 주변에서 찾아낸 유물 위치가 그림에서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다.그림에 검게 표시 된 것이 바로 외치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이 유물은 발견 당시도 그렇지만 나중에 복원한 모습을 보면 요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왠 구리도끼가 나왔고 화살대로 보이는 것을 주웠다.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도 있었다.어쩌면 이 케이스는 법의학 케이스가 아니라.. 2025. 1. 28.
죽 쑤어 개 줄 세계유산위 유치 보통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거나, 그 수뇌인 청장이 바뀌면 구더기가 들끓기 마련인데, 그 구데기 중에 단골이 유네스코다. 이 유네스코 구데기들은 보통 달콤한 말로 새로운 정부, 새로운 수장을 유혹하게 되는데, 그 유네스코 구데기 중 구찌가 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세계유산위원회 개최라는 달콤한 묘약이다.이들은 한국이 이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개최해야 하며, 그럴 때가 되었다고 유혹한다.그러면서 우리가 유네스코 분담금 규모 몇 위니 하면서 그럴 듯한 말로 우리가 유네스코 회의를? 하는 갖은 말로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고 발라댄다.보통 이런 유혹에 혹하다가 제대로 정신 박힌 이라면 이내 단념하고 마는데, 그 대표하는 케이스가 유홍준이었다.유홍준 역시 한때 그런 유혹에 넘어가 우리가 세계유산위 개.. 2025. 1. 28.
12살 구두약 공장 노무자 찰스 디킨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겨우 12살이었을 때 그의 인생은 극적이고 가슴 아픈 전환을 맞이했다.그의 아버지 존 디킨스John Dickens는 빚을 갚지 못해 마셜시 채무자 교도소Marshalsea Debtors' Prison에 수감되었다.이 일로 어린 찰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 템즈 강 근처 구두약 제조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공장은 암울한 곳이었고 디킨스의 일은 몇 시간 동안 검은 색 라벨을 붙이는 것이었다.일은 지루했고, 환경은 가혹했으며, 급여는 물론 턱없이 부족했다.찰스처럼 총명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에게 그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는 버림받고 굴욕감을 느꼈고, 이때의 기억이 남은 생애 동안 그를 괴롭혔다.그는 나중에 .. 2025. 1. 28.
[외치이야기-11] 외치의 발견 이제 외치가 발견된 당시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외치 할아버지는 지금이야 볼차노 시내 남티롤 고고학 박물관에서 영면하고 계시지만이 분은 원래 이 도시에서 발견된 것은 당연히 아니고볼차노에서 가까운 알프스 산 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 해발고도가 무려 3,210 미터나 되는 고지대였다. 때는 1991년 9월. 이때 독일 등산객 부부 두 분이 (Hemut and Erika Simon 부부)그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평소에 안가던 길을 거쳐 내려가기로 맘을 먹었다.이들은 사람들이 거의 평상시 다니지 않는 그늘지대를 거쳐 내려오기 시작했는데거기서 반쯤 녹아 있는 빙하에 엎어져 죽어 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Simon 부부는 이 사람이 등반 중 사망한 사람이라 생각했다.앞.. 2025. 1. 28.
[외치이야기-10] 티롤 이야기 앞에서 외치가 모셔져 있는 볼차노는 남티롤의 수도라고 했지만, 원래 티롤은 전체가 하나의 문화적 행정적 단위로 오스트리아 쪽에 들어가 있는 티롤의 주도가 바로 인스부르크다. 인스부르크는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도시이지만, 사실 20세기 전만 해도 이곳은 오스트리아 남부, 이탈리아 북부를 아우르는 전체 “티롤”지역의 수도와 같은 도시였다. 여기서 남티롤이 분리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면서 남티롤의 볼차노가 그곳이 주도가 되고 북쪽 오스트리아에는 인스부르크가 계속 남아 주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티롤은 원래 남독일계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독일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간주되던 곳이다.그런데 1차 대전 이후 알사스-로렌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1차대전.. 2025. 1. 28.
[외치이야기-9] 라인홀트 메스너 외치 이야기에는 세계적인 등산가가 관련되어 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친숙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사람이다.  사실 전문 등산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산악인 이름을 안다.  내 또래 사람들은 아마 1977년 고상돈 씨가 에베레스트에 올라 전국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등반대가 성취한 업적은 물론 대단한 것이었다.이때 한국등반대가 에베레스트를 어떻게 올랐는가 하면등반가가 무더기로 몰려가 목표가 되는 산에 여러 개 중간 캠프를 만들어 개미떼처럼 이곳에 차곡차곡 식량과 장비를 수송해 올리고 마지막 정상 등반대가 최종 캠프에서 이를 이용하여 정상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한국대의 창안은 아니고 그 당시까지 전세계 모은 알피니스트들이 고산을 공략하는 방법이었.. 2025. 1. 28.
[외치이야기-8] 알프스 빙하 이제 알프스 빙하 이야기를 좀 해보자. 알프스에는 빙하라는 것이 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알프스 고산지대에 쌓여 있는 눈과 얼음이 그 무게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수 십년에 걸쳐 산 아래로 서서히 밀려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산사태처럼 갑자기 산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수십년에 걸쳐 서서히 이동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알프스 산 꼭대기 만년설 지대에서 사망한 조난자들이수십년 후에 산 아래로 밀려 내려와 발견되는 경우가 있는데이는 빙하의 이동 때문이다. 외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만년설과 빙하의 이야기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   *** previous article ***  [외치이야기-7] 알프스의 삼대 북벽 [외치이야기-7] 알프스의 삼대.. 2025. 1. 28.
[외치이야기-7] 알프스의 삼대 북벽 알프스 하면 빼 놓을 수가 없는 것이 알피니즘인데, 우리나라도 이 알피니즘의 세례를 근대화 과정에서 많이 받았다. 한국의 경우 20세기 이전 산이라고 하면 절에 올라가거나 아니면 금강산 유람, 명산 유람 정도의 이미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일제시대부터 알피니즘에 혹닉한 알피니스트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2000년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산가들이 한국에서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알피니즘에 입각해 등산하는 이들을 북한산 인수봉에 가면 볼 수 있는데이 인수봉에는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보다 어렵게 올라간다는 머메리즘에 입각하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암벽등반로가 빽빽하게 나 있다. 알프스 역시 마찬가지로-. 관광객들이 쉽게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산들도어렵게 올라가야 하는 암벽등반로가 .. 2025. 1. 28.
[외치이야기-6] 알피니즘 외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이야기를 해두어야 할 내용들이 있다. 첫 번째는 이 지역 산악 지형의 특성과 그에 관련된 문화다. 이는 외치가 발견될 때까지의 정황,그리고 그 이후 여러가지 조사를 통해 외치와 관련된 일이 밝혀지기까지의 상황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미리 이야기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요즘은 유럽 곳곳 한국인의 발길이 안 닿는 곳이 없어 알프스도 예외는 아니다. 알프스 하면 스위스를 떠올리고 특별히 잘 못 된 내용은 아니지만한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자연적 경계로 중국과 국경을 나누고 있듯이 이탈리아로 보자면 알프스는 그 나라의 북쪽 자연 경계에 해당하는 측면이 있다. 이탈리아 북쪽 경계를 이루는 알프스는 서쪽부터동쪽으로 프랑스, 독일, 스위스, 리히텐스타인, 오스트리아.. 2025. 1. 28.
왜 상업출판이 흥하면 활자가 사라질까? 동아시아에서 왜 상업출판이 흥하면 활자가 사라질까? 아마도-. 활자인쇄를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활자갯수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한자를 기반한 활자는 책 한 권 인쇄하는 데 필요한 활자 숫자가 만만치 않아 처음 투입해야 하는 자본이 서양의 경우보다 더 높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찍어야 하는 부수가 충분히 확보되어목판으로 인쇄해도 이윤을 낼 수 있는 수준의 출판시장이 되면, 목판으로 넘어가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본다. 필자가 보기엔-.동아시아에서 책을 만드는 방식은 필사에서 활자인쇄, 목판인쇄 등 다양한 방법이 있었지만 이 세 가지 방식이 어느 하나에서 다른 쪽으로 순서대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만드는 책의 페이지 분량, 찍어내는 책의 부수 등에 따라필사본, 활자본, 목.. 2025. 1. 28.
상업출판이 흥하면 활자는 사라진다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에서 활자의 보급은 책값의 저하를 가져왔다. 조선에서 임진왜란 중 일본으로 도난 당한 활자-. 이 활자를 기반으로 일본은 임란 후 처음으로 찍어낸 책은 필자가 아는 한 조선의 활자를 기반한 활자본-. 그런데 정작 에도시대 상업적 출판이 발전하면서 임란후 전해진 활자 인쇄는 사라지고 목판인쇄가 이를 대체한다. 조선에서 활자인쇄는 분명히 목판인쇄보다 싸게 먹혔을 것인데, 그래서 활자인쇄가 계속 살아 남아 조선후기까지도 버텼을 터인데 일본에는 임란 이후 처음 반짝하다가 목판인쇄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이거다. 가격 경쟁력이 있던 활자인쇄가 그 메리트를 상실하고 목판보다 가격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왜일까? 독자층이 급증하고 화폐경제의 발달로 찍어내는 책 부수가 목판으로 찍어내도 충분히 가격.. 2025. 1. 28.
육국사, 고려실록, 구삼국사 우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동문선 기타 등등국보로 등재된 거의 모든 책들이 인출되어 나온 것이다 보니 인쇄본에 대해 좀 무감각해지는 감이 없지 않은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의 경우 헤이안시대까지의 역사를 담은 소위 육국사 모두 필사본으로 에도시대 이전까지 그 상태로 내려왔다. 목판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고려시대에 있었다는 실록. 임진왜란때까지 경복궁에 보관하다가 전란 당시 다 태워먹은 것으로 되어 있다만이게 무슨 인출본일 리가 없다. 필사본이었을 것이다.일본의 경우 육국사 중에 일본서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말이 역사서지 이건 전부 실록이나 다름없는 기록들인데전부 필사본이었다. 고려실록도 딱 한 부, 필사본이었음은 당연한 이아기겠다. 삼국사기 이전에 있었다는 구삼국사. 인출된 것일까.. 2025. 1. 27.
금속활자의 경제학 금속활자의 출현은 경제적인 문제였을 것 같다. 목판으로 뭔가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 적은 부수를 싸게 인출해 낼 방법으로 활자인쇄가 성행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목판 인쇄에서 대략 몇 부 정도 찍어내야 필사의 비용을 확실히 넘어설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목판인쇄, 활자인쇄 등등은 아마 돈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을 것 같다. 어떤 책이 왜 목판으로 나왔는가, 왜 활자로 찍혔는가, 왜 필사가 되었는가, 결국 돈 아니겠는가? 경제적 문제가 책의 형식을 결정했을 것이라 본다. 이것 남아 있는 문서들을 잘 살피면수학 공식화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이 공식으로 부터 당시의 인쇄와 관련된 경제적 사정을 역으로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editor's note ***  전통시대 한국 출판은 상업.. 2025. 1. 27.
인쇄의 경제학 한국 정도 나라의 크기 경제 규모에 독자층 규모를 생각하면경제적으로 더 유리한 것은 목판이 아니라 활자본 아니었을까. 목판인쇄를 하면 손익분기점이 대략 몇 부였을까. 몇 부는 찍어야 필사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을까.책의 두께도 중요할 것이다. 두꺼운 책일수록 활자가 유리할까 목판이 유리할까. 조선시대 우리 조상님들이라고 해서 책 인쇄 해 찍어 내는데 그 정도 수지타산도 안 따져봤겠는가 책을 딱 보면 목판으로 할지 활자로 할지, 목판으로 한다면 몇 부나 찍을지대략 견적을 내지 않았을까. 그러면 이러한 수지타산에 도저히 안맞는 목판 인쇄도 있었을 텐데, 그것을 필자는 고려시대 대장경 사업과 조선시대 송자대전 같은 것이라 본다마는, 이런 목판은 목표가 서책의 인출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책이야.. 2025. 1. 27.
조선시대 목판인쇄에 대한 의문 조선시대 활자인쇄는 그렇다고 치고 목판인쇄-. 목판인쇄를 하고 나면 충분한 부수가 인출되어 목판을 만든 수고와 경비를 상쇄하고도 남는 경우도 물론 경우에 따라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일본은 거의 목판이 없다. 에도시대 이전 이야기다 . 왠 만한 건 전부 필사본이다. 일본서기 고사기 심지어는 육국사까지도 에도시대 이전 흘러 내려오는 것들은 모두 필사본이고 독서층이 급증하는 에도시대 이후에나 이런 책들은 인쇄되어 산출되었다. 문제는우리나라 책들인데 우리는 물론 필사본도 많겠지만 인쇄본이 정말 많은 것 같다. 활자본은 그렇다고 쳐도 과연 이 많은 목판 인쇄본이 경제적으로 타당한 것들이었을까.예를 들어 팔만 대장경초조대장경까지 하면 16만장 이라는 건데 도대체 이 팔만 대장경 몇 부나 인쇄했을까. .. 202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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