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17700 신하들을 데려다 가르친 영조와 정조 사실 영조와 정조가 신하들을 데려다 가르칠 만한 수준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필자 생각에는 이 양반들은 세종 정도 수준은 안 되는 양반들로 본다. 부지런하고 영명한 사람들임은 분명하지만. 숙종 때는 그렇다 치고, 영조와 정조는 많은 부분이 닮았는데 특히 신하들을 데려다 가르치고 말이 경연이지 경연때는 신하들한테는 대충 묻고 자기가 가르치는 것이 태반이었고 책을 낼 때마다 서문을 갖다 붙였는데 전부 도통道統 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자임한 것이 태반이었다고 본다. 정조가 그 정도가 좀 심했기 때문에 영조는 상대적으로 좀 덜 부각되는 측면이 있는데 이 양반도 만만찮은 양반이었다. 따지고 보면 숙종, 영조, 정조의 이러한 성정은 필자가 보기엔 전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명성황후가 아니다, .. 2024. 1. 26. 영감님들 지하철 영감님들 지하철 무임 승차문제로 말들이 많은데,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학계에서도 논의가 좀 있었던 걸로 아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지하철 무임승차로 그 분들이 좀 걸어다니고 운동하게 하는 것이 사회전체적으로 볼 때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노인들은 움직이지 않으면 병치레로 범벅이 된다. 차라리 전철을 타고 어딘가를 놀러도 갔다 오고 움직이게 해드리는 것이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그 양반들이 전철비 때문에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회적 경비가 절감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지금보다 무임승차 개시 연령을 좀 올리고 (개인적으로는 65는 좀 빠르다고 본다), 러시아워 시간에는 무임승차를 막는 등 개선책은 필요하겠지만 노인.. 2024. 1. 26. 서인 세계관보다 더 문제인 황극론 흔히 18세기 집정 서인 세계관의 대척점으로 숙종-영조-정조대의 황극론을 세우는데, 이 황극론에서 탕평책이 나왔으므로 함께 이해하여 서술한다. 황극론은 흔히 정조를 지목하지만 그 사상적 연원을 따지고 보면 숙종 이후 정조 때까지 이 대가 쎈 군주 세 명의 치세에 서서히 발전하여 정조 임금 때 최종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다. 이 흐름의 이해에 있어 숙종과 영조도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다. 숙종, 영조 치세에 보면 정조 때의 사상적 흐름의 단초는 이미 충분히 많이 보이고 있어 정조 때에 완성된 황극론의 흐름에는 그 상류에 숙종과 영조가 당연히 포진하고 있다. 이 주장을 옹호하는 입장에 따르면 정조는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는 남인과 연대하여 소위 근대적 맹아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인데, 전혀 동의할 수 없다. .. 2024. 1. 26. 눈가리고 아옹? 돌절구에다 자기 표식을 단 소심한 권오영 몽촌토성 출토 돌절구로 서울대박물관 고고실 상설전시품 중 하나다. 저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었다. 돌절구 석구石臼 stone mortar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는 작은 돌절구가 여러 점 확인되었습니다. 크기로 보아 이것으로 식재료를 가공했다기보다는 차를 보관하거나[茶甁] 약재를 빻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제 주전자, 청자 사발 등과 함께 출토된다는 점에서 중국에서 들어온 차 문화와 관련된 유물로 보기도 합니다. 저런 설명은 권오씨가 관장으로 오기 전에는 없었다. 그러니 저 팻말은 권오씨 의도가 짙게 반영된 그의 작품이다. 왜? 아마 선생질하신지 35년 정도 되었을 권오영은 동아대와 한신대를 발판삼아 지방을 떠돌다 서울대 국사학과로 전직하고는 박물관장까지 냉큼 먹어버렸는데 일찍이 역사학으.. 2024. 1. 26.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조선 후기 언제부터인지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미명하에 조선후기 지성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흐름이 있다. 필자도 조선후기의 흐름 자체를 이유 불문 부정적으로 보거나 자기 비하적 비판은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조선후기 지성사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느냐의 문제가 있겠다. 예를 들어 숙종대 이후 왕실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소위 황극에 대한 강조, 탕평책 등은 그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노론 중심의 세계관과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자체는 근대적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오랜 유교의 역사에서 흘러오던 두 개의 큰 세계관 중 하나는 이쪽이 잡고 다른 하나는 저쪽이 잡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소위 말하는 실학-. 이른바 중농학파의 토지개혁은 지나친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2024. 1. 26. 아부는 거룩한 충성, 죽일 수 없다 바로 앞에서 거란군에 사로잡힌 고려군 수뇌부 넘버 원 강조와 넘버 2 이현운이 걸은 너무나 다른 길을 소개했거니와 아부는 거룩한 충성이라는 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기자 초년 시절, 아부로 출세가도를 달린 공장 선배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태식아, 너 아부 말이다. 그거 첨에 들으면 참 거북해, 한데 말이야, 자꾸 들으면 그렇게 이쁠 수가 없다?" 결국 자신한테 아부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나는 아부를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줄 몰랐다. 그러니 해고까지 당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 해서 내가 무슨 절의 절개남? 웃기는 소리, 똑같은 놈이다. 거란 성종 야율융서가 진짜로 대인이라면 고려왕한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강조를 풀어주어야 했다. 대신 "제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으.. 2024. 1. 26. 민족의 반역자 이규보(?), 단재가 봤더라면 외국이 중국에 복종하지 않은지 오래됐음으로, 당唐 태종太宗이 장차 만국萬國을 복종시키고 문궤文軌를 통일하려고 하여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불행히도 말을 우리나라에 머무른 채 돌아가지 못하였으므로 사당이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외국이 복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건만 문황제文皇帝는 오히려 분연히 노하여 군사들을 원정遠征에 내보내어 고달프게 하였고 끝내는 몸소 진두에 서서 경략經略하기까지 한 것은 장군도 아는 일이며, 하물며 동경東京은 우리나라의 배읍陪邑인데 감히 군사를 일으켜 국가를 배반함에리까. 입을 벌리고 주인을 향해 짖는 것은 개짐승도 하지 않는 법인데, 모르겠습니다만 장군의 생각에는 이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고금에 하국下國을 정벌하는 .. 2024. 1. 26. 인간 심연을 후벼파는 죽음의 공포, 이현운의 경우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은 강조를 고려사 편찬자들은 당연히 반역叛逆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그의 충절은 높이 살 만했으니, 통주성通州城 남쪽 전투 현장에서 거란군에 사로잡힌 그는 투항하라는 거란군주 야율융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앉힌 강조는 그것을 구실로 토벌을 앞세운 거란 40만 대군을 맞아, 30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당시 고려 조정 최고 실권자로서 직접 전장에 뛰어든다. 보통 최고 권력자는 최전선에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데 견주어 그 자신이 직접 나섰다는 점이 이채롭다. 다만 이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어처구니 없는 판단 미스로 그 자신이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다는 점에서 그는 지장智將이라 볼 수는 없으며, 우직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 2024. 1. 26. 고려거란전쟁 시기에 대한 생각 이 시기는 무신정변 이전이다. 고려 거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이미 고려는 전시과 제도 체제 하에 있었다. 고려거란전쟁에 동원되는 그 많은 고려군은 뭘 먹고 살던 사람들일까. 조선처럼 병농일치 병사들일까 아니면 직역이 세습되는 병사들일까. 고려는 무과도 없었다는데 무과가 있었던 조선시대 군인보다도 더 잘 싸우는 저 고려의 무인들은 도대체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땅에서 솟았을까. 마지막 의문-. 고려거란전쟁에서 저렇게 싸우는 군인들이 결국 무신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싹슬이 해버린 군인들의 직계 조상일까? 만약 그렇다면 거란과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고려의 군인들이 불과 백여년 후에는 그 칼을 문신들에게 돌려 고려 정부를 절단 낸 셈이다. 거란과 고려의 통쾌한 전쟁사 이면에 저 군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한 .. 2024. 1. 26. 고려거란전쟁과 초조대장경 대장경 목판은 어마어마한 문화재다. 필자 생각으로는 이건 한국 같은 크기의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볼륨의 문화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금속활자만 해도 적은 카피수를 다양하게 찍고 싶다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가. 한국적인 인쇄 전통이라 할 것이다. 금속활자는. 반면에 고려시대 대장경 사업은 그 무지막지한 분량. 게다가. 초조대장경은 조판이 1011-1877까지 만들었다는 설이 옳다면 993-1018년의 고려거란전쟁의 후반기와도 겹치는 것이니, 전쟁하랴 대장경 만들랴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대장경을 두 번을 만들고 그 사이에 의천의 교장까지 있었으니 이 당시의 고려는 싸우고 남는 시간에 목판을 죽도록 팠던 셈이겠다. 참고로 지금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1236-1251년에 조판한 것으로 1231-125.. 2024. 1. 26. [202401 독일풍경] (2)함부르크 ② 쿤스트 할레 [Hamburger Kunsthalle] from 장남원 이곳은 미리 작정하고 갔어야 했다. 특히나 현대관에서 열리는 독일 낭만주의 대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 탄생 250주년 특별전은 매진, 매진.. 작가 생몰년을 보니 추사 김정희 시대다. 벽돌보다 두터운 도록에 인산인해였다. 포스터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이곳 소장이다.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으나 나치시대 선전물로 이용되면서 훗날 기피되었고 화가로서 재평가되기는 1970년이 이후다. 지금은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다. https://www.hamburger-kunsthalle.de/ausstellungen/caspar-david-friedrich-0 Caspar David Friedrich | Hamburger Kunsthall.. 2024. 1. 25. 우리가 아는 밥맛은 쇠솥이 나오면서 나왔다 필자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곡물취사는 초기에는 찌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찌는 방식으로 취사를 해 보면 쌀과 다른 잡곡의 맛이 별차이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쌀의 단맛도 덜하고 특히 쌀 도정을 제대로 하지 않은 현미로 밥을 찌게 되면 수수밥이나 기장밥과 별차이 없다. 우리가 아는 쌀밥 맛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쌀밥맛은-. 철제 솥이 나온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 곡물을 솥안에 직접 넣고 끓이다가 마지막에 불을 줄여 긴 시간 작은 불로 뜸들이는 우리가 아는 방식의 밥 짓기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다른 곡물로 차별성이 생기게 되었다고 필자는 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이런 경우에는 해먹어 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해 먹어 보니 그렇더라 그 이야기다. 특히 쇠솥이.. 2024. 1. 25. 고려거란전쟁이 건진 영웅은 양규와 지채문이다 이 두 사람 저 드라마가 아니었던들 언제까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언젠가는 부각했겠지만, 솔까 양규는 그나마 개설서에 이름은 잠깐 들이밀기는 하지만 지채문은 노답이었다. 실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두 사람 활약은 영웅적이다. 그 압도적 거란군 위력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40만 거란군을 상대로 흥화진을 사수하고 드라마처럼 곽주성을 천700명으로 탈환했으며, 회귀하는 거란군을 곳곳에서 요격해 공포에 빠뜨린 이가 양규다. 회귀하는 거란군을 상대로 7전7승인가 하고는 나중에 장렬히 산화했다. 그는 역사가 추앙해야 할 영웅이다. 지채문. 동북면 지금의 함경도 쪽에 배치되어 있다가 급보를 받고는 서경을 구원하러 갔다가 여의치 않게 되자 개경으로 곧바로 달려 내려가 몽진하는 현종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2024. 1. 25. 무쇠솥 뚜껑은 왜 중요한가 결국 압도적 밥맛은 밥을 할 때 가열되는 와중에 어느 정도로 효율적으로 증기를 잡아낼 수 있는가에 있다. 지금도 이것은 중요하다. 현대 전기밥솥이 거의 압력솥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코펠로 밥을 지어 본 사람은 알 텐데, 요즘은 취사가 불가능하지만 필자가 학생 때만 해도 설악산 꼭대기에서 코펠로 밥 지어 먹는 사람 천지였다. 설악산이 해발 1700 미터인가 뭐 그럴 텐데 이 정도 고도만 되도 물이 100도 아래에서 끓기 때문에 코펠 같이 얇은 두껑으로 간신히 막아 놓은 취사기로 밥을 하면 백프로 설익게 된다. 산 꼭대기에서 선 밥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짱똘을 가져다가 코펠 뚜겅 위에 올려 놓는다. 100도 이하에서 끓는.. 2024. 1. 25. 침술의 혁명, 연길 소영자 유적 延吉小營子遺蹟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시延吉市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대규모 무덤 흔적을 말한다. 1937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 일대에서 채석 작업을 하던 중 유물이 발견되어 알려지자 이듬해 7월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로 등나무 우거진 밭 가문 출신 후지타 료사쿠 등전량책藤田亮策이 정식 발굴조사를 했다. 그 결과 52기로 구성된 대규모 돌널무덤 석관묘 石棺墓 무덤떼로 드러났으니 무엇보다 무덤에서 100여 기에 달하는 인골을 비롯해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 전 유적이 이미 많이 훼손되어, 유물의 정확한 출토 맥락을 파약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당시에 선사시대 무덤 유적을 발굴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남겼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그 유물 일부가 권오씨가 임시 계약직 관장인 서울대박물관에 상설전시 중이다. 유물 중 놀.. 2024. 1. 25. 왕 또한 마누라는 한 명뿐, 부묘祔廟의 중요성 전반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견주어 고려시대가 적서 차별 양상이 극심하지는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는 상대성 이론이라, 견주어 볼 때 그리 보인다뿐이지, 고려시대라고 적서차별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적서 문제는 결국 혼인 양태에서 비롯하는데, 더 구체로는 남자 한 명에 부인이 한 명인 1부1처제 때문이다. 한국사에서는 적어도 기록으로 남은 흔적으로 볼 때는 철저한 1부1처제 사회였고, 남자한테 부인은 같은 시기에 한 명이 있을 뿐, 복수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고려시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어서 이쪽도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어느 인터넷 사전을 보니 "고려시대에는 두 명의 정실 부인 외에 첩을 두고 서자를 두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서자를 적자와 다른 존재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 2024. 1. 25. [문화재청장 정재숙] (2) 임명과 더불어 연판장 돌린 고고학계 중앙일보 현직기자인 정재숙을 임명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문화재 업계 일부에서는 연판장이 돌았다. 역시나 고고학계였다. 이 놈들은 지들이야말로 문화재 업계 전부라 착각하는 놈들이다. 그 연판장은 그놈들 소행이었는데, 성명서를 내기 위한 초고 상태로 바로 나한테 들어왔다. 보니 가관이었다. 첫째 어떤 놈이 썼는지 문장이 주술관계도 맞지 않았고 둘째 주술관계는 고사하고 앞뒤 문맥도 없고 논리도 없었다. 어떤 교수놈이 썼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초고를 누가 썼는지 확인은 못했다. 저런 중구난방 연판장이 주장하는 요지는 결국 이거였다. 문화재는 전문분야이니 전문가가 해야 한다. 중앙일보 기자 정재숙은 문화재 전문가가 아니다. 그 연판장 초고를 막 취임한 정재숙한테 보냈더니, 이 누님 여걸이라 .. 2024. 1. 25. 밥 뜸들이기는 한국의 발명품인가? 현재로 봐서는 그런 것 같다. 실제로 밥 뜸들이기는 중국도 일본도 아니고 한국의 발명품이라고 보는 시각이 학계에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물로 밥을 끓인 후 마지막 단계에서 뚜껑을 닫고 불을 줄여 뜸들이며 바닥 쪽을 가볍게 태워 누룽지도 만들어 내는 방식의 취사는 밥맛을 혁신적으로 좋게 했는데 이런 방식의 취사는 한국 쪽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그 구체적 시기는 아마도 쇠솥의 출현 이후일 텐데, 필자의 감으로는 쇠솥의 모양.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전 포스팅에서 김단장께서도 얼핏 지적하신 듯한데 필자가 보기엔 같은 쇠솥이라도, 밥을 찔때 쓰는 쇠솥과 밥을 끓여 뜸들일 때 쓰는 쇠솥의 모양이 다른 것 같다. 밥을 찔떄 쓰는 쇠솥은 아마도 청동기시대 이래 토기 중 시루 아래 쪽에서 물을 끓이는 토기와.. 2024. 1. 25. 도판으로 보는 궁궐 조명기구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궁궐 조명기구 총정리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궁궐 조명기구 총정리 국립고궁박물관이 조선시대·대한제국기 조명기구 조사 결과를 정리한 단행본 《조명기구照明器具》를 발간하는 한편 숙종과 고종 연간에 각각 편찬된 궁궐 보고서인 《궁궐지宮闕志》를 한 historylibrary.net 바로 앞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그 조사보고서를 냈다는 소식을 전했거니와 이에서는 그에 수록한 조명기구 면면을 도판들로 살피기로 한다. 2024. 1. 25. [독설고고학] 한국고고학은 가마솥을 팔아먹어야 코로나도 끝났으니, 세계 유수하는 고고학 관련 단체들이 다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런 데 가서 한국고고학 또한 이제는 무엇인가를 팔아먹어야 한다. 문화재산업? 국가유산산업? 고고학이 내어놓은 산업이 뭐가 있는가? 트롤? 장사 안 된다. 호미로 잠깐 BTS RM힘을 빌렸지만, 그걸로 고고학이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종 굿즈? 고고학이 무엇을 팔아먹었단 말인가? 교육세트? 구멍가게다. 나는 한국의 발굴제도 자체를 팔아먹으라 했지만, 이것도 한 놈도 관심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외국 고고학이 바라보는 가장 큰 상품은 한국의 발굴제도 자체라는 사실은 입이 아프도록 지적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자리건 이제는 한국고고학 또한 이것이 한국고고학이라고 들고 나가 방방 뜨며 선전 홍보할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 2024. 1. 25. 철솥의 진화: 쇠뚜껑은 언제 출현했나 최근까지 발굴 보고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철솥은 초기에는 쇠뚜껑이 없었던 것 같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 철솥은 토기로 밥을 쪄먹던 시대의 물끓이는 아래쪽 토기의 역할을 했다고 보이고, 이런 예가 아차산보루에서 나온 위는 토기 시루 아래는 쇠솥의 조합이 아닐까 한다. 이런 것이 어느 시기부터인지 특정하기 어렵지만, 밥을 쪄먹는 것이 아니라 직접 끓는 물로 취사하는 방식의 지금과 같은 밥짓기가 탄생했다고 보이는데 이런 밥짓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아마 처음에는 쇠솥의 뚜껑은 나무뚜껑이었지 싶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쇠솥의 뚜껑을 나무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어느시기부터인지 쇠뚜껑이 나올 텐데 필자 생각에는 이 쇠솥의 쇠뚜껑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를 특정하는 것 역시 쇠솥이 출현하는 시기 못지 않게 .. 2024. 1. 25. 이전 1 ··· 168 169 170 171 172 173 174 ··· 84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