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1910 말이 통해야 하는 나노리 대체로 일본에서는 나노리의 소멸을 근대적 전술의 발전과 함께 보는 듯하다. 쉽게 말해서 철포=조총의 등장과 철포대의 전술상 나노리고 뭐고 없다. 오다 노부나가가 다케다 군을 전멸시켰을 때 전통적인 전술을 구사하고자 한 다케다군을 오다군은 나노리고 나발이고 없이 철포대의 일제사격으로 묵사발을 내 놓았는데 대체로 이와 같은 근대적 전술의 채택과 나노리의 소멸을 밀접하게 보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한반도에선 그 훨씬 이전에 이미 나노리는 사라진 것 같은데 가장 큰 이유는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의 전쟁은 외침에 대한 전투가 주류로 전투의 맞상대가 아예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로 여몽 연합군이 쳐들어갔을 때 앞에 나와 나노리를 하고자 했는데 고려-몽골.. 2024. 1. 7. 거란-송을 갖고 노는 고려와 서하 거란 요나라 역사 통사로 원나라에서 관찬한 요사遼史는 전체 108권이라, 개중 열전은 권63부터라, 딱 절반이 열전이다. 그 열전 마지막이자 요사 전체의 마지막인 권108 열전 제46은 거란어에 대한 해설인 국어해國語解이고, 그 바로 앞이 이국외기二國外記라, 이는 여타 사서에서는 외국열전을 세운 데 견준 것과 대비하는데, 요사가 말하는 이국二國이란 바로 고려高麗와 서하西夏라, 이는 그만큼 거란 역사에서 두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한 까닭이다. 이 두 왕조가 거란을 다룬 양상을 보면 아주 비슷해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실로 절묘하게 갖고 놀았다는 표현이 딱 적당하다. 이 이국열전에는 고려의 경우 그런 양상이 잘 드러나지 않고 주로 두 왕조 사이에 있는 전쟁과 평화 시대 이야기를 추렸지만, 이는 고려.. 2024. 1. 7. [독설고고학] 투고 자격도 주지 않는 해외 저널들 [독설고고학] 형식분류 제작기법 축조기술은 투고 자체를 원천봉쇄해야 한다 [독설고고학] 형식분류 제작기법 축조기술은 투고 자체를 원천봉쇄해야 한다그렇다면 한국고고학은 당장 어찌해야 하는가? 저거다. 형식분류 제작기법 축조기술 타령 일삼는 그 어떤 논문도 투고 자체를 원천 금지하며 그런 논문이 들어와도 자동으로 퇴짜를 놓아야 한historylibrary.net 망조가 든 한국고고학 구출을 위해서는 저와 같이 해야 한다고 나는 적었거니와, 이게 장난처럼 보이겠지만 천만에. 실제 외국 저명 저널에서는 저런 일이 아주 빈발한다. 클리쉐한 논문은 아예 투고도 못하게 하는 규정이 수시로 발동되고 있다. 실제 외국 어느 저명한 고고공예 관련 관련 저널 중에서 저와 같은 통제를 실시하는 데를 봤다. 왜 그.. 2024. 1. 7. 장례식 조문객과 사찰 낙성 축하객 (1) 빈소와 조문객 고관대작을 지내거나 다른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의 죽음에 이르러 항용 보이는 표현 중 하나가 임금이 부의를 후하게 해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는 말이거니와, 이런 점들이 왜 고고학도들한테는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지 나로서는 신통방통할 뿐이다. 조선시대는 기본이 이른바 박장薄藏이라, 일부러 값나가는 물건을 무덤에 넣는 일을 피한 전통이 오래되는 바람에 이걸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나아가 시대별 문화권별로 넒나듦이 있지만, 근간은 후장厚藏이라, 값나가는 물건을 될수록 많이 넣음으로써 부와 권력을 과시하곤 했으니 해당 무덤에 들어가는 껴묻거리 상당수가 이른바 부의賻儀였다는 사실을 하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이 부의를 가능케 하는 절대 근거가 빈殯이라, 빈은 간단히 말하자면 조문을 받는 기간이다. 동아시아.. 2024. 1. 7. 백제와 고려군의 전투: 입표立標란 무엇인가 전술한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를 보면 백제 부여창과 고구려 군 전투장면이 나오는데 다시 써보면 아래와 같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騎, 징을 꼽은 자鐃자는 자세하지 않다 2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餘昌이 “姓은 (高麗 왕실과)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 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줄, "표를 세우고"라는 말. 무슨 뜻일까? 원문에는 .. 2024. 1. 7. 고려군은 나노리名乗り를 했을까? 나노리名乗り라는 것이 있다. 일본사에서 흔히 보는 것으로 무장들이 서로 싸우기 전에 자기 관등성명을 대는 것이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공명을 높일 수 있고, 져도 지는대로 싸우다 죽었다고 알릴 수 있으므로 전장에서 꼭 필요한 의례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적인 의례같지만, 일본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역사상의 나노리는 한국과 관련이 있다. 바로 성왕의 아들 부여창이 고구려군과 다툴 때 서로 나노리 하는 장면이 나온다. 겨울 10월 庚寅 초하루 己酉 百濟 왕자 여창餘昌(明王의 아들 威德王註 001이다)이 나라 안 모든 군대를 내어 高麗國을 향했는데,註 002 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 2024. 1. 7. 무덤 벽화로 보는 거란 한 장면 어느 무덤인지 특정하지는 못하나 거란 벽화 한 장면이다. 남자들 머리는 다 대머리 독수리머리로 만들었으니, 고려거란전쟁에서 소배압을 필두로 하는 거란 군인들을 저리 처리한 것은 나름 고증에 철저한 면을 보여준다. 인종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모조리 매부리코다. 세발 솥으로 죽을 끓여서 먹는 장면인 듯하다. 국자 숟가락 젓가락이 다 보이는데 문제는 젓가락으로 집을 만한 반찬은 그림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엎은 사발을 나르는 남자가 보인다. 개죽통 같은 걸로 국자로 무얼 먹으려는지 하는 남자도 있다. 틀림없이 죽을 해 먹었는데 곡식은 잡곡일 것이다. 잡곡을 죽으로!!! 저들이 양을 많이 키운다고 양고기 주식으로 먹었을 것이다? 위험한 발상이다. 2024. 1. 7. [독설고고학] 고고학의 오만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한강 유역을 고구려가 확실히 장악한 시기와 그 기간이 어떤지에 천착한 근자 어떤 고고학도 글을 보니, 한강 이북 지역, 혹은 임진강 유역 일대에서 한성백제 유적이 잘 안 나오는 점을 근거로 백제는 이 지역을 475년 전쟁에서 개로왕이 참수됨과 더불어 고구려에 다 빼앗겼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으니 이 대목을 보고는 고고학의 오만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통탄 또 통탄하고 말았으니, 왜 나는 이를 고고학의 오만이라 하는가? 고고학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고고학이 그 시대 모든 것을 증언하지는 못한다. 내가 항용 예를 드는 것이 서울 고려라, 지금의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경南京으로 일컬으면서 지금의 평양인 서경, 그리고 신라 천년 고도 이래 고려시대에 아주 중요한 도시로 동경東京으로 일컬은 경주와 함.. 2024. 1. 7. 일단 시작은 지도부터, 그렇지만 지도는 싫어요. 나는 매번 똑같은 일을 하기 싫어했다. 쥐뿔 아는 것도 없는데 여기서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없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교수님께 소심하게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게, 저는 대학에서 이런 주입식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아는 것도 없는데 토론이 되겠냐며 교수님에게 까였다. 흑흑) 늘 말하기 주저하는 내 성향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늘 의심도 많았다. 초등학생 때, 이승복 어린이 일화를 읽으면서 ‘이거 거짓말 아냐? 나 같으면 무서워서 숨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거 쓰면 나이대가 유추되는 것 아닌가요? 하하) 물론 선생님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일하면서 가장 지겨웠었던 것 일하면서 이러한 나의 성질머리가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2024. 1. 7. [독설고고학] 실력 없는 놈들이 하는 짓이 신자료 소개다 일본 쪽에 견주어 흔히 한국학계를 일러 디테일에 약하다 하지만, 내가 볼 땐 디테일만이 문제가 아니라 거시에서도 마찬가지라, 이건 일본 학계도 마찬가지인데, 조막디 만한 걸로 침소봉대는 잘하는 편이지만, 전체 그림을 그릴 줄을 모른다. 아무튼 디테일이건 거시건 미시건 나발이건 그런 실력없는 놈들이 그나마 새로운 목소리를 낼 만한 데가 신자료 소개밖에 없으니, 새로운 자료 출현에 내가 매양 비유하듯이 썩은 시체 구더기 몰리듯 개떼처럼 달라들어 서로 먼저 글 하나 써보겠다고 환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뭔가 작은 것 하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그것을 깊게, 그러면서도 넓게 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역사철학도 만들어낼 능력도 없으니, 뭔가 어디서 새로운 자료 출현했다는 소리만 들리면 우루루 .. 2024. 1. 7. 어용화가 벨라스케스가 열라 그려댄 앙리 4세의 장공주 이사벨 드 부르봉 이사벨 드 부르봉 Isabel de Borbón (1602~1644) 이라는 여인은 짬뽕 왕실 국제결혼이 유행하던 시절 프랑스 공주라 하지만, 그 자신부터 혈통이 요상해서 아버지는 프랑스 왕 앙리 4세 Henri IV de France (1553~1610)이며, 어머니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édicis (1573~1642) 다. 이 무렵 유럽 왕실은 혼인을 통해 얼키설키하고, 지들끼리 결혼하면서 왕국 자체도 합병해 버리곤 했으니, 이것이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 매국으로 매도되는 일이다. 물론 그것도 국민국가 등장 이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 사이 장녀로 퐁텐블로 궁 Château de Fontainebleau에서 태어난 이사벨은 프랑스 궁전에서는 으레 큰딸한테 .. 2024. 1. 7. 사전私田과 결합한 무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중국의 당대, 한국의 통일신라말, 일본의 헤이안 말 이후 공통의 과제는 토지에 대한 공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출현하는 사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혼란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결국 벌어지는 사건들이 당말의 혼란 라말여초 그리고 헤이안 말의 무가의 등장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안의 심각성은 그렇게 불거져 나온 사전들이 무력과 결합하면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중국 오대시기의 절도사 체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혼란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라말여초 호족의 대두가 동네 농민들 끌고 다녔다고 생각하는가? 그 밑에는 자기 토지를 가지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력을 끼고 다니는 동네 건달들, 아니 신흥 무인세력이 있었다. 이들이 호족 밑에서 이를 옹립하여 떠 받드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 2024. 1. 7. 사후에야 탈세 혐의를 벗었다는 나폴리 수호신 디에고 마라도나 축구 영웅 마라도나, 30여년만에 '나폴리 탈세' 혐의 벗어 송고시간 2024-01-06 02:46 축구 영웅 마라도나, 30여년만에 '나폴리 탈세' 혐의 벗어 | 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뛸 당시의 탈세 혐의를 마침내 벗었다. www.yna.co.kr 나폴리에서 마라도나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근자 현지 방문을 통해 실감했으니 나폴리가 현재의 나폴리로 정착한 직접 시점은 기원전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는데, 그때 수호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 자리를 대체한 까닭이다. 그 어떤 신도 이곳에서는 마라도나를 대체할 수는 없다. 나폴리가 한때는 위광을.. 2024. 1. 7.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말하는 1915년 능산리 고분 발굴 ***세심한 번역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긴 것이니 상세한 인용은 직접 고고학잡지 1916년 6-3호를 보라. 나는 지난 메이지 42년(1909) 한국 탁지부 촉탁을 받아 다이이谷井 문학사 구리아마栗山 공학사와 더불어 백제 고도인 공주와 부여의 유적을 조사한 일이 있지만 본년 7월 곡정 문학사 및 후지타後藤 공학사와 조선총독부 촉탁을 받아 다시 부여에 이르러 그 부분을 답사하고 6일 두 사람과 갈라져 공주에 이르러 그 산성 연구를 시도했다. 앞선 조사에서는 성벽 유적의 외곽 형태 외에 백제시대 유물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분묘 발굴을 시도한 결과 당시 분묘 양식도 분명히 알게 되고 또 부장품이나 성벽 유적 출토 고기와의 문양이 크게 우리 나라시대의 그것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2024. 1. 7. 고려 정벌을 반대한 소적렬蕭敵烈 날로곤涅魯袞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적렬蕭敵烈은 자가 낱로곤涅魯袞이다. 재상 소달렬蕭撻烈의 4세손이다. 식견과 도량이 크고 원대하여 향리에서 받들었다. (관직 진출) 처음에 우군창사牛群敞史가 되었는데 황제가 그가 똑똑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러 입시하게 하고는 나중에 국구상온國舅詳穩으로 옮겨 주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황제가 어러 신료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康肇가 그의 군주 송誦(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그의 족형 순詢(현종)을 세우고는 그의 재상을 하고 있으니 그를 대역으로 처벌해야 한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 죄상을 물어야 할 것이다”고 하니 여러 신료가 모두 그래야 한다 했다. (하지만) 소적렬이 간언하기를 “나라가 해마다 정벌하느라 사졸이 지쳐 있고 나아가 폐하도 상중이십니다. 올 농.. 2024. 1. 7.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와 병사 수, 그리고 훈련도감 간단히 적어둔다.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에서 1석은 남성 성인 1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이다. 막번시대 일본에서 가장 큰 번이 가가번加賀藩이었다고 하는데 가가번은 호왈 가가백만석이라고 해서 백만석짜리 번이었다고 한다. 이대로 믿어 본다면 이 번에서는 백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 수는 어떨까? 100석당 병사 1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가번의 경우 가용 병력은 1만 명인 셈이다. 조선후기 훈련도감군은 병력 증감이 있었는데 대략 5천명선이었다고 하니 일본으로 친다면 50만석 짜리 번이 유지할 수 있는 직업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당시 파악하고 있는 인구가 6백만선이었다고 감안하면, 국가에서 6만 병력은 유지가 가능해야 했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 오군영이 그렇게 국가에 막대한.. 2024. 1. 7.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왜 없겠는가? 에도시대에 무슨 무과가 필요하겠는가? 가마쿠라 막부에 무과가 왜 필요하겠는가? 군인이라는 직역이 세습되는 사회에서는 무과란 필요가 없다. 고려시대에는 흔히 행오에서 군인을 발탁하여 썼므므로 무과가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이게 뭐 논산 훈련소에서 뽑아 놓고 잘 뛰는 사람을 위관 영관 장관급으로 춣세시켜 썼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차피 군인은 세습했다. 그게 군인전이다. 직역이 세습되고 있었으니 무과가 필요 없는 것이다. 2024. 1. 7. 나는 옳다 해서 기사 썼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공작이라면? 기자질 하며 제일로 기분 나쁠 때가 내 기사가 내가 의도한 바와는 전연 딴판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더 기분 더러운 때는 이것이 옳은 길이요 가야 할 길이라고 해서 그쪽 방향으로 썼는데 알고 보니 이게 누군가 그쪽으로 유도한 것임이 밝혀졌을 때다. 문화재 분야라고 예외가 아니다. 몇해 전의 일이다. 서울 어느 지역 주민들이 난데없이 나를 찾아왔는데, 핵심은 인근 지역 재개발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명분이 있어야 하니 이들이 내세운 무기는 문화재 보존이었다. 문화재 기자한테 주민들이 자발로 문화재 보호를 위해 개발을 반대한다는데 얼마나 그들이 대견해 보이겠는가? 한데 알고 보니 그 재개발지역이 이른바 서민형 임대주택 예정지였다. 반대한 이유는 자명해졌다.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 다행히 저 건은 기사를 쓰진.. 2024. 1. 7. 육십이후의 전략 필자의 논문 인용 횟수 변화다. 뭐 요즘은 워낙 잘들 하는 사람이 많아 필자의 인용횟수는 그냥 평범한 수준이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필자의 인용횟수 변화를 보면, 2014년에 한 번, 2018년에 한 번 그리고 2021년에 반등하여 피크를 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용횟수가 반등한 것은 사실 그보다 몇 년 전에 연구 주제의 변화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연구주제를 변화시키고 소위 말하는 current trend와의 동기화를 꾀한다. 그래야 다시 연구수준이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다. 이게 아주 힘이 들고, 사실 사람 할 짓이 못된다. 이런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인용횟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학자로서 종국에는 산송장이 된다. 필자 생각에는, 이런 변화의 모색은 나이가 들면.. 2024. 1. 7. 탁사정한테 죽다 살아난 고구려 후예 거란 외교관 고정高正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고정高正은 어느 군郡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통화統和 연간 초기(983 무렵)에 진사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해 누차 승진해서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가 되었다. 황제가 장차 고려를 정벌하려하매 먼저 고정한테 고려로 가게 해서 그 이유를 알렸다. 돌아오자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 마침 그때 고려왕高麗王 순詢(현종)이 표문을 올려 들어와서 친히 황제를 뵙겠다고 하니 황제가 그리하라 하고는 고정을 보내서 기병 천 명을 데리고 가서 맞도록 했다. 객관에 머물다가 고려 장수 탁사정卓思正한테 포위되니 고정이 정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는 휘하 장사들과 더불어 포휘를 뚫고 탈출을 감행하다 사졸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황제가 경솔하게 움직였다고 후회하면서 그의 죄를 용서했다. 이듬해 공부시랑.. 2024. 1. 6. 강조를 사로잡은 야율홍고耶律弘古 분눌은盆訥隱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야율홍고耶律弘古는 字가 분눌은盆訥隱이라 요련선질가한遙輦鮮質可汗의 후손이다. 통화統和 연간 초기(983?)에 일찍이 군사 임무를 맡아 예랄상온拽刺詳穩이 되었다가 이내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 옮겼다. 13년(995)에 남쪽 변경을 돌다가 사악교四岳橋에서 적을 만나 이기니 목 벤 이가 100여 급이었다. 송宋을 정벌하매 전공을 세워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옮기고 초국공楚國公에 봉해졌다. 훗날 고려를 정벌하매 선봉先鋒 야율분노耶律盆奴 부사령관이 되어 강조康肇를 동주銅州에서 사로잡았다. 30년(1012) 서북부가 반란하매 남부재상南府宰相 야율노과耶律奴瓜를 따라 그들을 토벌했다. (황실을 호위하는 군대인) 금군禁軍을 맡았을 때는 호령號令이 정비되고 엄숙하니 여러 部가 다 복종했다. 이내 시.. 2024. 1. 6. 이전 1 ··· 384 385 386 387 388 389 390 ··· 104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