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1894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왜 없겠는가? 에도시대에 무슨 무과가 필요하겠는가? 가마쿠라 막부에 무과가 왜 필요하겠는가? 군인이라는 직역이 세습되는 사회에서는 무과란 필요가 없다. 고려시대에는 흔히 행오에서 군인을 발탁하여 썼므므로 무과가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이게 뭐 논산 훈련소에서 뽑아 놓고 잘 뛰는 사람을 위관 영관 장관급으로 춣세시켜 썼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차피 군인은 세습했다. 그게 군인전이다. 직역이 세습되고 있었으니 무과가 필요 없는 것이다. 2024. 1. 7. 나는 옳다 해서 기사 썼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공작이라면? 기자질 하며 제일로 기분 나쁠 때가 내 기사가 내가 의도한 바와는 전연 딴판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더 기분 더러운 때는 이것이 옳은 길이요 가야 할 길이라고 해서 그쪽 방향으로 썼는데 알고 보니 이게 누군가 그쪽으로 유도한 것임이 밝혀졌을 때다. 문화재 분야라고 예외가 아니다. 몇해 전의 일이다. 서울 어느 지역 주민들이 난데없이 나를 찾아왔는데, 핵심은 인근 지역 재개발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명분이 있어야 하니 이들이 내세운 무기는 문화재 보존이었다. 문화재 기자한테 주민들이 자발로 문화재 보호를 위해 개발을 반대한다는데 얼마나 그들이 대견해 보이겠는가? 한데 알고 보니 그 재개발지역이 이른바 서민형 임대주택 예정지였다. 반대한 이유는 자명해졌다.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 다행히 저 건은 기사를 쓰진.. 2024. 1. 7. 육십이후의 전략 필자의 논문 인용 횟수 변화다. 뭐 요즘은 워낙 잘들 하는 사람이 많아 필자의 인용횟수는 그냥 평범한 수준이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필자의 인용횟수 변화를 보면, 2014년에 한 번, 2018년에 한 번 그리고 2021년에 반등하여 피크를 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용횟수가 반등한 것은 사실 그보다 몇 년 전에 연구 주제의 변화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연구주제를 변화시키고 소위 말하는 current trend와의 동기화를 꾀한다. 그래야 다시 연구수준이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다. 이게 아주 힘이 들고, 사실 사람 할 짓이 못된다. 이런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인용횟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학자로서 종국에는 산송장이 된다. 필자 생각에는, 이런 변화의 모색은 나이가 들면.. 2024. 1. 7. 탁사정한테 죽다 살아난 고구려 후예 거란 외교관 고정高正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고정高正은 어느 군郡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통화統和 연간 초기(983 무렵)에 진사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해 누차 승진해서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가 되었다. 황제가 장차 고려를 정벌하려하매 먼저 고정한테 고려로 가게 해서 그 이유를 알렸다. 돌아오자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 마침 그때 고려왕高麗王 순詢(현종)이 표문을 올려 들어와서 친히 황제를 뵙겠다고 하니 황제가 그리하라 하고는 고정을 보내서 기병 천 명을 데리고 가서 맞도록 했다. 객관에 머물다가 고려 장수 탁사정卓思正한테 포위되니 고정이 정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는 휘하 장사들과 더불어 포휘를 뚫고 탈출을 감행하다 사졸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황제가 경솔하게 움직였다고 후회하면서 그의 죄를 용서했다. 이듬해 공부시랑.. 2024. 1. 6. 강조를 사로잡은 야율홍고耶律弘古 분눌은盆訥隱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야율홍고耶律弘古는 字가 분눌은盆訥隱이라 요련선질가한遙輦鮮質可汗의 후손이다. 통화統和 연간 초기(983?)에 일찍이 군사 임무를 맡아 예랄상온拽刺詳穩이 되었다가 이내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 옮겼다. 13년(995)에 남쪽 변경을 돌다가 사악교四岳橋에서 적을 만나 이기니 목 벤 이가 100여 급이었다. 송宋을 정벌하매 전공을 세워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옮기고 초국공楚國公에 봉해졌다. 훗날 고려를 정벌하매 선봉先鋒 야율분노耶律盆奴 부사령관이 되어 강조康肇를 동주銅州에서 사로잡았다. 30년(1012) 서북부가 반란하매 남부재상南府宰相 야율노과耶律奴瓜를 따라 그들을 토벌했다. (황실을 호위하는 군대인) 금군禁軍을 맡았을 때는 호령號令이 정비되고 엄숙하니 여러 部가 다 복종했다. 이내 시.. 2024. 1. 6. 요사遼史 야율적록耶律的琭 야녕耶寧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야율적록耶律的琭은 字가 야녕耶寧이라, 중부방仲父房의 후손이다. 군사 일에 익숙해 좌피실상온左皮室詳穩으로 삼았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매 적록的琭은 본부의 군대를 이끌고 야율분노耶律盆奴 등과 함께 강조康肇와 이현온李玄蘊을 동주銅州에서 사로잡았다. 황제가 이를 대견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경은 뛰어난 재주로 나를 위해 온힘을 다했으니 진실로 우리 집안의 철리마[千里駒]라 하겠소”라고 하면서 어마御馬와 촘촘히 짠 갑옷[細鎧]을 내렸다. 이듬해 북원대왕北院大王이 되었고 외직으로 나아가서 마고적렬부도상온馬古敵烈部都詳穩이 되었다. 나이 72세에 졸했다. 49 耶律的琭,字耶寧,仲父房之後。翌兵事,為左皮室詳穩。 50 統和二十八年,伐高麗,的琭率本部軍與盆奴等擒康肇、李.. 2024. 1. 6. 요사遼史 야율분노耶律盆奴 호독근胡獨堇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아율분노耶律盆奴는 字가 호독근胡獨堇이라 척은惕隱 날로고涅魯古의 손자다. 경종景宗 시대에 마고부馬古部 상은詳穩이 되어 다스림이 언제나 엄하고 급하니 백성들이 그것을 고통스럽게 여겼다. 담당 부서에서 이런 소문을 보고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리기를 “분노는 한 쪽 지방 일을 맡아 세세한 일까지 따져 물으니 위엄과 신망이 손상당하지 않을까 한다”면서 마군태보馬群太保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 통화統和 16년(998)에 몰래 연燕 지방 군대에 복무하는 자로서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 자를 살펴 그들을 도태케 했다. 28년(1010), 황제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분노를 선봉으로 삼았다. 동주銅州에 이르러 고려 장수 장조康肇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우리 군대에 저항하니 군영 하나는 동주 서쪽.. 2024. 1. 6. 요사遼史 소배압蕭排押·소항덕蕭恆德(소손녕蕭遜寧) 형제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배압蕭排押은 자가 한은韓隱이다. 국구國舅 소부방少父房의 후손이다. 지략이 많았고 말을 잘 탔다. 통화統和 초년(983)에 좌피실상온左皮室詳穩이 되어 조북阻卜 토벌에 공을 세웠다. 통화 4년(986)에 송나라 장수 조빈曹彬과 미신米信의 군사를 망도望都에서 깨뜨렸다. 무릇 군대와 관련한 일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매번 결정에 참여하였다. 조금 지나 영흥궁永興宮 몫의 규糾와 사리舍利와 예랄拽刺과 이피실二皮室 등의 군대를 총괄하여 추밀사樞密使 야율사진耶律斜軫과 함께 연산燕山 서쪽 지역 함락되었던 고을들을 수복했다. 이해 겨울에 송나라를 칠 때 선봉이 되어 만성滿城을 포위 공격하여 소속 군대가 먼저 성에 올라가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 바뀌었다. 위국공주.. 2024. 1. 6. [독설고고학] 형식분류 제작기법 축조기술은 투고 자체를 원천봉쇄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고고학은 당장 어찌해야 하는가?저거다.형식분류 제작기법 축조기술 타령 일삼는 그 어떤 논문도 투고 자체를 원천 금지하며 그런 논문이 들어와도 자동으로 퇴짜를 놓아야 한다.사람이 아닌 물건을 천착한 논문은 그 어떤 것도 게재해서는 안 된다.왜?쓸데없기 때문이다.물레를 돌렸건 말건 그딴 거 이젠 하나도 안 중요하다.부엽공법 이제는 눈꼽만큼도 새삼스럽지 않다.보축이 뭐가 대단하단 말인가?무너지면 다시 쌓는 거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무너짐을 막고자 부엽하고 보축하는 일 너무나 당연하다.문화권별 토기 양태 달라야지 안 다른 게 있다면 그게 문제이지 다른 게 왜 문제인가?말 같잖은 소리 이제 그만 둘 시점이다.멀쩡한 삼국사기 비틀어 고고자료 지 꼴리는 대로 조작해서 고구려가 475년 전쟁과 더불어 한강.. 2024. 1. 6. 치아 마모도는 곡물 도정과 관련이 있을 것 사람의 치아는 계속 닳는다. 요즘은 그 정도로 닳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고인골의 치아를 보면 치아의 수질 부분까지 다 노출되도록 닳은 경우가 많다. 이렇게 닳은 모양을 보고 거친 음식 때문이라고 대개 추정을 하거나 아니면 밀과 같이 가루를 만들어 빵을 굽는 경우에는 가루를 만들때 미세한 돌가루가 섞여 들어갔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엔 거친 음식이라 하면 역시 애매하다. 거친 음식으로 예를 들어 식물성 섬유를 과거에 요즘보다 많이 섭취한 것을 들기도 하는데 식물성 섬유 때문일까? 필자가 보기엔 이빨을 가장 빨리 닳게 만드는 건 식물성 검유나 미세한 돌가루가 아니라 곡물의 도정 정도다. 정말 잡곡과 도정이 덜된 쌀로 밥을 지어 먹으면 거친 밥이라는 게 뭔가를 실감하게 되는데 특히 이걸 .. 2024. 1. 6. 독자 제로인 글을 논문이라 발표하는 개떡 같은 세상 직업적 학문 업계서 매양 나오는 불만 중 하나가 그런 이야기는 내가 이미 발표했는데 그것도 읽지 않아느냐는 것이니 또 하나 설혹 그것을 참고했다 인용문헌 참고문헌에 밝혀놨다 해서 모름지기 그가 내 논문을 읽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니 그 인용맥락을 보면 거의 백퍼 내 주장을 오도하거나 정작 중요한 지점은 쏙 빼버리고 엉뚱한 데를 강조 오도한 일을 부지기로 본다. 이건 내 경험이기도 하고 여타 주변 사람들도 거개 반응이 같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정작 내 글을 인용하기는 했는데 엉뚱한 데다 인용처를 밝혀주면서 정작 내가 주장한 건 아무런 인용도 없이 지가 주장한 것처럼 처리한 일이니 이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다. 더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은 나중엔 그 놈 글을 인용하면서 내 글은 쏙 빼어버린 경우다. 이런 .. 2024. 1. 6. 건강과 음식은 관련이 있다 필자가 요즘 음식에 매달리는 것은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은 아니고, 이유가 있어서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건강은 음식과는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보면 고인골의 치아 마모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같은 나이인데도 치아 마모도가 다르다. 이런 건 결국 먹는 음식의 성격 때문이다.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풀리는 부분이 많다. 아마도 먹는 음식의 종류나 쌀이 도정 정도가 치아 마모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걸 과연 낱낱이 밝힐 수 있을것인가 하는 의문은 필자에게도 있지만, 어쨌건 한국에 대해서도 이런 작업은 있어야 하고 또 이걸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관련 자료의 축적량이 만만치 않다. 필자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단지 몇 번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며 앞으로 이 블.. 2024. 1. 6.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1) 신라 공주를 취한 마를 캐는 백제 아이 이 선화공주 건은 여러 번 산발로 다룬 적이 있지만 이참에 제대로 정리해 보고 싶어 다시 붓을 댄다. 이 문제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그것을 필사한 소위 진본인가? 아니면 그 필사자인 남당 박창화라는 사람이 꾸며낸 역사소설인가를 판별하는 데도 가늠자가 된다. 백제 무왕武王은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 의하면 본명이 장璋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서기 600년,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재위 42년째인 641 봄 3월에 훙薨했다. 그의 본기에서는 시호를 무武라고 하고는 사신을 당에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 “임금의 외신外臣인 부여장扶餘璋이 졸卒했습니다”고 아뢰니, 황제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고 한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방도는 총애로운 책명보.. 2024. 1. 6. [독설고고학] 그릇은 그릇에 어울리는 역사가 있다 언젠가 한 말이지만, 어떤 미친 놈이 21세기 대한민국사를 쓰는 데 그릇으로 쓴단 말인가? 물론 그릇에는 그릇에 어울리는 역사가 있다. 그 자체 완결성을 갖기도 하는 주제 혹은 소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거기에 없는 권력을 집어넣고 거기에 없는 정치를 집어넣어 오직 그것으로써 문화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시대 정치문화사를 쓰는 데 그릇은 데코레이션이다. 우리네 고고학 사정은 어떤가? 죽어나사나 토기타령에 정치타령이라, 그래 토기 분포를 보아 어떤 특정 정치체가 영향을 미친 범위를 추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정치 자체로 치환될 수는 없다. 토기가 중요한가? 당연히 중요하다. 사람이 어찌 그릇 없이 살 수 있겠는가? 그렇다 해서 그것이 정치요 권력이다?.. 2024. 1. 6. 밥짓는데 쓴 토기는 "와분" 삼국유사를 보면, 진정법사가 딱 하나 있던 쇠솥을 시주하고 토기로 밥을 지었다 하는 구절에서, "와분"이라 하였으니 乃以瓦盆爲釡, 熟食而飬之 아래 밥 짓는데 쓴 것 같은 시루 토기는 최소한 고려시대까지는 와분이라 불렀던 모양이라, 와분이라면 그 당시에 이미 저건 그릇도 아니라는 의미도 있는 듯. 밥 짓는데 썼을 토기. 삼국유사에는 "와분"으로 나온다. 뭐 당시의 고유명사였는지는 모르겟지만, 철솥이 나온 후의 토기의 운명을 짐작하게 하는 이름이다. *** 盆 《禮記‧禮器》: “夫奧者, 老婦之祭也, 盛於盆, 尊於瓶。” 鄭玄 注: “盆、瓶, 炊器也。” 2024. 1. 6.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간절한 마음만큼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이루고자 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넘어서야 하는 한계를 “문”에 비유하고 있다. 이 말은 한편으로 노력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노력이 부족했거나, 덜 간절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결국은 문을 열지 못한 당신의 노력이 부족했던 거라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더 많이, 더 열심히 해야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동안 나는 덜 간절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인가? 요즘, 약간의 번아웃이 오면서 드는 생각, “그동안 나는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24. 1. 6. 7세기 신라의 밥솥 상황 삼국유사 권 5의, 真定師孝善雙羙을 보면 7세기 신라의 밥솥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法師真定羅人也. 白衣時隷名卒伍, 而家貧不娶. 部役之餘傭作受粟以飬孀母. 家中計産唯折脚一鐺而已 一日有僧到門求化營寺䥫物, 母以鐺施之. 旣而定従外敀. 母告之故且虞子意何如厼. 定喜現於色曰, “施於佛事何幸如之. 雖無鐺又何患.” 乃以瓦盆爲釡, 熟食而飬之. 진정법사라는 이는 의상의 제자라니 아마 통일기의 승려인 듯하고, 그의 출가 이전 상황을 보면 집이 가난해서 재산이라고는 다리 부러진 鐺하나였다는데, 鐺이 뭔지 모르겠지만, 일본쪽 설명을 보면 다리 셋 달린 솥이라 하니 그렇다면 정과 비슷하지만 다른 쇠솥이었나보다. 재미잇는 건 이 다리 부러진 쇠솥도 절에 시주해버리고 나니 집에서는 밥짓는데 瓦盆을 솥으로써서 밥을 지어 어머니를 부양.. 2024. 1. 6.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역주 [1] 지리 From The Germany and the Agricola by Tacitus; The Oxford Translation, Revised, with Notes; The Handy Book Company: Reading, Pennsylvania GERMANY THE SITUATION, MANNERS AND INHABITANTS OF GERMANY [ Part 1 ] The Geography of Germany — Origin of the People of Germany — The German Hercules — Appearance of the Germans — Character of the Country — Description of Armor — Election of Kings — Respect Pai.. 2024. 1. 6. 역사를 통괄하는 남색男色 간단히 말한다. 이 경우 남색이란 남자 호모를 말한다. 《화랑세기》 얘기다. 이 화랑세기에는 남색이 적지 않게 나온다. 특히 법흥왕은 여자도 많았지만 남자 애인도 적지 않았다. 이 남색을 두고 화랑세기 진본론자이기는 마찬가지인 이종욱 전 서강대 총장과 나는 적지 않은 충돌을 일으켰다. 이종욱 선생은 단순한 총신寵臣으로 봤고, 나는 호모라고 봤다. 하도 열받아서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에서 호모 얘기 열라리 했다. 이종욱 선생과 내가 금이 간 여러 요인 중 작은 것에 해당한다. 졸저 출간 이후 《고려사》를 통독할 일이 있었다. 그 긴 《고려사》를 통독하다 보니 적지 않은 왕의 남자 애인이 등장했다. 심지어 그 남자 애인들의 족적을 보니 완연히 신라시대 화랑의 복사판이었다. 그리고 중국사를 통괄하니.. 2024. 1. 6. 국물을 부르는 잡곡 찐밥 잡곡 찐밥은 국물을 부른다. 필자 생각에는, 잡곡 찐밥을 주로 먹던 부여 고구려인들은 국물을 끼고 살았을 거라고 본다. 필자는 된장과 콩간장은 부여 고구려인이 처음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하는데, 생각보다 된장을 이용한 국은 기원이 올라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된장국이 있다면 잡곡찐밥도 간단히 말아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밥에 국을 붓는 것이 먼저였을까 국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이 먼저였을까. 잡곡 찐밥이 국물을 부르는 이유는 이렇다. 찐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밥을 끓이다 뜸들이는 방식의 취사만큼 곡물에 함수율을 높일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잡곡 찐밥이 거칠다고 느끼는 이유는 필자가 보기엔 함수율이 낮아서 그렇다. 함수율이 올라가면 훨씬 먹기가 편할 것이고 그것이 필자가 생각하기에 바로 국이다... 2024. 1. 6. 다시 핵폭탄으로 등장한 미성년자 성착취 엡스타인 문건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으로 미성년자 여자 수십 명한테 성관계 강요를 비롯한 각종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복역 중 2019년 감옥에서 자살한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소식은 우리 THE HERITAGE TRIBUNE에서도 다룬 바 있거니와, 근자에는 그의 재판 관련 문건들이 법원 판결에 따라 공개됨으로써 다시금 핵폭탄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이미 기간 그가 주선 혹은 강요한 미성년 여성들과 성관계하거나 그런 혐의가 짙은 인물에는 영국 왕자 앤드루와 빌 게이츠 같은 거물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쓴소리 대마왕으로 일컫는 저명한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이 영감탱이는 그에게 돈을 굴려달라 했다든가 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대중매체에 이른바 셀렙이라 해서, 그것이 조작한 선한 이미지 혹은 정의의 이미지로 무장한 사람들이.. 2024. 1. 5. 이전 1 ··· 384 385 386 387 388 389 390 ··· 104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