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15251

전재산 학교에 기부한 울트라 거부 최송설당의 유산, 문화재가 되다 통영 중앙·항남동 일대 구도심 1만4천㎡ 등록문화재 됐다송고시간2020-03-09 09:32박상현 기자목포·군산 등 이어 6번째 근대역사공간…김천고 본관·수원역 급수탑은 등록 예고 2017년 1월 30일, 나는 이렇게 썼다. 졸업하고는 처음 찾은 모교. 나도 변했듯이 학교 역시 상전벽해라 그 옛날 익숙한 풍광 중엔 적벽조 본관과 교련 훈련하던 운동장, 그리고 교주 최송설당 할매만 남았을 뿐이다. 마침 모교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시간이 좀 남아 번갯불 콩볶아 먹듯 다녀왔다. 여유가 좀 있었더라면 송설당 할매 묘소라도 참배했을 것이다.…황악산 추풍령에서 내리몰아치는 바람이 매섭더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 본관은 아마도 근대문화재 등록해야 할 듯 싶다. 오늘 문화재청이 문화재로 등록예고한 것 중 단연 내가.. 2020. 3. 9.
[중국탑] 승묘보성견뢰탑 崇妙保聖堅牢塔 崇妙保聖堅牢塔 (위치 : Fujian, Fuzhou, Gulou District, Fuzhou, 중국) 당唐 정원貞元 15년(799) 처음 세웠다. 원래 이름은 ‘무구정광탑无垢淨光塔’이며, 당나라 말에 훼손되었다가, 오대五代 진晋 천복天福 6년(941) 중건되었고 다시 이름을 ‘숭묘보성견뢰탑崇妙保聖堅牢塔’이라 칭했다. 원래 9층으로 계획했다가 944년 왕이 죽고 7층까지만 올린 채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속칭 ‘복주오탑(福州)烏塔’으로 일컫는다.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풍화로 약간 검은색으로 변색하자 붙인 이름이다. 烏塔이란 글자 그대로는 까마귀탑이란 뜻이다.) 높이는 약 34미터. 명明 천계天启 원년(1621)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1층 각 모서리 신장상은 이때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청清 강희康熙 .. 2020. 3. 9.
신천지의 앞날...이 땅에 명멸한 신흥종교들이 걸은 길 신천지 어떻게 될까…신흥종교 사례로 본 예상 시나리오송고시간2020-03-09 06:00창교주 구속이나 사망이 분열과 몰락 낳는 사례 많아비리 드러나거나 예언 빗나가도 교리 바꿔 존속 꾀해 신천지 시리즈 제3탄이다. 1탄에서 기존 종교가 보는 신천지는 어떠하며, 그에 대한 신천지 반론은 무엇인가를 짚었고, 2탄은 기성 교단에서는 이단이라는 지탄받는 그들이 어떤 힘을 기반으로 폭풍 성장을 이룩했는지를 들여다 봤다. 이번 3탄에서는 그들의 앞날을 점검한다. 우리가, 혹은 이 글을 쓴 기자가 용한 점쟁이도 아닐진대 그들이 향후 어떤 길을 걸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해방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신흥교단들이 어떤 전철을 밟았는지를 들여다봄으로써, 혹 신천지 역시 그런 여러 갈래 중 하나를 밟지 않을까 조.. 2020. 3. 9.
'풍납토성'이 없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노느니 염불하는 심정으로 심심풀이 땅콩으로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을 들어가봤다. 지정문화재 관련 정보는 다 제공한다 보면 된다. 지방지정문화재까지 커버하는 것으로 안다. 어떤 문화재를 검색해 보까 잠시간 머뭇하다가 그래도 '풍납토성'이 한때 내가 미쳐 날뛰던 곳이라 그걸 두들긴다. 오잉? '풍납토성'이라는 키워드를 두들겼는데 결과는 저렇다. 검색결과가 없다니????풍납토성이 사라라졌나? 지정해제됐나? 그 유명한 풍납토성이? 대가리를 굴린다. 그래 우리 공무원들 심성을 고려해서 다른 키워드를 넣어본다. 지금의 풍납토성은 이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풍납리토성'이라는 공식 이름을 얻었으므로, 풍납리토성이라는 키워드를 넣어봤다. 역시나 엄따!!! 대체 우째된 일인가? 할 수 없이 다 빼고 '풍납'이라고 .. 2020. 3. 9.
육감한 버들강아지한테 물은 말 이대로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질곡에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 과감히 마스크 벗어제끼고 무작정 차를 몰아 야외로 나섰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언제나 이럴 때면 언제나 달려가는 그 코스를 잡았으니 냅다 이른 고달사지 원종대사 무덤 앞을 지나치는데 버들강생이 한껏 물 길어 터질 듯 하다. 그러고 보니 나만 퇴보를 거듭해 이젠 낭으로 떠러지하기 일보의 직전이라 저는 성큼섬큼 코끼리 걸음처럼 코뿔소 들이받듯 그리도 질풍처럼 달렸구나. 내친 김에 껍데기 홀라당 벗겨 버들피리라도 맹글어 만파식적마냥 불어제꼈음 싶지만 이제는 불쌍터라. 남한강 건너 원주 치달으니 이곳 역시 다름이 없어 생강 산수유 모두 뻥튀기 직전 강냉이였으니 잊고 살았노라 봄이 득시걸하는 계절임을 능선 오르는데 음지도 아닌 등산로 따라 이끼 연두 놀.. 2020. 3. 8.
성급한 꽃은 벌써 시들고 Spring over the Nakdong River 어릴적 통일호 기차타고 아버지랑 부산가던 생각이 난다. 낙동강변 양산 원동역은 벌써 꽃이 시든다 2020. 3. 8.
만고萬古를 덮친 흥원창의 일몰 " target="_blank" rel="noopener" data-mce-href="http:// 흥원창은 興原倉 혹은 興元倉이라 쓰는 두물머리다. 한강 2대 본류 중 하나인 남한강에 섬강이라는 샛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런 데에는 조창漕倉이 발달하게 된다. 고려, 조선시대에 설치한 조창이 바로 흥원창이다. 이런 데는 물산집산지라, 주변에 도시가 발달하게 된다. 설명에서 한강물이 흐르는 방향을 설명한 부분이 거꾸로다. 참고했으면 싶다. 흥원창이 차지하는 지리적 특성은 앞 다음 항공지도를 참조하되 아래 지도도 아울러 고찰하라 2020. 3. 8.
크기 가늠을 위해 자빠뜨린 중년 "저 돌삐 올라가 바레이" "왜? 또 인간 스케일바 하라고?" "두 말 함 잔소리지 너 같음 사람없음 크기가 가늠되니?" "됐수?" "안되겠다. 짜리몽땅해서 독자들이 잘 모를끼라. 자빠뜨리야겠다. 엎띠리." 자빠뜨맀다. "짧아서인가? 크단 포가 안나여. 니 키 얼마고, 20년전 62이라 캤는데 마이 쭐었제?" 원주 거돈사지 당간지주다. 당간지주幢竿之柱야 글자 그대로 당간이란 거대 장대를 가운데가 찡가서 공구는 지탱물이라 보통은 2점 세트라, 이 당간지주는 첫째, 세운 적이 있는지 그 자체가 의심을 사고 둘째, 그 세트로 생각되는 나머지 1점이 이곳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는 점에서 의아함을 자아낸다. 세우려다가 시공업체 부도로 중단된 듯하다. 흔히 크기, 특히 높이 기준으로 국내 최대 당간.. 2020. 3. 8.
문체부가 자초한 국립오페라단 두 단장 시대 법원 "윤호근 해임취소"…국립오페라단 초유 '한지붕 두 단장'송고시간2020-03-08 07:00송광호 기자윤호근 전 단장 "내일부터 당장 출근"…지휘체계 혼란 불가피 나는 해직기자였다. 그러다가 소송을 통해 대법원까지 가서 최종 승소해서 복직했다. 그 기간 나는 내내 해직 실직 상태였다. 물론 난중에 못 받은 월급은 한몫에 몰아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가 아무리 무던한 놈이라 해도, 이런 사안에 내가 좀 더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이 사태 도무지 나로서는 이해불가였다. 이 사안이 불거졌을 때 그 사안,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과정 모조리 나로서는 이해불가였다. 먼훗날 회고록에서나 할 법한 얘기지만, 러프하게 이야기하자면 이거 해고할 수 없다는 말, 나는 이미 전달했다... 2020. 3. 8.
상산채미무上山採蘼蕪, 어쩌다 마주친 옛남편 산에 올라 궁궁이를 캐고는[上山採蘼蕪] 시대 : 後漢작자:모름 산에 올라 궁궁이 캐고는산 내려오다 옛 남편 마주쳤네무릎 꿇고 옛 남편한테 묻기를새로 들인 사람 어떠하더이까?새 신부 좋다 하지만 옛 부인만큼 곱진 않다오얼굴이야 비슷하다지만 솜씨는 같지 않다오새 사람 대문으로 들어오고옛 사람 쪽문으로 나갔지요 새 사람 누른 비단 잘 짜고옛 사람 흰 비단을 잘 짰다오누른 비단 하루에 한 필이지만흰 비단은 다섯 장 넘었지요누른 비단 흰 비단과 견줘보니 새 사람이 옛 사람보단 못하다오 上山採蘼蕪 下山逢故夫 長跪問故夫 新人復何如 新人雖言好 未若故人姝 顏色類相似 手爪不相如 新人從門入 故人從閤去 新人工織縑 故人工織素 織縑日一匹 織素五丈餘 將縑來比素 新人不如故 참 평이해서 어려운 구석이 없다. 그 첫 구절에서 따온 제목.. 2020. 3. 8.
김학의별장을 찾아서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찾다 문이 닫혀 안쪽으로 드가진 못했다. 개가 몇마리 요란히 짖어대는 걸 보니 사람이 상주한다. 면사무소 인근 다방 사장이 이르기를 옛날에 한번 들어가 봤다는데 깊고 건물이 여러 채라 한다. 전면으론 남한강이 유유하다.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2118-2에 소재하는 김학의별장이다. 위성사진으로 보니 이 별장 전체 조감은 이렇다. 상당히 크다. 맨 뒤쪽에는 수영장 같은 데도 보인다. 2020. 3. 7.
미공개 근무일지-이럴거면 이정도즘이야, 훗. 정리 전 정리 후 2020.3.7.(토) 이럴거면 건들지말걸... 감당이 안된다... 2020. 3. 7.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驪州上橋里高麗石室墓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驪州 上橋里 高麗 石室墓) 지정번호 : 경기도기념물 제198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산46-1 고달사지가 위치한 고달 부락 뒷산에 위지한 이 고분은 상감청자 조각을 비롯한 몇 가지 발굴한 유물을 통해 고려 말기에 만들었다고 추정되며, 그 모양이 특이해 고려시대 묘지 연구에 기이한 사례를 제공한다. 발굴하기 전에는 현실玄室 위쪽 기단부는 완전히 흙에 묻힌 상태였고, 기단 2층과 석실石室 입구 부분에서는 돌만 노출된 상태였다고 한다. 발굴은 1983년 11월 ~ 12월 한양대박물관 발굴단이 실시했다. 그 결과 아래쪽 석실은 평면 원형이며 무덤길인 연도羨道가 달려있고, 위쪽은 방형方形인 2층 기단으로 밝혀져 그 구조상 특성을 살려 상방하원上方下圓 석실묘石室墓란 명칭이.. 2020. 3. 7.
[중국탑] 신통사 사문탑 神通寺四門塔 神通寺 四門塔 중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석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위치 : Licheng District, Jinan, Jinan, Shandong) 석재를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쌓아 올린 형식이라는 점에서 꽤 오랫동안 경주 분황사 석탑 등 우리나라 모전석탑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경향은 두 석탑 간 양식적 연관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사문탑에 사용된 석재의 크기는 170cm × 43cm, 124cm × 57cm, 87cm × 30cm로 분황사 석탑에 사용된 석재와는 차이가 크다. 이를 보면 사문탑의 축조 방식은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를 쌓는 ‘벽돌쌓기’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사실, 나도 직접 보기 전까지 이 크기의 차이를 별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막.. 2020. 3. 7.
바리깡이 쥐어뜯은 청춘 [순간포착] '바리캉' 사라진 학교에 불어온 자유의 바람송고시간 2020-03-07 08:001982·1983년 시작된 중고생 두발·교복 자율화 고3 때인가 2때인가 암튼 소풍갔을 적이다. 어모 혹은 감문 쪽 아니었나 하는데 저때는 마이클 잭슨 시대라, Billie Jean이 moon walk로 선풍하던 시대였다. 두발 자율화 시대라 대체로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내려오는 장발의 시대였다. 이채로운 점은 1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교련복을 걸쳤다는 사실이다. 저 무렵은 이미 교복 자율화 시대였고 저 소풍 때도 교련복을 걸쳐야 한다는 규율을 없었다고 기억하지만, 어이한 셈인지 모조리 교련복 차림이다. 왜 교련복이었을까? 이 물은 왜 직장인이 양복을 주로 걸치는가 하는 의문과 연동한다. 왜 양복인가? 편하기 때문.. 2020. 3. 7.
미공개 근무일지-그런 날 2020.3.6(금) 아침 출근하는데, 날이 정말 좋았다. 그대로 퇴근하고 싶었다. 2020. 3. 7.
코로나 뚫고 성큼성큼하는 연등 거의 매일 한번은 지나는 조계사. 어제 각중한 만남에 어랏? 하고 말았으니 조계사가 연등으로 덮히고 있었다. 캘린더를 뒤진다. 사월초파일이 그레고리우스력으로 언제던가? 4월 30일이다 올핸 좀 빠르다. 조만간 윤달이 있겠다 싶다. 늘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오신날 코앞이라 이미 절간은 그 준비에 들어간 모양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느 때보다 뒤숭한 싯타르타 생일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진 이 난국이 좀 수그러들지 않겠냐 기대하지만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 우중충함에 울긋불긋 알록달록한 공중을 보니 그런대로 기분은 좀 풀리다. 2020. 3. 7.
《징비록懲毖錄》은 당파주의 서술이라 값어치가 있다 내 서재에 보유한 《징비록懲毖錄》 역본 혹은 역주본은 다섯 종 정도에 이를 것이다. 축약본 어린이용까지 합치면 기하급수다. 개중에 나는 이재호 선생 역본을 선호한다. 이유는 첫째, 《징비록》을 《징비록》 그대로, 다시 말해 당파주의적 시각 그대로 읽고자 하는 흐름의 대표이기 때문이요 둘째, 번역의 안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재호 선생 이상 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이 역본엔 원문을 첨부했으니, 석연찮은 대목은 나대로 다른 생각을 하게끔 하니 이 또한 요긴하다. 왜 《징비록》을 《징비록》의 시각대로 읽을 필요가 있는가? 그래야만 《징비록》이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은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순전히 애끓는 애국충정과 과거를 반성하고자 쓴 글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본인.. 2020. 3. 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