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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패(良貝) 신라 진성여왕 막내아들로 당에 사신으로 간 행적 말고는 이렇다 할 흔적이 없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陁知)' : 이 왕(진성여왕) 때의 아찬(阿飡) 량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백제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우리말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량패공(良貝公)이 이를 근심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못 위에다가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았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양패공.. 2018. 3. 21.
부호(鳧好) 신라 하대 진덕여왕 때 권신 각간 위홍의 부인이자, 진성여왕의 유모로 그 역시 권력을 좌지우지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陁知) :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魏弘迊干) 등 3~4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陁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세를 잡은 신하들은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이 글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고는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리하여 거인을 옥에 가두자 거인은 시(詩)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이에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2018. 3. 21.
부호부인(鳧好夫人) ☞부호(鳧好) 2018. 3. 21.
양패(良貝) ☞량패(良貝) 2018. 3. 21.
위홍(魏弘) 신라 하대인 헌강왕~진성여왕 시대 정국을 좌우한 신료다. 헌강왕 즉위와 더불어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올랐고, 이후 각간으로 진급하고, 진성여왕 시대에는 왕과 농밀한 관계를 발판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이런 그를 어떤 기록에서는 진성왕의 남편이라 했다. 진성여왕 시대에는 승려 대구와 더불어 향가집인 삼대목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가 죽자 진성여왕은 혜성대왕에 추봉했다.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헌강왕 : 헌강왕(憲康王)이 왕위에 올랐다...즉위하여 이찬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예겸(乂謙)을 시중으로 삼았다.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진성왕 : 2년(888) 봄 2월에 소량리(少梁里)의 돌이 저절로 움직여 갔다. 왕은 평소 각간 위홍(魏弘)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이.. 2018. 3. 21.
진성여왕(眞聖女王) 신라 제5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887∼897년이다. 앞선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연이은 실정과 문란한 생활이 농민반란을 불렀다 해서 헌강왕 서자인 요(嶢)한테 선위하고는 물러났다. 재위기간 중에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역사는 그의 문란한 행실 중 대표격으로 삼촌 위홍과의 애정 행각을 들었지만, 신라시대 근친간 결혼까지 흔했다는 점에서, 이는 후대 악의적인 평가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제11(신라본기 제11) 진성왕 : 진성왕(眞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만(曼)으로, 헌강왕의 여동생이다. 크게 사면하고 여러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고 왕이 몸소 거둥하여 설법(說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다.2년(888).. 2018. 3. 21.
응렴(膺廉) 신라 제48대 왕인 경문왕의 이름☞김응렴 ☞경문왕 2018. 3. 21.
김응렴金膺廉 신라 제48대 경문왕 본명이다. 삼국사기 권제11(신라본기 제11) 헌안왕 : 4년(860) 가을 9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족 응렴(膺廉)이 15세의 나이로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그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갑자기 물었다. “너는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공부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는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저는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착한 행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왕이 “어떤 것인가?” 하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사람은 귀한 집 자제이면서 남과 사귐에 있어서는 자기를 먼저 하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집에 재물이 넉넉하여 사치스러운 옷을 입을 수 있는데도 항상 삼베와 모시옷으로 스스로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한 .. 2018. 3. 21.
만(曼) ☞김만(金曼) ☞진성왕(眞聖王) 2018. 3. 21.
만헌(曼憲) 신라 제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 본명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은 김씨다. 이름은 만헌(曼憲)이니 곧 정강왕(定康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魏弘) 대각간이니, 혜성대왕(惠成大王)에 추봉됐다. 정미년에 즉위해 10년을 다스렸다. 정사년에 소자(小子) 효공왕(孝恭王)에게 양위하고는 12월에 붕했다. 화장해서 뼈를 흩어 뿌리니 모량(牟梁)의 서악(西岳)이란 곳인데, 미황산(未黃山)이라고도 한다.☞김만(金曼) ☞진성왕(眞聖王) 2018. 3. 21.
김만(金曼) 신라 제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 본명이다. 삼국사기 권제11(신라본기 제11) 진성왕 : 진성왕(眞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만(曼)으로, 헌강왕 여동생이다. ☞진성왕(眞聖王) 2018. 3. 21.
니문(尼文) 신라 진흥왕 때 악공인 '니문(泥文)'에 대한 다른 표기다.삼국사기 권제4(신라본기 제4) 진흥왕 : 12년(551)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꿨다. 3월에 왕이 순행(巡行)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 제자 니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따로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케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12현금(十二弦琴)을 만드니, 그것은 12달 음률을 본뜬 것이다. 이에 우륵에게 곡을 만들게 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갖고 우리에게 귀의했다. 그 악기 이름은 가야금(加耶琴)이다.☞니문(泥文) 2018. 3. 21.
니문(泥文) 생몰년 미상. 신라인. 우륵의 제자로서 '니문(尼文)'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진흥왕이 재위 12년(551) 낭성(娘城)으로 순행(巡行)하는 길에 스승 우륵과 함께 하림궁(河臨宮)이란 곳에 불려가 가야금곡을 연주했다. 그가 지은 가야금곡으로는 3가지 곡명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그 이름이 까마귀, 쥐, 메추라기 등 모두가 동물 이름이라는 사실을 주목거리다. 까마귀와 쥐 같은 동물은 삼국유사 사금갑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동물인데, 이러한 동물들과 관련 있는 곡명이라는 점이 이채로울 뿐이다.삼국사기 권 제4(신라본기 제4) 진흥왕 : 12년(551)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꿨다. 3월에 왕이 순행(巡行)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 제자 니문(.. 2018. 3. 21.
이문(泥文) ☞니문(泥文) ☞니문(尼文) 2018. 3. 21.
이문진(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 대학박사로 고구려 역사를 5권으로 요약한 신집(新集)을 엮었다.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 2018. 3. 21.
설원랑(薛原郞) 신라 7세 풍월주다. 나중에 설화랑(薛花郞)으로 바꾸었다. '薛'은 성씨이며, 원효의 조상이다. 화랑세기 설화랑 전 : 7세 설화랑(薛花郞)은 처음 이름이 설원랑(薛原郞)이다. 금진낭주(金珍娘主) 사자(私子)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성이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니,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인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 처녀로 아름다운 이를 뽑아 원화(.. 2018. 3. 21.
Songgwangsa Temple in Spring Suncheon, Jeollanamdo Province順天松廣寺 / 순천 송광사, Photo by Seyun OhSonggwangsa (Hangul: 송광사; Hanja: 松廣寺) translation: Spreading Pine Temple; alternates: Songgwang-sa, or Songgwang Sa, or Songkwangsa; also known as: Piney Expanse Monastery; originally: Gilsangsa), one of the three jewels of Seon Buddhism, is located in South Jeolla Province[4] on Mount Songgwangsan on the Korean Peninsula. Situated a.. 2018. 3. 21.
Songgwangsa Temple Songgwangsa Temple, Suncheon, Jeollanamdo Province 順天松廣寺 / 순천 송광사 Photo by Seyun Oh Songgwangsa (Hangul: 송광사; Hanja: 松廣寺) translation: Spreading Pine Temple; alternates: Songgwang-sa, or Songgwang Sa, or Songkwangsa; also known as: Piney Expanse Monastery; originally: Gilsangsa), one of the three jewels of Seon Buddhism, is located in South Jeolla Province[4] on Mount Songgwangsan on the Korean .. 2018. 3. 20.
김유신의 정년퇴직과 삽질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武王) 上에는 이 왕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늙었음을 이유로 정년퇴직하겠다고 했지만, 윤허하지 아니하고 궤장을 하사했다(春正月 金庾信請老 不允 賜几杖)"고 한다. 궤장이란 등받이 의자인 안석(案席)과 지팡이라, 늙은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하사품이다. 이를 하사받으면 그런 신하는 예외없이 대궐에 들어서면서 내리지 않아도 되고, 그 문을 들어설 때는 허리를 굽히지 아니해도 된다. 물론 이런 영광이 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공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궤장은 곧 은퇴의 의미이기도 했으니, 세대교체를 위해 이제 그만 골방 늙은이로 물러나 있으라는 완곡한 뜻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왕조시대에 정년퇴직은 70세였다. 이는 이미 《예기(禮記)》에서 규정한 것으로,.. 2018. 3. 20.
김유신론 (번외판) 70세에 사표 던진 김유신, 맘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 효소왕본기를 보면 원년(692) 8월에 "대아찬 원선(元宣)을 중시로 삼았다(以大阿飡元宣爲中侍)로 삼았다"고 하고, 그 3년 뒤인 같은 왕 4년(695) 겨울 10월에는 "중시 원선이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中侍元宣退老)"고 한다. 이 원선은 김원선(金元宣)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 계보가 보이지 않으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흠순(金欽純)의 아홉 아들 중 여섯째다. 그가 언제 출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출생 시기를 대략 짐작할 근거는 있다. 그의 아버지 김흠순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생몰년이 없지만, 김유신 동생이라 했으니, 형이 태어난 595년 이후 출생해야 한다. 《화랑세기》에는 그가 599년, 건복(建福) 16년이자 진평왕 21년에 태어나 8.. 2018. 3. 20.
김춘추金春秋 603년 ~ 661년, 재위 654∼661년. 진지왕 손자이면서 아버지는 이찬(伊飡) 용수(龍樹)인데,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작은아버지 용춘(龍春)에게 입적됐다. 어머니는 진평왕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첫 부인 보라(寶羅)에게서 딸 고타소(古陀炤)를 두었으며, 이어 625년 무렵 김유신의 누이 문희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문무왕 김법민 이하 자식들을 둔다. 김유신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세력을 키운 그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씨가 마르자, 진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풍월주 출신인 그는 즉위 전에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약하면서 대중국 외교전을 수행했으며, 즉위한 뒤에는 당의 지원을 이끌어내숙적 백제를 멸망시킨다. 곧이어 고구려 정벌에도 나섰으나, 실패하고는 사망한다. 舊唐書.. 2018.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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