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17119 유신(庾信) ☞ 김유신(金庾信) 2018. 2. 23. 유신공(庾信公) 김유신(金庾信)을 높여 이르는 말. ☞ 김유신(金庾信) 2018. 2. 23. 흘우(屹于)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다루왕본기 : 3년(서기 30) 겨울 10월에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10필과 조(租) 500섬을 상으로 주었다.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죽으니[卒]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10년(서기 37) 겨울 10월에 우보 흘우를 좌보(左輔)로 삼고, 북부의 진회(眞會)를 우보로 삼았다. 21년(서기 48) 3월에 좌보 흘우(屹于)가 죽으니[卒] 왕이 슬피 곡하였다. 2018. 2. 23. 구태(仇台)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2018. 2. 23. 우태(優台)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2018. 2. 23. 연타발(延陀勃)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2018. 2. 23. 마려(馬黎)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 본기(本紀)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요,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니,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었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2018. 2. 23. 다루왕(多婁王)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다루왕본기 : 다루왕(多婁王)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도량이 넓고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이 재위 28년에 태자로 삼았고, 46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2년(서기 29) 봄 정월에 시조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2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년(서기 30) 겨울 10월에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10필과 조(租) 500섬을 상으로 주었다. 4년(서기 31) 가을 8월에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에 왕이 횡악(橫岳) 아래에서 사냥하였는데 한 쌍의 사슴을 연달아.. 2018. 2. 23. 구파해(仇頗解)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43년(서기 25)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2018. 2. 23. 해루(解婁)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다루왕본기 :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죽으니[卒]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2018. 2. 23. 주근周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해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 허리를 베고 그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2018. 2. 23. 소모(素牟)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2018. 2. 23. 을음(乙音)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의 족부(族父)로, 백제 건국 공신 중 한 명이다. 건국 직후 우보(右輔)가 되어 군사 분야를 전담하다가 온조 재위 41년 사망했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2년(서기전 17) : 3월에 왕이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2018. 2. 23. 고문(高文) 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下 : 7년(648)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 2018. 2. 23. 소부손(所夫孫) 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下 : 7년(648)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 2018. 2. 23. 고임무(高任武) 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下 : 6년(647)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2018. 2. 23. 임무(任武) ☞고임무(高任武) 2018. 2. 23. 고정의高正義 삼국사기 권 제21(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上 : 4년(645)…5월…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황제는]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北部) 욕살(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 2018. 2. 23. 고혜진高惠眞 삼국사기 권 제21(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上 : 4년(645)…5월…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황제는]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北部) 욕살(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 2018. 2. 23. 손대음(孫代音) 삼국사기 권 제21(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上 : 4년(645)…5월…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 사신은]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에서 이겼을 때에,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였으므로, 황제는 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軍.. 2018. 2. 23. 고덕무(高德武) 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 수공(垂拱) 2년(686)에 [황제가]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고, 성력(聖曆) 초년(698)에 이르러 좌응양위(左鷹揚衛) 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고,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 원화(元和) 13년(818)에 이르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악공(樂工)을 바쳤다. 2018. 2. 23. 이전 1 ··· 793 794 795 796 797 798 799 ··· 81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