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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317

합성을 합성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부여 능산리 사지寺址 부여 능산리 중심 사역寺域 구역 발굴 상황을 논할 때 항용 인용하는 국립부여박물관 사진이다. 이거 합성이다. 능산리가 이리 한꺼분에 노출된 적은 없다. 장기간 시기를 달리하며 발굴 노출한 장면들을 대동여지도 이어붙이듯 딱풀로 오려붙인 합성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합성이란 사실은 보고서 어디에도 없다. 자칫 역사 조작 논란을 부를 만한 사안이다. 합성임을 밝혀야 한다. (2017. 6. 8) 2023. 6. 8.
《직설 무령왕릉 추보》 (2) 독자가 없는 텍스트에서 찾은 민족주체성 이건 내가 졸저 《직설 무령왕릉》에 담는다고 하다가 그만 잊어먹고 빠뜨린 대목이라 아쉬움이 크다. 늦었으니 어찌 하리오? 무령왕릉 묘권墓券 제1장 제1쪽은 흔히 무령왕 묘지墓誌 혹은 묘지석墓誌石 혹은 묘지명墓誌銘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무령왕이 언제 몇 살로 죽어 어찌해서 이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간단한 내력을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는 묘지명이 아니라 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관련 증서, 그러니깐 묘권墓券의 일부로써 서문에 해당하는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의하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年 62세 되던 해인 계묘년癸卯年 5월 병술丙戌 삭朔 임진壬辰일에 ‘붕崩’ 했다고 한다. 붕이란 붕 떴다는 말이니 죽었다는 말의 높임 혹은 은유다. 한데 이에서 이 글자를 발견한 이들은 백제가.. 2023. 6. 8.
《직설 무령왕릉 추보》(1) 박물관 뜰의 쌀가마니 어제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미술사학도 강우방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내가 무령왕릉 발굴기를 냈다는 소식을 접하시곤 "무령왕릉이라면 나도 증언할 게 있다"면서 얘기를 쏟아냈으니 이야기인즉 이러했다. 강 선생이 무령왕릉 발견소식을 접하기는 그날 석간 신문을 보고서라 했으니 7월 9일이다. 이때 그는 경주인가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대전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는 냅다 송산리 고분군으로 달려갔댄다. "내가 도착한 게 오전 8시쯤일 거예요. 한데 현장엔 아무도 없더라고? 이게 어찌된 일인가 했지. 무덤 바닥을 보니 빗자루 자국 비슷한 게 있더라고?" 그래서 다시 냅다 공주박물관으로 갔다고 한다. 한데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박물관에 가서 보니 김영배 관장이랑 수위 달랑 두 명만 .. 2023. 6. 7.
쓰레기통에서 구출한 천마총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버스를 기다리는 《천마총》. 크고 무구바서 가방에 안 드간다. 노약자석에 앉히려 했더니 천마총은 경로우대정이 없단다. 올게 나이 천사백인데. (2016. 10. 4) *** 저 보고서가 어찌하여 우리 공장 자료실서 폐기처분되려다가 내 눈에 띄어 극적으로 구출되어 살아남았다. 물론 헌책방으로 가서 새 주인을 찾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같은 새주인 만났으니 다행이지 않겠는가? 2023. 6. 3.
한 번의 실험으로 끝난 국립박물관 국빈 만찬장 활용 과거의 오늘을 살피다 보니, 1년 전 어제(2022. 5. 20)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환영 만찬이 열린 모양이라, 이 일이 청와대 시대 청산과 더불어 그 만찬장을 어찌할 것인지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켰거니와, 그 논란 복판에 휘말린 데가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반추가 필요하다고 본다. 어느 무렵인가부터 청와대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상징처럼 통용하는 바람에 대통령 집무실이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는 아니해서, 문재인 시대에도 그것을 추진하다가 대안 부재론에 휘말려 가오 상하게도 그런 방침을 스스로 접어야 한 일이 있거니와, 그런 비슷한 공약을 내세우고 당선한 윤석열이 그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생각했음인지, 용산으로 짐을 싸 갔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문.. 2023. 5. 22.
월성 인골 발굴현장 탐방 (2017) 월성 성벽 인골 발굴 현장을 찾은 까닭은 이것이 과연 성벽 축조와 관련한 인신공희人身供犧인가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발굴 양상이 혹여 무덤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므로 보통 무덤에서 보이는 묘광墓壙의 흔적이 있다면 무덤 위에다가 성벽을 축조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인신공희 설은 물건너가고 만다. 이 점을 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들도 매우 주의깊게 살폈다 하며 실제 내가 현장에서 관찰한 바로도 성벽 축조 일환으로 인신을 공희한 것은 분명하다. 이 시신 두 구는 성벽 아랫단 소위 부엽층敷葉層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매장행위임에 분명한 이상 동시대 무덤 매장 방식과 궤를 형성한다. 첫째 머리 방향이 북동쪽이란 점이다. 둘째 묘광 같은 굴광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매장패턴을 따라 시신 ..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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