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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387

부여와 고구려를 한국사에 포함하려 한다면 지금 처럼 한국사에서 도작의 개시와 본격적 농경의 시작을 일치시키는 일본 농업사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부여와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다. 도작의 개시와 본격적인 농업의 시작을 일치시킨다면 도대체 부여와 고구려는 그럼 무엇이라는 것인가? 부여와 고구려는 도작이 없었다. 고구려는 도작의 맛을 본 것은 대동강 유역을 손에 넣으면서부터다. 부여와 고구려, 이 두 형제문명은 명백히 잡곡농경에 기반한 것으로서, 한국사의 농업사 기술에서 지금처럼 도작과 본격적 농업의 개시를 일치시키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옳다. 이러한 시각은 야요이시대에 도작이 건너가면서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한 일본의 시각을 한반도에 그대로 연장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도작농경에 기반한 한반도 중부 이남의 문명만 선택적으로 설명할 .. 2023. 12. 5.
한국사에서의 잡곡농경 한국사에서는 농경의 획기를 도작농경의 시작으로 잡는 것 같다. 도작 농경 이전에도 잡곡농경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잡곡농경은 고도의 농경이 아니고 수렵채집등 부수적인 생산기법이 있어야 유지되는 초보적 수준의 농경으로 보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중국의 경우 이른바 진령-회하선을 경계로 그 이북의 잡곡농경권과 이남의 도작농경권이 오랫동안 병립하면서 존재한 것으로 본다. 황하유역은 잘 아는 것처럼 도작농경문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찬란한 중국문명의 맏형 노릇을 했다. 우리는 부여와 고구려가 한국사의 한 축을 담당한 문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잡곡농경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의 정도가 깊지 않은 것 같다. 부여와 고구려 시대의 잡곡농경과 신석기 시대의 잡곡농.. 2023. 12. 5.
평양의 지리적 의미 평양이 가지고 있던 의미는 여기가 잡곡농경과 도작의 접경지대였다는 데 있다. 잡곡농경이라는 건 도작의 부차적 보조수단으로서의 잡곡재배가 아니라 도작 없이도 완결성을 갖춘 잡곡 농경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오곡에 맞다"고 할 때의 그 오곡. 이것이 바로 발해만 주변과 남만주 일대의 잡곡농경을 말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부여와 초기 고구려는 이 잡곡농경에 기반하여 일어났다. 대동강유역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까지 줄줄이 이어진 섬을 타고 넘어 들어와 남하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비옥한 땅으로 여기는 도작도 가능하여 도작과 잡곡 농경이 만난 최초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고, 고구려도 이 지역으로 손을 뻗치면서 비로소 잡곡과 도작 두 가지 농경을 모두 포괄하는 정치체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가 만.. 2023. 12. 5.
쌀농사 따라 분포한 세형동검 대체로 세형동검 분포지가 쌀농사 북방한계선이며 진흥왕대 신라의 북진선이며 통일신라시대 북쪽 국경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왜 세형동검과 진흥왕 북진선과 통일신라 북쪽 국경이 거의 비슷한 선에서 멈추는가? 쌀농사 때문이다. *** Editor's Note *** 세형동검 분포지가 쌀농사 북방한계선 안에 대체로 위치한다는 점이 늘 필자가 지적하듯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어디에서 풀어야 할까? 세형동검 기능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고고학은 기능에는 관심 제로다. 이것이 비극 아니겠는가? #세형동검 #세형동검분포지 #세형동검_벼농사 2023. 12. 4.
절판된 헌책을 기린다 필자는 한때 앞으로 책은 종이책 대신 전자책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백프로 전자책으로 서가를 꾸며 볼 시도도 했었는데 결국 다시 종이책으로 돌아온 것은 그 책이 주는 손맛과 가독성, 그리고 책에 간단히 표시하며 읽을 때의 기분 때문이다. 필자는 죽을 때까지도 종이책을 떠나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데, 막상 필자의 여식을 보면 태블릿으로 책을 수월히 보며 종이책 없이도 잘만 읽고 다니는 것을 보면 필자의 종이책에 대한 애착과 찬상은 사실 객관적인 팩트에 기반한다기 보다는 아마도 어렸을 적 종이책을 들고 보던 필자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책의 절판되어 중고책만 남았다는 것은 그 책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책 한권 만들.. 2023. 12. 4.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가장 심하게 벌어진 시기 양국간 격차가 크게 벌어진 시기는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때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시기는 숙종, 영조, 정조 연간이다. 정확히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까지. 19세기는 이 시기에 벌어진 격차를 따라 잡지 못하고 결국 완전히 굳혀진 시대에 해당하며 17세기 이전은 양국간 격차가 있다 해도 추격이 불가능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겠다. 숙종, 영조, 정조 연간이야말로 한국사에서는 소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로 불리며 이 시대의 인문적 성취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높이 평가하는 흐름도 있는 듯 한데, 한국, 중국, 일본사를 갖다 놓고 면밀히 비교 검토하면서 이 시대가 정말 망국이 시작된 시점이었는지, 혹자의 평가 처럼 인문학적 르네상스의 시점이었..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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