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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은 나노리名乗り를 했을까? 나노리名乗り라는 것이 있다. 일본사에서 흔히 보는 것으로 무장들이 서로 싸우기 전에 자기 관등성명을 대는 것이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공명을 높일 수 있고, 져도 지는대로 싸우다 죽었다고 알릴 수 있으므로 전장에서 꼭 필요한 의례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적인 의례같지만, 일본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역사상의 나노리는 한국과 관련이 있다. 바로 성왕의 아들 부여창이 고구려군과 다툴 때 서로 나노리 하는 장면이 나온다. 겨울 10월 庚寅 초하루 己酉 百濟 왕자 여창餘昌(明王의 아들 威德王註 001이다)이 나라 안 모든 군대를 내어 高麗國을 향했는데,註 002 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 2024. 1. 7.
무덤 벽화로 보는 거란 한 장면 어느 무덤인지 특정하지는 못하나 거란 벽화 한 장면이다. 남자들 머리는 다 대머리 독수리머리로 만들었으니, 고려거란전쟁에서 소배압을 필두로 하는 거란 군인들을 저리 처리한 것은 나름 고증에 철저한 면을 보여준다. 인종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모조리 매부리코다. 세발 솥으로 죽을 끓여서 먹는 장면인 듯하다. 국자 숟가락 젓가락이 다 보이는데 문제는 젓가락으로 집을 만한 반찬은 그림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엎은 사발을 나르는 남자가 보인다. 개죽통 같은 걸로 국자로 무얼 먹으려는지 하는 남자도 있다. 틀림없이 죽을 해 먹었는데 곡식은 잡곡일 것이다. 잡곡을 죽으로!!! 저들이 양을 많이 키운다고 양고기 주식으로 먹었을 것이다? 위험한 발상이다. 2024. 1. 7.
[독설고고학] 고고학의 오만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한강 유역을 고구려가 확실히 장악한 시기와 그 기간이 어떤지에 천착한 근자 어떤 고고학도 글을 보니, 한강 이북 지역, 혹은 임진강 유역 일대에서 한성백제 유적이 잘 안 나오는 점을 근거로 백제는 이 지역을 475년 전쟁에서 개로왕이 참수됨과 더불어 고구려에 다 빼앗겼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으니 이 대목을 보고는 고고학의 오만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통탄 또 통탄하고 말았으니, 왜 나는 이를 고고학의 오만이라 하는가? 고고학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고고학이 그 시대 모든 것을 증언하지는 못한다. 내가 항용 예를 드는 것이 서울 고려라, 지금의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경南京으로 일컬으면서 지금의 평양인 서경, 그리고 신라 천년 고도 이래 고려시대에 아주 중요한 도시로 동경東京으로 일컬은 경주와 함.. 2024. 1. 7.
일단 시작은 지도부터, 그렇지만 지도는 싫어요. 나는 매번 똑같은 일을 하기 싫어했다. 쥐뿔 아는 것도 없는데 여기서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없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교수님께 소심하게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게, 저는 대학에서 이런 주입식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아는 것도 없는데 토론이 되겠냐며 교수님에게 까였다. 흑흑) 늘 말하기 주저하는 내 성향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늘 의심도 많았다. 초등학생 때, 이승복 어린이 일화를 읽으면서 ‘이거 거짓말 아냐? 나 같으면 무서워서 숨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거 쓰면 나이대가 유추되는 것 아닌가요? 하하) 물론 선생님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일하면서 가장 지겨웠었던 것 일하면서 이러한 나의 성질머리가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2024. 1. 7.
[독설고고학] 실력 없는 놈들이 하는 짓이 신자료 소개다 일본 쪽에 견주어 흔히 한국학계를 일러 디테일에 약하다 하지만, 내가 볼 땐 디테일만이 문제가 아니라 거시에서도 마찬가지라, 이건 일본 학계도 마찬가지인데, 조막디 만한 걸로 침소봉대는 잘하는 편이지만, 전체 그림을 그릴 줄을 모른다. 아무튼 디테일이건 거시건 미시건 나발이건 그런 실력없는 놈들이 그나마 새로운 목소리를 낼 만한 데가 신자료 소개밖에 없으니, 새로운 자료 출현에 내가 매양 비유하듯이 썩은 시체 구더기 몰리듯 개떼처럼 달라들어 서로 먼저 글 하나 써보겠다고 환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뭔가 작은 것 하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그것을 깊게, 그러면서도 넓게 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역사철학도 만들어낼 능력도 없으니, 뭔가 어디서 새로운 자료 출현했다는 소리만 들리면 우루루 .. 2024. 1. 7.
어용화가 벨라스케스가 열라 그려댄 앙리 4세의 장공주 이사벨 드 부르봉 이사벨 드 부르봉 Isabel de Borbón (1602~1644) 이라는 여인은 짬뽕 왕실 국제결혼이 유행하던 시절 프랑스 공주라 하지만, 그 자신부터 혈통이 요상해서 아버지는 프랑스 왕 앙리 4세 Henri IV de France (1553~1610)이며, 어머니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édicis (1573~1642) 다. 이 무렵 유럽 왕실은 혼인을 통해 얼키설키하고, 지들끼리 결혼하면서 왕국 자체도 합병해 버리곤 했으니, 이것이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 매국으로 매도되는 일이다. 물론 그것도 국민국가 등장 이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 사이 장녀로 퐁텐블로 궁 Château de Fontainebleau에서 태어난 이사벨은 프랑스 궁전에서는 으레 큰딸한테 .. 2024. 1. 7.
사전私田과 결합한 무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중국의 당대, 한국의 통일신라말, 일본의 헤이안 말 이후 공통의 과제는 토지에 대한 공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출현하는 사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혼란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결국 벌어지는 사건들이 당말의 혼란 라말여초 그리고 헤이안 말의 무가의 등장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안의 심각성은 그렇게 불거져 나온 사전들이 무력과 결합하면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중국 오대시기의 절도사 체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혼란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라말여초 호족의 대두가 동네 농민들 끌고 다녔다고 생각하는가? 그 밑에는 자기 토지를 가지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력을 끼고 다니는 동네 건달들, 아니 신흥 무인세력이 있었다. 이들이 호족 밑에서 이를 옹립하여 떠 받드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 2024. 1. 7.
사후에야 탈세 혐의를 벗었다는 나폴리 수호신 디에고 마라도나 축구 영웅 마라도나, 30여년만에 '나폴리 탈세' 혐의 벗어 송고시간 2024-01-06 02:46 축구 영웅 마라도나, 30여년만에 '나폴리 탈세' 혐의 벗어 | 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뛸 당시의 탈세 혐의를 마침내 벗었다. www.yna.co.kr 나폴리에서 마라도나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근자 현지 방문을 통해 실감했으니 나폴리가 현재의 나폴리로 정착한 직접 시점은 기원전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는데, 그때 수호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 자리를 대체한 까닭이다. 그 어떤 신도 이곳에서는 마라도나를 대체할 수는 없다. 나폴리가 한때는 위광을.. 2024. 1. 7.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말하는 1915년 능산리 고분 발굴 ***세심한 번역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긴 것이니 상세한 인용은 직접 고고학잡지 1916년 6-3호를 보라. 나는 지난 메이지 42년(1909) 한국 탁지부 촉탁을 받아 다이이谷井 문학사 구리아마栗山 공학사와 더불어 백제 고도인 공주와 부여의 유적을 조사한 일이 있지만 본년 7월 곡정 문학사 및 후지타後藤 공학사와 조선총독부 촉탁을 받아 다시 부여에 이르러 그 부분을 답사하고 6일 두 사람과 갈라져 공주에 이르러 그 산성 연구를 시도했다. 앞선 조사에서는 성벽 유적의 외곽 형태 외에 백제시대 유물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분묘 발굴을 시도한 결과 당시 분묘 양식도 분명히 알게 되고 또 부장품이나 성벽 유적 출토 고기와의 문양이 크게 우리 나라시대의 그것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2024. 1. 7.
고려 정벌을 반대한 소적렬蕭敵烈 날로곤涅魯袞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적렬蕭敵烈은 자가 낱로곤涅魯袞이다. 재상 소달렬蕭撻烈의 4세손이다. 식견과 도량이 크고 원대하여 향리에서 받들었다. (관직 진출) 처음에 우군창사牛群敞史가 되었는데 황제가 그가 똑똑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러 입시하게 하고는 나중에 국구상온國舅詳穩으로 옮겨 주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황제가 어러 신료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康肇가 그의 군주 송誦(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그의 족형 순詢(현종)을 세우고는 그의 재상을 하고 있으니 그를 대역으로 처벌해야 한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 죄상을 물어야 할 것이다”고 하니 여러 신료가 모두 그래야 한다 했다. (하지만) 소적렬이 간언하기를 “나라가 해마다 정벌하느라 사졸이 지쳐 있고 나아가 폐하도 상중이십니다. 올 농.. 2024. 1. 7.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와 병사 수, 그리고 훈련도감 간단히 적어둔다.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에서 1석은 남성 성인 1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이다. 막번시대 일본에서 가장 큰 번이 가가번加賀藩이었다고 하는데 가가번은 호왈 가가백만석이라고 해서 백만석짜리 번이었다고 한다. 이대로 믿어 본다면 이 번에서는 백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 수는 어떨까? 100석당 병사 1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가번의 경우 가용 병력은 1만 명인 셈이다. 조선후기 훈련도감군은 병력 증감이 있었는데 대략 5천명선이었다고 하니 일본으로 친다면 50만석 짜리 번이 유지할 수 있는 직업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당시 파악하고 있는 인구가 6백만선이었다고 감안하면, 국가에서 6만 병력은 유지가 가능해야 했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 오군영이 그렇게 국가에 막대한.. 2024. 1. 7.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왜 없겠는가? 에도시대에 무슨 무과가 필요하겠는가? 가마쿠라 막부에 무과가 왜 필요하겠는가? 군인이라는 직역이 세습되는 사회에서는 무과란 필요가 없다. 고려시대에는 흔히 행오에서 군인을 발탁하여 썼므므로 무과가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이게 뭐 논산 훈련소에서 뽑아 놓고 잘 뛰는 사람을 위관 영관 장관급으로 춣세시켜 썼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차피 군인은 세습했다. 그게 군인전이다. 직역이 세습되고 있었으니 무과가 필요 없는 것이다. 2024. 1. 7.
나는 옳다 해서 기사 썼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공작이라면? 기자질 하며 제일로 기분 나쁠 때가 내 기사가 내가 의도한 바와는 전연 딴판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더 기분 더러운 때는 이것이 옳은 길이요 가야 할 길이라고 해서 그쪽 방향으로 썼는데 알고 보니 이게 누군가 그쪽으로 유도한 것임이 밝혀졌을 때다. 문화재 분야라고 예외가 아니다. 몇해 전의 일이다. 서울 어느 지역 주민들이 난데없이 나를 찾아왔는데, 핵심은 인근 지역 재개발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명분이 있어야 하니 이들이 내세운 무기는 문화재 보존이었다. 문화재 기자한테 주민들이 자발로 문화재 보호를 위해 개발을 반대한다는데 얼마나 그들이 대견해 보이겠는가? 한데 알고 보니 그 재개발지역이 이른바 서민형 임대주택 예정지였다. 반대한 이유는 자명해졌다.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 다행히 저 건은 기사를 쓰진.. 2024. 1. 7.
육십이후의 전략 필자의 논문 인용 횟수 변화다. 뭐 요즘은 워낙 잘들 하는 사람이 많아 필자의 인용횟수는 그냥 평범한 수준이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필자의 인용횟수 변화를 보면, 2014년에 한 번, 2018년에 한 번 그리고 2021년에 반등하여 피크를 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용횟수가 반등한 것은 사실 그보다 몇 년 전에 연구 주제의 변화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연구주제를 변화시키고 소위 말하는 current trend와의 동기화를 꾀한다. 그래야 다시 연구수준이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다. 이게 아주 힘이 들고, 사실 사람 할 짓이 못된다. 이런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인용횟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학자로서 종국에는 산송장이 된다. 필자 생각에는, 이런 변화의 모색은 나이가 들면.. 2024. 1. 7.
탁사정한테 죽다 살아난 고구려 후예 거란 외교관 고정高正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고정高正은 어느 군郡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통화統和 연간 초기(983 무렵)에 진사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해 누차 승진해서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가 되었다. 황제가 장차 고려를 정벌하려하매 먼저 고정한테 고려로 가게 해서 그 이유를 알렸다. 돌아오자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 마침 그때 고려왕高麗王 순詢(현종)이 표문을 올려 들어와서 친히 황제를 뵙겠다고 하니 황제가 그리하라 하고는 고정을 보내서 기병 천 명을 데리고 가서 맞도록 했다. 객관에 머물다가 고려 장수 탁사정卓思正한테 포위되니 고정이 정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는 휘하 장사들과 더불어 포휘를 뚫고 탈출을 감행하다 사졸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황제가 경솔하게 움직였다고 후회하면서 그의 죄를 용서했다. 이듬해 공부시랑.. 2024. 1. 6.
강조를 사로잡은 야율홍고耶律弘古 분눌은盆訥隱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야율홍고耶律弘古는 字가 분눌은盆訥隱이라 요련선질가한遙輦鮮質可汗의 후손이다. 통화統和 연간 초기(983?)에 일찍이 군사 임무를 맡아 예랄상온拽刺詳穩이 되었다가 이내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 옮겼다. 13년(995)에 남쪽 변경을 돌다가 사악교四岳橋에서 적을 만나 이기니 목 벤 이가 100여 급이었다. 송宋을 정벌하매 전공을 세워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옮기고 초국공楚國公에 봉해졌다. 훗날 고려를 정벌하매 선봉先鋒 야율분노耶律盆奴 부사령관이 되어 강조康肇를 동주銅州에서 사로잡았다. 30년(1012) 서북부가 반란하매 남부재상南府宰相 야율노과耶律奴瓜를 따라 그들을 토벌했다. (황실을 호위하는 군대인) 금군禁軍을 맡았을 때는 호령號令이 정비되고 엄숙하니 여러 部가 다 복종했다. 이내 시.. 2024. 1. 6.
요사遼史 야율적록耶律的琭 야녕耶寧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야율적록耶律的琭은 字가 야녕耶寧이라, 중부방仲父房의 후손이다. 군사 일에 익숙해 좌피실상온左皮室詳穩으로 삼았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매 적록的琭은 본부의 군대를 이끌고 야율분노耶律盆奴 등과 함께 강조康肇와 이현온李玄蘊을 동주銅州에서 사로잡았다. 황제가 이를 대견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경은 뛰어난 재주로 나를 위해 온힘을 다했으니 진실로 우리 집안의 철리마[千里駒]라 하겠소”라고 하면서 어마御馬와 촘촘히 짠 갑옷[細鎧]을 내렸다. 이듬해 북원대왕北院大王이 되었고 외직으로 나아가서 마고적렬부도상온馬古敵烈部都詳穩이 되었다. 나이 72세에 졸했다. 49 耶律的琭,字耶寧,仲父房之後。翌兵事,為左皮室詳穩。 50 統和二十八年,伐高麗,的琭率本部軍與盆奴等擒康肇、李玄蘊於.. 2024. 1. 6.
요사遼史 야율분노耶律盆奴 호독근胡獨堇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아율분노耶律盆奴는 字가 호독근胡獨堇이라 척은惕隱 날로고涅魯古의 손자다. 경종景宗 시대에 마고부馬古部 상은詳穩이 되어 다스림이 언제나 엄하고 급하니 백성들이 그것을 고통스럽게 여겼다. 담당 부서에서 이런 소문을 보고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리기를 “분노는 한 쪽 지방 일을 맡아 세세한 일까지 따져 물으니 위엄과 신망이 손상당하지 않을까 한다”면서 마군태보馬群太保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 통화統和 16년(998)에 몰래 연燕 지방 군대에 복무하는 자로서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 자를 살펴 그들을 도태케 했다. 28년(1010), 황제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분노를 선봉으로 삼았다. 동주銅州에 이르러 고려 장수 장조康肇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우리 군대에 저항하니 군영 하나는 동주 서쪽.. 2024. 1. 6.
요사遼史 소배압蕭排押·소항덕蕭恆德(소손녕蕭遜寧) 형제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배압蕭排押은 자가 한은韓隱이다. 국구國舅 소부방少父房의 후손이다. 지략이 많았고 말을 잘 탔다. 통화統和 초년(983)에 좌피실상온左皮室詳穩이 되어 조북阻卜 토벌에 공을 세웠다. 통화 4년(986)에 송나라 장수 조빈曹彬과 미신米信의 군사를 망도望都에서 깨뜨렸다. 무릇 군대와 관련한 일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매번 결정에 참여하였다. 조금 지나 영흥궁永興宮 몫의 규糾와 사리舍利와 예랄拽刺과 이피실二皮室 등의 군대를 총괄하여 추밀사樞密使 야율사진耶律斜軫과 함께 연산燕山 서쪽 지역 함락되었던 고을들을 수복했다. 이해 겨울에 송나라를 칠 때 선봉이 되어 만성滿城을 포위 공격하여 소속 군대가 먼저 성에 올라가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 바뀌었다. 위국공주.. 2024. 1. 6.
[독설고고학] 형식분류 제작기법 축조기술은 투고 자체를 원천봉쇄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고고학은 당장 어찌해야 하는가?저거다.형식분류 제작기법 축조기술 타령 일삼는 그 어떤 논문도 투고 자체를 원천 금지하며 그런 논문이 들어와도 자동으로 퇴짜를 놓아야 한다.사람이 아닌 물건을 천착한 논문은 그 어떤 것도 게재해서는 안 된다.왜?쓸데없기 때문이다.물레를 돌렸건 말건 그딴 거 이젠 하나도 안 중요하다.부엽공법 이제는 눈꼽만큼도 새삼스럽지 않다.보축이 뭐가 대단하단 말인가?무너지면 다시 쌓는 거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무너짐을 막고자 부엽하고 보축하는 일 너무나 당연하다.문화권별 토기 양태 달라야지 안 다른 게 있다면 그게 문제이지 다른 게 왜 문제인가?말 같잖은 소리 이제 그만 둘 시점이다.멀쩡한 삼국사기 비틀어 고고자료 지 꼴리는 대로 조작해서 고구려가 475년 전쟁과 더불어 한강.. 2024. 1. 6.
치아 마모도는 곡물 도정과 관련이 있을 것 사람의 치아는 계속 닳는다. 요즘은 그 정도로 닳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고인골의 치아를 보면 치아의 수질 부분까지 다 노출되도록 닳은 경우가 많다. 이렇게 닳은 모양을 보고 거친 음식 때문이라고 대개 추정을 하거나 아니면 밀과 같이 가루를 만들어 빵을 굽는 경우에는 가루를 만들때 미세한 돌가루가 섞여 들어갔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엔 거친 음식이라 하면 역시 애매하다. 거친 음식으로 예를 들어 식물성 섬유를 과거에 요즘보다 많이 섭취한 것을 들기도 하는데 식물성 섬유 때문일까? 필자가 보기엔 이빨을 가장 빨리 닳게 만드는 건 식물성 검유나 미세한 돌가루가 아니라 곡물의 도정 정도다. 정말 잡곡과 도정이 덜된 쌀로 밥을 지어 먹으면 거친 밥이라는 게 뭔가를 실감하게 되는데 특히 이걸 ..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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