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19891

구기동에 있었다는 통일신라 귀부 일제강점기 기록을 보면 이전 번역원이 있던 종로구 구기동에는 통일신라 때 귀부龜趺가 있다고 하였다. 1930년 2월 4일자 《조선일보》에 그 사진이 있다.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이번 종로구 신영동에서 발굴된 고려 건물터 바로 뒤 산등성이에 이 비가 있었다. 거리는 50미터쯤인 듯 *** 편집자주 *** 귀부 양식을 보면 통신보다는 고려 초 냄새가 난다. 2023. 3. 28.
전통시대 문화적 역량과 문맹률은 별개 한국과 중국은 오랜 문화적 전통이 있는 나라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도 문자 사용의 증거는 2000년을 넘는다. 오랫동안 책을 펴내 읽었고, 고려시대에는 8만매가 넘는 목판 인쇄를 두 번이나 감행했고, 금속활자까지 발명해서 썼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지적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일정숫자의 독서인구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과거제가 고려시대 이후 거의 천년이 이어졌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착각하면 안되는 것은, 근세-혹은 근대의 "문맹률" 혹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지식의 보급"은 이러한 전통시대 문화적 역량과는 완전히 별개의 물건이라는 것이다. 낮은 문맹률은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며, 근대국가가 작동하기 위해.. 2023. 3. 28.
일본의 식자율은? 에도시대 식자율이 엄청 높았다는 이야기를 일본인들 스스로도 이야기 하는데 그 근거는 의외로 박약하다. 개인적인 생각에는 에도시대 개항 전 일본인 전체 식자율은 조선과 별차이 없었을 것이라 본다. 에도시대는 분명히 동시기 조선보다는 경제사정이 훨씬 나았던 것은 분명한데, 조선과 질적으로 다른 사회는 아니었다. 앞으로는 이에 대해 후술하겠다. 에도시대에 대해 평가할 것은 평가해주지만, 필요 이상의 과대평가는 제3국 연구자 입장에서 무리할 필요 없는 것일 테니. 양국 식자율에 결정적 차이가 발생한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20세기 들어 1925년 경에는 군대 징집병의 90프로 정도가 글을 읽을수 있었다고 하니, 20세기 초반에 일본도 급속도로 문맹률의 개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3. 3. 28.
중국 문맹률 변화의 추이 다음은 중국의 문맹률이다. 중국의 경우, 문맹률의 변화를 보면, 지속적으로 떨어지지만 한국보다 문맹률 감소의 추세가 완만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중국 문자체계의 문제, 그리고 60-70년대 문혁기간 때문이라고 본다. 2023. 3. 28.
학생부군신위, 내가 한문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 앞선 글에 이어진다. 큰집에 가서 큰아버지께 지방을 받아오는 심부름이 내 차지였는데 나는 그게 그리 귀찮았다. 마침 1921년생인 선친보다 열살이나 많은 큰아버지도 연로하기 시작하셨으니 더 싫어졌다. 지방이라 해봐야 꼴랑 현고 학생부군 신위 현비 유인 성산배씨 신위 이것뿐이었으나 큰아버지는 글자를 아주 잘 썼고 나는 지금도 그 큰아버지 글씨를 따를 수 없다. 결국 어느 시점엔 내가 볼펜으로 쓰야 했다. 내 손으로 처음 쓰는 지방 글씨가 그리도 두려울 수 없었다. 그때가 내가 막 중학교 입학해 한문 이라기보다는 한자를 배우던 시절이었다. 교재라 해봐야 수욕정이풍부지 양약고구이어병 블라블라하는 교과서가 전부였지만 중삼 때인가 고등학생이 배우는 한문2인가 하는 교재를 입수하고는 춘야연도리원서며 적벽부를 읊조리.. 2023. 3. 28.
까막눈 천지였던 내 고향 이 블로그 필진인 畏友 신동훈 교수께서 이 즈음 계속 문맹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주제인지를 설파하는 시리즈를 계속 중이라, 내 고향 이야기를 하려한다. 여러 번 썼지만 내 엄마 선친은 까막눈이셨다. 선친은 까막눈으로 살다 까막눈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지금은 까막눈은 아니시고 기본 한글은 비록 맞춤범은 엉망이나 쓸 줄도 알고 숫자도 쓸 줄 안다. 어머니가 까막눈을 면한 계기는 조카딸이었다. 이 조카딸이 외손녀라는 이유로 친손자에 견주어 갖은 차별을 받기는 하나 어이한 셈인지 천성이 그러한 것도 있고 해서인지 몰라도 툭하면 김천으로 행차해 할머니한테 아주 잘하는데 어느날은 보니 할머니한테 한글을 가르치고 있더라. 엄마가 까막눈을 벗어나기는 순전히 이런 조카딸 덕분이다. 문제는 김녕김씨 집성촌인 내 고향에서 .. 2023. 3. 28.
문맹률은 근대화에 가장 근접한 지표 이 식자율 변화 추이를 보면, 19세기 후반, 이미 미국이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맹률이 높은데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는 역사이래 단 한번도 없었다. 인도는 18세기, 전 세계 GDP의 1/4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렇게 막강한 생산력을 자랑 하던 나라가 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아래 때문이다. 인도는 1900년에 식자율이 10프로가 안되었다. 10명중 1명도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동시기 영국의 식자율은 80프로를 넘어 있었고 미국은 90프로를 넘었다. 일제시대에 연평균 몇프로씩 성장을 했다고? 그래서 그게 어쩄다는건가? 문맹률 75프로인 나라라면 몇 프로 성장을 했건 그런 나라를 "근대화가 이루어진 나라"라고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 1945.. 2023. 3. 27.
연변자치주에서 출현한 고구려 발해시대 불교사찰, 발해시대 사리장엄 출토 中 "발해 도읍서 중원 영향 유물 출토…다민족 통일국가 입증" 박종국 / 2023-03-27 14:42:58 "고구려·발해 사찰 유적서 북조시대 전래한 불교 유물 나와" 中고고학계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 기존 주장 되풀이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고고학계가 발해(698~926년)의 도읍이었던 팔련성(八連城) 사찰 유적지에서 중원의 영향을 받은 불교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며 "중국의 통일 다민족 국가 형성 과정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https://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63407524923 中 "발해 도읍서 중원 영향 유물 출토…다민족 통일국가 입증" "고구려·발해 사찰 유적서 북조시대 전래한 불교 유물 나와" 中고고학계 ".. 2023. 3. 27.
학술발표 공고 제 발표가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한일관계사학회 제206회 월례발표회】 ■ 일시 : 2023년 4월 8일(토) 오후 2시 ~ 오후 6시 ■ 장소 : 한성백제박물관 B2 세미나실 ■ 사회 : 이훈(한림대) ■ 제1주제 : 최근 제기된 일본인 기원의 3중 구조론에 대해 발표 : 신동훈(서울의대 해부학교실) / 토론 : 주홍규(건국대) ■ 제2주제 : ‘조선 초 조정의 왜구 회유책’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ー태조 6년(1397) 항왜 도주와 군관 처벌을 중심으로ー 발표 : 송종호(방송통신대) / 토론 : 이규철(성신여대) ■ 제3주제 : 『한국수산지』의 해도와 일본 해군의 외방도(外邦圖) 발표 : 서경순(부경대) / 김경록(군사편찬연구소) https://hanilhis.or.kr/27/11727759 한일관계.. 2023. 3. 27.
[전국학예연구회 성명서]"박물관.미술관 공동 학예사 제도 철회를 엄중히 요구한다" [전국학예연구회 성명서]“인구감소지역에 대한 박물관․미술관 공동 학예사 제도 철회를 엄중히 요구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3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정현안 관계 장관회의에서 ‘지방시대 지역문화정책 추진 전략’을 27일 보도자료를 통해 언론에 공개했다. 오늘 공개한 주요 내용을 보면, ‘지방소멸’ 위기감이 커지는 가운데 수도권에 편중된 문화시설의 지방 분산, 1명 이상의 학예사를 고용해야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경우 인구감소지역은 2개 이상의 박물관․미술관이 학예사를 공동으로 두는 것을 인정하는 등 문화시설 규제 완화, 유휴 공공시설을 박물관, 도서관 등 문화시설로 개조하여 문화시설 확충 등 비수도권 거주민에게도 ‘문화슬세권’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수도권 국민의 문화향유 증진을 위한다는.. 2023. 3. 27.
1948년 제헌국회 선거: 그 최대의 적은? 아시다시피 해방 이후 3년간의 미군정을 끝내고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고 동년 8월 15일 제 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 당시 미군정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성공적 선거의 적"은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북한의 방해? 그것이 아니고 미군정은 남한에서 선거가 제대로 치러질지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왜냐. 문맹률이 너무 높아서.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입법의원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문맹으로 4할이 기권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선거를 치른다고 해도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투표를 할 것 아니겠음? 이 때문에 1948년까지 미군정은 초보적인 한글 교육을 미치듯이 시행했다. 이 시기의 문맹률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48년까지 집중적.. 2023. 3. 27.
해남 방산리 독수리봉고분군 발굴조사 요약 정리 다음은 이 발굴을 담당한 마한문화재연구원(원장 조근우)이 이번 조사 성과를 일목요연히 정리한 것으로 이해를 좀 더 쉽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해서 전문을 소개한다. 더보기 해남 방산리 독수리봉고분군 발굴조사 2023. 03 전라남도·해남군·마한문화재연구원 Ⅰ. 조사개요 - 조사명 : 해남 방산리 독수리봉 고분군 발굴조사(허가 제2022-698호) - 조사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산67 일원(720㎡) - 조사경과 · 1986. 목포대학교박물관 최초보고 · 2000. 전남대학교박물관 측량조사 실시 · 2001. 국립광주박물관 지표조사 실시 · 2001. 9. 전라남도 문화재자료(제233호) 지정 · 2022. 6. 시굴조사 실시 · 2023. 1. 정밀발굴조사 실시 - 발굴조사 : 2023.. 2023. 3. 27.
일제시대 경성제대와 대학령 일제시대에 민립대학과 경성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3.1 운동 이후, 민립대학 운동이 일어나자 경성제대를 총독부에서 선제적으로 만들고 더 이상의 논의를 잠재웠다.. 라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원래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에는 제국대학만 대학이었다. 제국대학은 경성제대가 생길 때까지만 해도 총 5개가 있었다. 그런데 1919년에 일본에는 "대학령"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전에는 제국대학만 가능했던 "대학"을 사립대학과 다른 관립대학까지 대폭 늘려 증가시킬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일본에는 제국 대학 이외의 대학이 많이 생겨났다. 당시 조선땅에서 "민립대학"을 만들자고 한 것은 아마 이 "대학령"에 따라 사립대학을 만들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2023. 3. 27.
조선시대의 보湺 https://www.chosun.com/national/transport-environment/2023/03/27/WZAEQBWN6ZEJNDXYMI4MCWRBZY/ 文때 없애려던 영산강·금강 보, 가뭄에 도움文때 없애려던 영산강·금강 보, 가뭄에 도움 영산강 승촌·죽산보, 금강 세종·공주·백제보가 물 잡아둬www.chosun.com 이에 대한 논란은 조선시대에 대한 인식이 조금만 깊이 있어도 피할 수 있었다고 나는 본다. 조선시대 후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우리 조상들이 모내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한반도 기후를 어떻게 극복해 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필자가 아는 한에서는 아래 저술이다. 김동진 교수가 쓴 이 책은 최근 10년간 역사학계에서 나온 저작물 중 필자에게.. 2023. 3. 27.
람세스2세 신전의 양대가리 물량 공세 이집트 아비도스 람세스2세 신전서 양머리 미라 2천개 발굴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이집트 중부 아비도스에 있는 람세스 2세 신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50년∼기원전 30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양 머리 미라 2천여개가 발굴됐다. 26일(현지시간) 이집트 관광유물부에 따르면 미국 뉴욕대 고고학 발굴팀은 이집트 중부 아비도스에 있는 람세스 2세 신전에서 최소 2천여개의 양 머리 미라를 찾아냈다. 이곳에서는 양 머리와 함께 개, 야생 염소, 소, 가젤, 몽구스 미라도 함께 발견됐다. https://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63397067390 이집트 아비도스 람세스2세 신전서 양머리 미라 2천개 발굴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 2023. 3. 27.
왕화王化의 밖 제주, 김응남金應南의 경우 1583년, 동부승지를 지낸 김응남金應南(1546~1598)이 제주목사로 임명된다. 보통 무과 출신이 임명되는 제주목사 자리에 문과 출신이 임명되는 일은 이례적이다. 기실 이는 동서 분당이 가속화되던 시점에 '동인의 괴수'로 지목받던 그를 조정에서 떨어뜨려놓으려는 좌천성 인사였다. 이를 두고 사간원에서는 부당함을 논하였다. 그런데... 제주목사 김응남은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많은 계옥啓沃을 하였고, 승선承宣이 되어서는 부지런히 있는 힘을 다했던 자로서, 전하께서도 일찍이 믿고 총애하였던 바인데 죄명이 드러나지도 않은 것을 침윤浸潤의 참소만을 치우치게 믿으시고 이매魑魅의 고장에다 던져버리셨습니다. 근래 빈번한 척축斥逐으로 하여 명류名流는 거의 다 없어지고 참소하는 입들이 그 틈을 타서 대성.. 2023. 3. 27.
나로서는 모든 걸 쏟아부은 직설 무령왕릉 무령왕릉에 현재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다 첫째 발굴비화..발굴단 일원인 조유전 선생이 일전에 이를 초抄한 적 있지만 이를 토대로 나는 2001년에 그 완결편 전초를 이미 선보였다. 작금 한국사회에서 통용하는 발굴 일화는 그때 15회 분량으로 정리한 내 기사가 뼈대다. 나는 발굴단장인 김원룡이 이 발굴을 자아비판했다 해서 그걸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외부에서의 진짜 충격을 그는 받은 적이 없다. 간담을 서늘케 하고 싶었다. 둘째, 설계자를 남조南朝 양梁나라 사람들로 확정했다. 이는 종래 梁官瓦爲師矣로 판독한 송산리 6호분 전돌 명문을 끌어엎음으로써 가능했다. 瓦는 어처구니없는 오독이었다. 나는 볼펜 똥으로 보아 그것을 쳐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 문구는 양나라 관리를 .. 2023. 3. 26.
식민지반봉건론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쌍생아다 서로 완전히 정반대로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아버지를 둔 쌍생아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죽어도 해방 이후 한국사회 혁명적 발전의 결과물은 인정 못하겠다 이건데, 해방 이후 발전은 "식민지반봉건사회"의 팽창일 뿐으로 조만간 외채 때문에 망한다던 나라가 안 망하니 이번에는 반대로 일제시대까지 올라가 실제로 한국사회 근대화의 기원은 일제시대다? 그게 아니라, 한국사회의 제대로 된 발전은 1945년부터 시작이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은 시간 낭비였던 기간이고. 한국사회를 냉정히, 팩트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제대로 된 논리를 학계에서 좀 보고 싶다. 해방이후에도 문맹률 75프로인 나라에서 근대화가 식민지때 이루어졌다는 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1945년 이후 70여 년간, 민주주의.. 2023. 3. 26.
심포지움: East Asian People's Life and Death 본 연구실은 조선시대 검안檢案 서류에 대한 법의학적 고찰을 위해 서울대학교 지원으로 여러 분야 교수님과 함께 학제간 협동연구로 현재 연구과제를 수행중입니다. 본 프로젝트 일환으로 2023년 4월 2일 (오후 2시-4시 40분), 인문학자들과 생물인류학자들이 조선시대 검안서류에 대해 한 자리에 모여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자유 참여가 가능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https://snu-ac-kr.zoom.us/j/93409748024?pwd=MFA4WUZmUWNTSmhnTXZYZkU0bm8vQT09 Join our Cloud HD Video Meeting Zoom is the leader in modern enterprise video communications, wi.. 2023. 3. 26.
1930년대 일본어 교육 조선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학교에서는 조선어 교육을 줄이고 일본어교육이 강화되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필자가 보기엔 이것도 해방직후 조선 문맹률 75프로에 큰 공헌을 했다. 조선인들 중 상당수가 초등교육 단계에서 2-3년 다니다가 중퇴가 많았는데, 그 짧은 교육기간 동안에도 학교에선 일본어, 집에 오면 조선어라는 이중언어생활을 해야 했으니 식자율이 올라갈래야 올라갈 수가 없었을 듯 하다. 역으로 말하자면, 해방이후에는 조선어 교육 일원화, 한글 전용으로만 가닥을 잡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식자율은 크게 반등했을 듯. 50년대 문맹률 감소에 군대에서 사병들 대상으로 한 한글 교육이 상당한 역할을 했는데, 사실 그 짧은 군대교육도 식자율 제고에 효과가 있었던 것을 보면, 30년대 후반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만 제.. 2023. 3. 26.
일제시대 양주동 선생의 경우 이제 "일제시대~~의 경우" 마지막 사례이다. 양주동 선생의 예를 보겠다. 위키에는 양주동 선생에 대해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 이렇게 해놓았다. 그런데 이 기술은 누락된 부분이 많다. 우선 중동고보는 앞에서 이야기 한것처럼 중학과정으로 와세다대 영문과로 바로 진학이 불가능하다. 아마 뭔가 빠진 이력이 있을 것이다. 한편 나무위키에는 "1903년 경기도 개성군에서 태어나 중동학교를 마치고 1921년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영문과로 전과하여 1928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이라고 되어 있다. 이 프로필도 누락분이 있다. 중동학교를 마치면 불문과건.. 2023. 3. 2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