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21610

십만양병설 vs. 이순신 기용론 임진왜란 책임론을 둘러싼 당파론 양축은 율곡의 십만양병론과 이순신 기용론이 아니었나 싶다. 십만양병설을 뒤늦게 들고 나온 서인들한테 동인, 특히 류성룡이 내세울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순신이 아니었나 싶다. (2014. 8. 11) *** 십만양병은 당시 조선 사정상 할 수도 없고 해도 소용없었다. 따라서 설혹 율곡의 말대로 십만을 양병했다한들 저런 수치는 없었을 것이란 서인의 가정은 언어도단이다. 이순신을 저 자리로 천거한 이야 류성룡이 맞겠지만 그가 무슨 임란이 있을 줄 알고 저리 선제조치했을 것이며 또 그를 가용한 것은 같은 당파로 그 자리를 채울 만한 이가 이순신밖에 없었기 때문이지 우수마발 없다. 그렇게 기용한 이순신이 불패 신화를 쓴 것은 동인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었다. 이순신이 아니었.. 2023. 8. 12.
로마가 추앙한 똥배 뱃살 보살 이 뱃살 어칼겨? 그러니 운동 좀 하지 박물관 이름이 요상함 Museo Nazionale Romano - Palazzo Massimo alle Terme (2017. 8. 12) *** 로마 중앙 기차역 테르미니 인근 저 박물관은 이름이 더럽게도 길어 Museo nazionale romano di palazzo Massimo 이렇게도 쓰는 모양이라 글자 그대로는 국립 로마 박물관 - 마시모 알레 테르메 궁전 이라 마시모궁 국립로마박물관? 정도로 옮김하면 될 듯 하다. 그건 그렇고 서양 기준으로 뱃살 혹은 똥배가 어느 시점까지 추앙된 듯 하다. 내가 당당해질 사회다. 2023. 8. 12.
아무 데도 쓸 데가 없는 근의 공식 근의 공식, 방정식, 미분, 적분, 확률 이들을 우리는 수학적 논리를 키워준다는 미명 아래 강제로 배웠다. 이것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들이 있으리라. 하지만 나한테는 시험 볼 때 말고는 지난 반세기 동안 눈꼽 만큼도 필요치 않았다. 논리는 수학으로 키우는 게 아니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사고로 키운다. 논리가 필수일지언정 저런 수식이 논리는 아니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언설도 미적분을 알아야 한다는 언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왜? 라는 질문이다. 왜 수학이어야 하는가? 수학 아니면 안 되는가? 수학이 논리적 사고를 키우는데 왜 필요한기? 라는 근간을 뿌리째 의심하는 일이다. 교육혁명이 필요한 이유다. (2016. 8. 11) 2023. 8. 11.
보존처리 중이던 백제 나무삽 궁남지 인근 부여 화지산 유적 백제시대 건물터 인근에서 발굴한 나무삽 열한자루가 보존처리를 위해 식염수에 잠수 중이다. (2016. 8. 11) *** 보존처리가 끝났는지 모르겠다. 7년이나 지났으니 말이다. 백제는 삽질 왕국이었나? 2023. 8. 11.
부여나성 발굴현장 back to 2016 부여나성 발굴현장. 예상대로 구간을 나눈 흔적이 완연하고 후대보축 성벽도 드러난다. 바깥 성벽 기저부 처리기법도 엿보인다. 알아서 판단해라. (2016. 8. 11) *** 사진 속 주인공은 심상육 선생이다. 저때 나는 해직 중이었다. 2023. 8. 11.
동서양 광자狂者의 만남 동서양 광자狂者의 만남 오르세미술관에서 괜히 한번 가주야대는 곳인 듯 해서 가줬다. 미술관은 입장객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하나 순전히 이는 노이즈 마케팅 덕분이다. 콜렉션 수준은 꽝이라, 습작 수준이며 어디서 긁어다 모은 짜투리들만 잔뜩 갖다놓았다. 인상파 대작도 단 한 점이 없다. 역사驛舍를 재활용한 미술관이라는 점 딱 하나다. 이 전략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왜 미술관을 가는가? Vanity다. 첫째도 둘째도 배너티다. (2017. 8. 11) *** 저 미술관에서 귀짜름 고흐를 조우한다. 2023. 8. 11.
막부 학문소와 동경대학 이제 동경대 이야기를 해 보자. 일본 근대교육제도에서 메이지 초년에 원래 일본 전체에서 대학은 동경제국대학 단 한 개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국대학령에 의해 동경대 외에 쿄토대 등 다른 제국대학이 추가로 설치되면서 달라지게 되었지만, 아무튼 메이지시대의 교육제도 초반은 상당기간은 일본에 대학이 단 한 개만 있는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원래 메이지 정부의 방침은 동경대를 막부의 공식적인 최고학부인 昌平坂学問所를 중심으로 만들려고 했었다. 昌平坂学問所는 강항으로 부터 감화받아 일본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자가 된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것으로 에도 막부의 명실상부한 최고학부가 되었다. 이 학문소의 유지가 일본 동경 간다역 근처에 가면 아직 남아 있는데 지금은 "유지마.. 2023. 8. 11.
허망한 이인로의 대답, "이거 제 글씹니다"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을 보면 고려 중기에 있었던 어떤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기록하고 있다. 옛 어른들의 감정 - 흔히 배관拜觀이라고 하는 - 실력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해보도록 하자. 내가 일찍이 높으신 분의 댁[貴家]의 벽에서 초서(草書)가 적힌 족자 두 점을 보았는데, 연기에 그을리고 집안으로 샌 빗물에 젖어 형색이 자못 기이하고 예스러웠다. 그 시에 이르기를, 시가 적힌 단풍잎이 궁궐[鳳城]에서 나오니 紅葉題詩出鳳城 눈물 자국은 먹과 섞이며 오히려 분명하네 淚痕和墨尙分明 궁궐 도랑에 흐르는 물 흐려서 믿을 수 없네 御溝流水渾無賴 궁녀의 한 조각 마음을 흘려보냈다기에 漏洩宮娥一片情 이라고 하였다. 좌중 손님들이 모두 머리를 모아 보면서 당唐 · 송宋 시절 사람의 필체라 여겼다. 분.. 2023. 8. 11.
아이지현愛知県 제4중학이 된 번교藩校 시습관時習館 1752年(宝暦2年) - 藩校時習館、藩主松平信復により、城内の八丁小路(現在の豊橋市八町通)に設立。 1806年(文化3年) - 「時習館規条」制定。 1872年(明治5年) - 藩校時習館廃止。 1893年(明治26年) - 私立補習学校時習館(愛知県立時習館高等学校の前身)設立。藩校時習館の名を借りて称した。 1900年(明治33年) - 愛知第四中学校(ナンバースクール)へ改名。 1948年(昭和23年)10月 - 豊橋時習館高等学校の校名に改称し、「時習館」の名称が復活する。 1956年(昭和31年) - 愛知県立時習館高等学校に改称。 아이치현에는 미카와요시다 번이 있었는데 이 번의 번교藩校를 논어의 글귀를 따 시습관時習館이라 불렀다. 번교가 설립된 시기는 1752년. 메이지유신후 폐지되었다가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1900년에 아이치현의 제4중학.. 2023. 8. 11.
대량으로 써제낀 증정용 식민지시대 글씨 조선 말기~일제강점기 제법 이름있는 이의 필적은 일본에 많이 전해진다. 대개는 일본에 망명한 뒤 생활비를 조달하려고 팔았거나, 신세진 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사한 것이다. 조선-한국에 있었던 인물이 일본인을 만나도 으레 글씨를 써주거나 그림을 그려주곤 했던 모양으로, 요즘들어 그러한 작품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1) 금박종이나 호피선지를 둘러 휘황찬란하게 '표구(장황이 아니다)'한 현현거사玄玄居士의 글씨나 소호小湖의 난초를 흔히 만난다. 그런데 일본에서 일본 재료를 써서 만들어 일본인에게 준, 일본인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라고 표기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단순히 만든 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미술사의 영역 안에.. 2023. 8. 11.
번교의 근대교육기관으로 전환의 사례: 요네자와번 흥양관 일본의 에도시대 번교藩校가 근대교육기관으로 어떻게 전환되었는지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요네자와번米沢藩에는 에도시대, 번사藩士를 교육하는 번교가 있었는데 이름을 흥양관興譲館이라 하였다. 1697년, 공자를 모셔 석전釈奠하는 학문소를 사적으로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1776년부터 요네자와번의 공식적 교육기관이 되었다. 공자 제사와 교육 기능을 겸비하였으니 정확히는 우리나라 향교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興譲館(こうじょうかん)は、江戸時代の出羽国米沢藩主上杉治憲の命により、上杉綱憲の学問所を再建して成立した藩校である。ここでは主に江戸時代のことについて記載する。 創立・再建 1697年(元禄10年)6月15日に上杉綱憲が以前から孔子を祀る行事である釈奠を行っていた儒臣矢尾板三印の邸宅に学問所を設置、同年11月29日には同じ邸内に釈奠の会場となる聖堂.. 2023. 8. 11.
[국내 박물관 현황과 연혁] 예산 추사고택과 추사기념관 ➀ 추사고택 현황 ❍ 위 치 :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 면 적 : 토지(75필지, 137,969㎡) 건물(12동, 2,209㎡) ㆍ군유 22,541㎡(33필지)/국․도유 15,003㎡(21필지)/사유 100,425㎡(21필지) ㆍ고택(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추사기념관, 추사체험관, 화순옹주홍문, 관리사, 안내소, 창고, 화장실 2개소 ❏ 추사고택 연혁 - 1976. 3. 29. : 추사고택 정화사업 지시 - 1976. 4. 9. : 추사고택 매수 - 1976. 9. 4. : 추사고택 정화사업 착공 - 1977. 6. 27. : 추사고택 정화사업 준공 - 1977. 9. 22. : 충청남도 추사고택관리사무소 설치 - 1980. 1. 1. : 예산군 이관 및 추사고택관리사무소 설치 변.. 2023. 8. 11.
맨홀과 맨홀 따까리는 구별해야 남들은 전연 그리 여기지 않는데 혹 나만 혹 그런가 해서 못내 쪽팔리기는 하다만, 암튼 맨홀이라고 하면 대뜸 우리는 구멍이 아니라 따까리를 떠올리는데 혹 나 같은 사람 더 있을까 싶어 새삼하게 이 문제를 끌어낸다. 맨홀이란 manhole 이라, 그를 지칭하는 용어로 영어에서는 utility hole 이라든가 maintenance hole, 혹은 sewer hole 같은 유사 표현들이 있나 본데, 그 어떤 경우건 모두가 hole이지, 여기에는 그 따까리 뚜껑에 대한 개념이 없다. 나아가 그것을 수식하는 말에 따라 적절히 씀을 보는데, 유틸러티야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 마련한 구녕이 다기능임을 말해서 하수구 구멍도 되고 통신케이블 구멍도 된다 해서 쓸 것이요 maintenance야 주로 통신설비를 염두에 둔.. 2023. 8. 11.
우즈벡 답사기: 에필로그 약 일주일 정도 짧은 여행이었지만, 유적 답사 외에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해서 느낀 단상을 몇 가지 정리해보려 한다. 먼저, 첫 느낌은 거리가 너무 깨끗하다는 거였다. 도로며, 인도며 쓰레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원이나 유적지에는 환경정화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무엇보다 꽃과 나무 키우는데 진심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공근로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길거리 화단에서 잡초를 뽑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본다. 샤흐리시압즈 공원에서 가로수로 뽕나무가 무척 많았다. 실크로드 도시들이라서 그렇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개인 집앞 화단이나 가로수들은 대부분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더욱이 이 무더운 날씨에 화단마다 물을 그득그득 흘러 넘치게 주고 있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 2023. 8. 11.
일본 근대적 교육기관의 기원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본의 메이지 이전 교육기관의 상당수는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넘어왔는데 이는 일본전통의 보호 같은 한가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일본은 한국과 같은 "학교" 전통이 약하다. 에도시대 이전 제대로 된 "학교"가 없었다. 헤이안시대에 우리의 국학에 해당하는 것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고대의 학문전통은 중세시기에 사찰의 승려와 귀족들을 통해 전수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바뀐 것은 에도시대부터였다. 막부는 막부학문소 (지금의 유가와세이토: 탕도성당), 각 번은 번교를 만들고 그 아래에는 데라코야가 있어 한국의 성균관-서원(향교)-서당과 유사한 형태의 전근대적 교육제도가 완성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경우 "교육의 기원"은 막부학문소, 혹은 번교로 보는 시각이 매우 강하다. 한국은.. 2023. 8. 11.
서원철폐는 혹시 경복궁 중건 때문이 아닌가? 필자도 전혀 확인한 부분은 아닌데, 서원철폐: 1865년 경복궁 중건: 1865-1868년 이 부분을 보면 사실 서원철폐가 경복궁 중건 때문이 아니었는지 강하게 의심한다. 요는 서원 철폐 후 대량으로 나왔을 그 땅, 토지 등 재물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만약 국고로 들어갔다면, 결국 경복궁 중건의 재원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것이 만약에 맞다면, 나라의 학교를 헐어다 궁궐을 지은 셈이 되겠다. 이건 물론 필자도 실증적으로 확인 못한 부분이라, 단지 심증일 뿐이라는 것만 알려둔다. *** 이는 중요한 지적인데 서원 철폐가 단순히 서원 문에 빗장을 거는 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경복궁 중건은 막대한 재원, 특히 목재를 필요로 하는데 그 목재를 신부재.. 2023. 8. 11.
당파 없앤다고 학교를 다 때려 부순 흥선대원군 이하응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지만 의외로 아는 부분이 많지 않다. 대원군은 당시 당쟁의 온상이자 민폐의 진원지인 서원을 없앤다 하여 각광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서월철폐후 조선땅에는 40여 개 잔존 서원을 제외하면 서당 외에는 교육기관이 일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원철폐 후 이를 대체하는 교육기관을 국가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정황을 보면 아마 사실일 것이다. 대원군-고종 연간 상황을 보면 이 시기가 일본 메이시시대에 거의 대응하는데 필자가 이 시기에 조선왕실이 조금만 제정신이고 똑똑했다면 나라가 식민지까지는 가지 않았으리라 이야 하는 부분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근대적 교육기관은 개화를 하게 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을 것.. 2023. 8. 11.
서원철폐 : 1864년 1864년. 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 서원을 다 문닫게 하고 딱 47개소만 남긴다. 이 서원철폐령은 당시까지 서원의 운영이 당파를 만들고 주변 백성에 대한 수탈의 진원지라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서원은 당파의 온상이기도 했겠고, 수탈의 폐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여기는 어디까지나 교육기관이기도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후기, 향교가 사실상 유명무실화한 상황에서는 서원이야말로 지역사회 교육의 중심이었던 것은 사실 아닌가? 문제는 이런 서원이 철폐된 후, 그 교육기관 공백을 어떻게 대책을 세워 보완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서기 1864년 이후 조선은 서원이 철폐되고 사실상 서당 이외에는 교육기관이 사실.. 2023. 8. 11.
서당, 서원, 향교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한국에는 20세기 이전 수 많은 교육기관이 있었다. 서당, 서원, 향교, 그리고 성균관이 있었다. 여기서 20세기 이후 정규 교육기관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경우는 몇이나 될까? 놀랍게도 그 숫자는 1이다. 성균관만 살아 남았다. 그것도 사립으로. 20세기 이전, 그 많던 교육기관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20세기 이전의 교육기관들은 20세기의 개막과 함께 모두 다 살처분되어버렸을까? 조선땅에는 1920년대까지도 서당이 2만 5천개, 대원군의 서월철폐령 이전까지 서원수가 1700개에 달했다. 이 많은 수의 교육기관이 단 하나도 20세기 이후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그 폐허 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일제시대의 식민지교육: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이.. 2023. 8. 10.
[국내 박물관 현황과 연혁] 저탄소 녹색성장을 표방한 상주 자전거박물관 1. 상주자전거박물관 상주자전거박물관은 전국 최초의 자전거 전문 박물관으로서 2002년 남원동에 첫 개관하고, 저탄소 녹색성장에 발맞추어 자전거 문화 발전과 이용 활성화에 이바지하고자 2010년 10월 도남동으로 확장 이전하였다. 2014년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자전거 및 자전거 관련 유물의 기증, 기탁, 구입을 통해 유물 수집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물관 시설은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로, 지하1층에는 제1수장고, 지상1층은 기획전시실과 4D영상관, 지상2층은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2020년에는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보다 다양한 자전거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세계 자전거 역사 코너 등 상설전시실을 리모델링하고 로비에는 전시시설을 설치하여 현대식 자전거와 경기용 자전거를 전시.. 2023. 8. 10.
[국내 박물관 현황과 연혁] 공립박물관 선두주자로서의 상주박물관 1. 상주박물관 우리박물관은 상주시민들의 오랜 염원 속에 10년이 넘는 준비기간을 거쳐 2007년 11월 2일 문을 열었다. 고대 사벌국과 고녕가야의 발상지인 상주는 낙동강을 기반으로 형성된 드넓은 농토와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어 눈이 향하는 곳마다 옛사람들의 자취가 담긴 유·무형의 문화유산과 만날 수 있다. 상주박물관은 그러한 상주의 역사를 담아 상주에서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낙동강 주변 신상리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 문화를 유물의 수집, 조사, 연구, 전시, 교육 등을 통해 관람객들과 소통하고 있다. 본관의 상설전시실과 농경문화관의 네 곳 전시실을 비롯해, 어린이체험실, 전통의례관, 세미나동, 야외전시실 및 생태 연못, 야외 발굴체험장, 야외 바닥 전통놀이 공간 등으로 .. 2023. 8. 1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