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0968 이양하가 신록을 예찬한 청송대聽松臺 신록예찬 이양하李敭河(1904~1963)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프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 마음이 비륵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처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을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종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 2023. 6. 5. 파주 오두산성 2차 학술발굴조사(상보) 아래 소식에 대한 상보다. 깨뜨린 그릇·성벽 배수구 확인한 파주 오두산성 2차 조사 깨뜨린 그릇·성벽 배수구 확인한 파주 오두산성 2차 조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는 경기 파주시 오두산성에 대한 두 번째 발굴조사에서 처음 쌓은 성벽과 고친 성벽이 교차하는 양상을 비롯해 성벽과 관련된 배수구 흔적을 확인했다고 historylibrary.net *** 개요 ○ 조 사 명 : 파주 오두산성 2차 학술발굴조사 ○ 조사지역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62번지 일원 ○ 조사유형 : 발굴(문화재청 허가 제2022-0968호) ○ 조사면적 : 140㎡ ○ 조사기간 : 2023년 04월 10일 ~ 5월 12일(실조사일수 19.6일) ○ 시 행 자 : 파주시청 ○ 조사기관 : (재)가디언문화유산연구원.. 2023. 6. 5. 깨뜨린 그릇·성벽 배수구 확인한 파주 오두산성 2차 조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는 경기 파주시 오두산성에 대한 두 번째 발굴조사에서 처음 쌓은 성벽과 고친 성벽이 교차하는 양상을 비롯해 성벽과 관련된 배수구 흔적을 확인했다고 조사 의뢰기관인 파주시가 5일 밝혔다. 문화재청 국고보조사업으로 추진한 이번 조사를 어디에서 실시했는지 파주시 보도자료는 침묵하는데, 저번 조사를 실시한 데가 (재)가디언문화유산연구원(원장 오승환)이었음을 고려할 때 아마 이쪽이 아닌가 한다. 사진을 통해 발굴양상을 본다. 이 배포사진이 성안에서 성벽을 통해 물을 빼내는 배수구 시설일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이것이 이번 발굴조사 양상인데 아마도 이것으로써 초축성벽과 보축성벽 교차 양상을 운위했을 것이다. 위쪽에 보면 파삭 내려앉은 그릇 하나가 보인다. 아래에서 자세히 본다. .. 2023. 6. 5. [전시소식] 서울역사박물관 찬란한 은빛보물 전 저번주 개막한 상해역사박물관 교류전 일환이라 저곳 소장품 중 주로 은제품을 잔뜩 가져다 놓았다. 하나하나 살필 여력이 되지 못해 위선은 전시장 풍경만 사진으로 소개한다 생각해줬음 한다. 보니 근현대기 가까운 시대 세공품이 많다. 2023. 6. 5. 원주 용수골꽃양귀비축제[with 서곡사지 석탑] 계절은 이미 여름으로 들어선지 오래다. 오늘 한낮의 뜨거운 햇살은 누가 뭐래도 여름이었다. 여름꽃 축제는 6월 말 쯤에나 볼 수 있을 듯하여, 거의 마지막 봄꽃 축제 현장 한 곳을 찾았다.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용수골마을에서 개최하는 '용수골양귀비축제'는 자연 경관이 뛰어난 마을에 매료되어 귀농한 마을주민이 평소 꽃을 너무 좋아해서 2005년, 300평의 작은 밭에 취미삼아 심었는데 의외로 많은 관람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각광을 받게 되자 2007년부터 마을 주민과 ""대표축제""로 키워보자며 시작하였고, 올해 제16회째라고 한다. 홈 | 꽃양귀비마을 (modoo.at) [꽃양귀비마을 - 홈]강원도 원주 서곡리에 위치한 용수골 꽃양귀비마을입니다poppystore.modoo.at 축제 마감 이틀 전이라,.. 2023. 6. 4. [전시소식] 대구근대역사관 ‘대구大邱에서 만나자 -1910년대 광복光復을 꿈꾼 청년靑年들’ 특별기획전 (재)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 소속 대구근대역사관은 오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대구大邱에서 만나자 -1910년대 광복光復을 꿈꾼 청년靑年들-’ 특별기획전을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특별기획전은 ‘대구지역 독립운동사 돋보기’ 전시로, 1910년대 대구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광복회’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했다. 1915년 8월 25일(음 7.15.) 국권 회복과 독립을 꿈꾸던 청년들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했다. 광복회(대한광복회로 불리기도 함)는 1910년대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비밀결사조직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가장 격렬히 행동했던 단체였다. 대구근대역사관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열린 도시’ 대구가 만들어낸 독립운동인 ‘광복회’ 활동을 통해.. 2023. 6. 4. 노필盧弼과 [삼국지집해] by 김영문 *** 이하는 삼국지 배송지 주 완역을 앞둔 김영문 선생 페이스북 글이다 *** * 노필은 중국 근현대 시기 정사 [삼국지] 고증과 연구에 막대한 공적을 남긴 유명한 장서가 겸 고증학자다. 그는 1876년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셴타오(仙桃)에서 태어나 1967년 텐진(天津)에서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후베이의 유명한 서원인 경심서원(經心書院)과 양호서원(兩湖書院)에서 공부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한 때 중화민국 정부 국무원 비서로 재직하며 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으나, 평생 고서를 모으고 고증하는 훈고 작업에 전념했다. * 노필의 스승 양수경(楊守敬)은 청말 민초 시기에 금석, 서예, 여지, 화폐, 장서 등 부문에서 83종의 저서를 남긴 대학자다. 양수경의 대표저서.. 2023. 6. 4. 해태, 지역연고제에 발목잡혀 붕괴한 제과제국 남영동 사저에서 직선거리로 대략 삼백미터 거리에 있는 크라운해태제과다. 해태가 망하고서 같은 제과 계열 크라운제과에 흡수되어 바꾼 이름이 저거다. 해태라는 상표를 버릴 순 없다 해서 저리 명명했을 것이다. 저 해태제과는 박건배 제국이었고 1980년인가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그 프랜차이즈로 광주로 확정한 해태타이거즈를 품음으로써 더 유명해졌지만 이건 실은 독이었다. 가뜩이나 호남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해태한테 호남은 절대존재기반이었지만 성장을 막았다. 호남을 박차고 전국 기업으로 가야했지만 프로야구는 그 길을 막아버렸다. 그런 환경이 요새 같으면야 외려 장점으로 더 크게 작용할 수 있겠지만, 지역연고제를 기반 삼은 그 시대의 한계였다. 저 해태 본사를 볼 때마다 그런 상념을 지울 길이 없다. 물론 뻘.. 2023. 6. 4. [전시소식] 부산박물관 역관 특별전 부산박물관에서 최근 개막한 특별전 "조선의 외교관, 역관"을 돌아봤다. 다른 말은 안 하겠습니다.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우선 사진으로 특별전을 소개합니다. 2023. 6. 4. 일제시대 교육제도 일제시대 교육제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제 고만 공부하고 먹고 살 궁리나 해라"다. 보통학교, 실업학교가 그렇고, 고등보통학교도 졸업하면 상급학교 진학 포기하고 먹고 살 길 찾아 나서면 되는 "최종학력" 학교다. 전문학교도 그렇다. 그만 하면 됐으니 이제 너 먹고 살 길 찾으라는 학교다. 여길 나와서 공부 더하라는 학교가 아니다. 이게 최종 학력이니 고만 공부하고 됐으니 취직하라는 학교다. 그렇기 때문에 중등교육이건, 고등교육이건, 대학교 진학이건 간에 조선땅에서 공부해가지고는 진학이 쉽게 풀리지가 않는 것이다. 일본이 통치 말년까지도 똑같은 햇수를 공부해도 중학교는 고등보통학교로 부르고, 전문학교 외에는 고등학교 대학을 일체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그걸 만드는 순간 일본제국의 교육제도에 완전히 .. 2023. 6. 4. 요즘 마음 속 저장하는 즐거움 : 박물관 교육은 이런 것이 재미있다! 입버릇처럼 늘 말하곤 했다. 쉬운 일 따윈 없다고. 엄살 같은 말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그렇다. 멀리서 볼 때는 쉬운 일이었는데, 막상 내가 하려면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관람객들이 그냥 보고 지나치는 짧은 네임텍 조차 쉽지 않다고, 네임텍 원고를 쓸 때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진심으로 남들에게 말했다. 이런 내 말에 ‘네임텍 따위 그다지 길지도 않은데’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최근에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어려움이 생겼다. 요즘의 나에게 어려운 일 최근에 과를 옮겼다. 교육 업무는 그래도 간간이 해본 적은 있으나, 본격적인 업무가 된 것은 처음이다. 초등학생 교육은 직접 진행도 해본 적이 있으니 적응할 만 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것만큼은 땀을 삐질삐질 흘려야했다.. 2023. 6. 4. 윤동주와 "방계입학" 일제시대 조선에는 대학이 거의 없어 전문학교 졸업생들, 특히 연전과 보전 졸업생은 많이들 일본으로 가 대학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는 많은 "전문대학"이 있었는데 이들은 졸업 후 어떻게 살아갔을까? 아래 위키의 "구제전문학교"항목에 답이 있다. 旧制専門学校における教育は完成教育であり、卒業生の大半は大学等に進学せず企業や官公庁等に就職して社会に出た。制度上は「傍系入学」という形で帝国大学等の官立大学に進学することも可能ではあったが、進学するものは少なかった。例えば横浜高工の場合、大正12年から昭和12年の15回の卒業者2081人のうち、上級学校に進学したものは37人のみであった。就職者は会社工場技術員1284人、官庁技術員372人等であった[8]。 구제전문학교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계속 공부하여 학문적 성과를 쌓아가는 과정.. 2023. 6. 4. 목소리의 볼륨을 낮춰야 할 식민지시대 연구 우리나라 일제시대 연구는 그 결론의 격앙됨에 비추어 보면 내용이 없다. 흥분은 있는데 팩트는 없다. 논문에서 일본인들의 속셈이 뭔지 다 가르쳐 준다. 드라마 대본에서 혹시 청중이 이해를 못할까봐 배우가 줄거리를 요약해주는 꼴이다. 술자리나 블로그에서나 나와야 할 감정의 토로가 논문을 횡행한다. 궁금해서 조금만 찾아보면 응당 있어야 할 초보적 팩트 규명도 안되어 있다. 일제시대 차별을 이야기하면서 일제시대 교육제도 변천에 대한 초보적 연구도 안 되어 있다. 기본적인 팩트 규명도 안 된 판국에 일제시대가 맞네 일제강점기가 맞네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런 자치통감 정통론 같은 소리를 하며 싸우는 거 보다는 일제시대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는지 그거나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이 어떻게 고생하고 .. 2023. 6. 4. 연희전문이 4년교육을 한 이유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의 생각을 써 본다. 연희전문이 3년이 아니라 4년 교육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추정된 것이 있는데, 필자 생각으로는 연희전문이 대학 승격을 노리고 있었다는 설이 옳다고 본다. 왜냐-. 연희전문이 4년 교육을 택한 것은 조선교육령에 의한 것이다. 조선교육령에 의하면 전문학교는 3년 혹은 4년 교육을 한다고 되어 있다 하였다. 3년이건 4년이건 선택해서 할 수 있다는 이야긴데 이 경우 대개 3년 교육을 택했다. 수업 연한이 짧을수록 빈궁한 조선에서는 많은 지원자가 올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앞에서 쓴 것처럼 전문학교는 의대를 제외하면 거의 3년제였고 의대는 전문학교이건 경성제대 본과이건 간에 모두 4년 제였다. 일본에서는 1919년 대학령 발효 이후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 2023. 6. 4. 일제시대의 지식인: [11] 이효석과 [12] 유진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은 당대 최고의 학벌을 가진 사람이었다. 평창공립보통학교 (1914-1920년) -- 경성제일고보 (1920-1925) -- 경성제대 예과 (1925-1927) -- 경성제대 본과 (법문학부 문학과, 영문학) (1927-1930) 이효석의 프로필은 일제시대 조선 교육이 완성되었던 당시의 교육제도를 잘 보여준다. 보통학교 6년 -- 고등보통 5년 -- 제대 예과 2년 -- 제대 본과 3년이다. 그 당시 이 정도로 순탄한 교육과정을 조선 땅에서 밟아 졸업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의 1년 선배라는 유진오 정도가 아마 그 예가 될것이다. 유진오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재동보통학교(1914-1918) --경성고등보통학교 (1919-1924)-- 경성제대 예과 (1924-1926) --.. 2023. 6. 4. 일제시대의 지식인: [10] 시인 이상 시인 이상은 잘 알려진대로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당시 공업전문을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신명학교(新明學校) (1921) -- 보성고보 (1926) -- 경성고등공업 건축과 (1929) --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 (기사?) 이것이 그의 프로필이다. 신명학교는 보통학교인데, 이상이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4년제였다. 4년제 보통학교-5년제 고보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전문학교)를 입학하는데 필요한 수업연한에서 2년이 모자라는데, 아마 이 당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식이라도 경과조치가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보성고보 5년 졸업 후에는 중졸 학력이 되어 경성고등공업에 입학했다고 한다. 경성고등공업은 전문학교로 고등학교 과정이다. 당시 경성고등공업은 3년제였으니 정확히 3년.. 2023. 6. 4. 돌아가는 삼각지는 소음천국 내가 사는 용산 남영동은 대통령실이 옮겨온 국방부 땅이랑은 빈껍데기만 남은 미군기지랑 전쟁기념관을 사이에 둔 지척이라 요샌 데모대가 이짝으로 몰려들어 걸핏하면 삼각지 로터리를 중심으로 교통 마비 내지는 체증이 벌어지거니와 평일 주말 가리지 아니하고 매일 저 꼴이 벌어진다. 가뜩이나 내가 근무하는 공장은 광화문이고 개중에서도 주한일본대사관이랑 그 공장 건물이 마주하는 바람에 집회시위가 잦으니 저 확성기 소리는 오나가나 참말로 고역이다. 이 삼각지로터리에는 용산초등인가 암튼 학교까지 있는데 매일매일 저 시끄러운 소리를 감내해야 하는 학교도 못할 짓인가 싶기도 하다. 삼각지 시위현장 한 켠을 보니 그 시위장 맞은편 인도에서 경찰 쪽에서 확성기 소음을 측정 중이다. 기준 소음이란 게 있는 모양이라 것도 주거 학.. 2023. 6. 4. 연희전문 문과 4년의 미스터리 이 부분이 참 미스테리인데. 연희전문이 당시 조선 유일의 문과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신기하지만, 그 조선유일의 문과를 4년제로 유지한것은 더 신기하다. 왜냐. 일제시대에 구제 전문학교는 3년 혹은 4년제로 되어 있었는데여기서 4년이란건 의대 때문에 만들어진 규정이란 건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공립전문학교 중 경성의전은 4년제였다. 나머지 기타 전문학교는 거의 모두 3년제였다. 심지어는 대학 본과도 일제시대에는 3년이었다 (의대 제외). 사실 연희전문이 4년제로 문과를 유지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4년짜리 전문학교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4년짜리 전문학교는 의대나 특수목적 학교 때문에 만들어 놓은 규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연전은 1920년대 당시 민립대학, 즉 .. 2023. 6. 3. 고보高普와 중학中學 일제시대 고보와 중학 이야기를 좀 써보겠다. 일제시대에는 중등교육기관으로 중학과 고보가 병존하고 있었다. 대개 중학은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였고, 여기를 졸업하면 큰 예외가 없는 한 더 공부하겠다면 일본 본토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조선에는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경성제대 예과로 갈수도 있겠지만 그 기회는 넓지 않았을 것이다. 고보는 반면 조선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였다. 일제시대 고보는 공립과 사립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공립학교의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에서 가장 먼저 생긴 고보는 경성고보이다. 이 경성고보가 나중에 경성에 공립 고보가 하나 더 생기면서 경성제일고보가 된다. 지금의 경기고로 이어지는 학교이다. 나중에 생긴 경성제이고보가 지금의 경복고이다. 경성중은 어찌 되었을까? 이 학교는 해방과 .. 2023. 6. 3. 일본 고등학생보다 일년 더 배웠던 연희전문 문과 원래 일제시대 구제 교육제도에서 의대를 제외하면 전문학교는 거의 3년이 원칙이다. 물론 전문학교 기간은 3-4년으로 정의되어 있지만 의대의 경우가 4년이고 나머지 학과는 거의 3년인듯 한데 재미있는 것은 연희전문 문과가 교육기간이 4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윤동주를 보자. 명동소학교: 6년 은진-숭실-광명중학교: 5년 연희전문: 4년 모두 합치면 15년 교육이 된다. 물론 윤동주의 경우 연희전문 문과를 4년 다녀야 졸업할수 있었지만 졸업반 때 전쟁관계로 6개월이 단축되어 3년 반만에 졸업했지만 그는 원래 연희전문 문과를 4년 다녀야 졸업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일본에 태어났다면,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고등학교 (3년)으로 총 14년 교육을 받으면 대학입학이 가능했을 것이다... 2023. 6. 3. [전시소식]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 "공평과 애정의 연대, 형평운동" "나"와 "너"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와 다른 너를 차별하고 못살게 굴면 안된다 - 고 우리는 배웠다. 그러나 그걸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많은 경우 "내가 저것들보단 낫지"하는 자기위안을 위해서라도 '나와 다른 이'들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와 가죽을 팔며 버들고리를 만들던 존재인 백정, 갑오경장(1894)으로 법제적 차별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들을 에워싼 차별의 굴레는 사라지지 않았다. 호적에도 '도'라는 글자가 따로 적히고,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예수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던 교회에서마저 백정은 차별을 받아야했다. 신도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면서 백정이 간다면 우리는 천국 안 갈란다고 했다던가. 갑오경장 이후 한 세대가 지나서야 이 땅의 백정들은 차별없이 공.. 2023. 6. 3. 이전 1 ··· 458 459 460 461 462 463 464 ··· 999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