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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 황룡사 중천을 지난 해가 서쪽 선도산 너머로 진다. 반세기 이승을 딩굴며 난 무엇을 남겼을까? 아니 남겨야 했을까? 空手로 왔다 空手로 갈 뿐이다. 2019. 5. 19.
그땐 다 그랬다 vs. 김원룡만 그랬다 세계 고고학상 유례없는 졸속발굴의 대표본 무령왕릉 발굴조사를 옹호하거나 혹은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리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다. 그게 우리의 수준이었다. 고 말이다. 이 유례없는 도발굴 총감독 김원룡은 내 머리가 돌았다느니 환장했다 하면서 그나마 이 졸속발굴이 곧이어 전개된 경주 발굴에서는 교훈으로 작동했다고 자위한 바 있다. 앞 사진은 황남대총 남분 발굴 현장이다. 아마 1974년 무렵일 것이요 무령왕릉 도굴로부터는 불과 3년이 지난 뒤다. 그때는 다 그러했는가? 그게 우리 수준이었는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김원룡만 그러했고 김원룡만 그런 수준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삼불은 고고학도, 발굴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김원룡의 수준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봐라..동시기에 일어난 발굴인데 천마총.. 2019. 5. 19.
납딱이 빼빼로 약사여래 휴일이라 집구석 틀어박히니 애꿎은 ocn 붙잡고 아이언맨이랑 놀다가 자빠다 일나다를 반복하게 되거니와 이래선 아니되겠다 싶어 기차표 끊어 천안아산에 내렸다. 뭐 그렇다 해서 특별히 갈 곳을 정한 것은 아니로대 내리면서 퍼뜩 생각한 곳이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와 그에서 대략 2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는 같은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납딱이 부처님이었다. 당간지주 거쳐 납딱이 부처님을 찾아갔다. 문화재 지정명칭은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牙山坪村里石造藥師如來立像 Stone Standing Bhaisajyaguru Buddha in Pyeongchon-ri, Asan 보물 제536호라,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산1-1에 소재한다. 인근엔 요새 용담사라는 절이 있어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기는 한데 인기척은 없고.. 2019. 5. 18.
Jusanji Reservoir in Cheongsong Located in Juwangsan National Park, Jusanji is a small reservoir. It is a man-made pond that was dug out in August 1720 and completed in October of the next year. The pond has been used as a source of water for agricultural use as well as for drinking. Even though it is small in size, about 100 meters long, 50 meters wide and 7 to 8 meters deep, the pond has never dried up from any drought. 靑松 注.. 2019. 5. 18.
보리밭 바라보며 뽕나무 숲에서 듣는 오디새 울음 한시, 계절의 노래(36) 시골길을 가며[村行] [당(唐)] 이중(李中) / 김영문 選譯評 눈길 끝까지 푸르른보리밭 가지런하고 들판 연못 넓은 물에온갖 오리 내려 앉네 햇볕이 따뜻하여뽕나무 숲 우거진 곳 한가하게 홀로 서서오디새 울음 듣네 極目靑靑壟麥齊, 野塘波闊下鳧鷖. 陽烏景暖林桑密, 獨立閑聽戴勝啼. (2018.05.20.) 망종(芒種)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한창 보리가 여물 때다. 보리밭 녹색 물결이 서서히 황금색으로 바뀐다. 지금은 남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보리밭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전국 방방곡곡에 보리밭이 지천이었다. 또 봄 가을에 누에를 먹여 고치를 치는 양잠업이 농촌의 중요한 일이라 집 근처나 밭둑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뽕나무 열매를 오디라고 한다. 처음에는 .. 2019. 5. 18.
[전시예고] 야수파전 <혁명, 그 위대한 고통> 야수파 입체파 중고교 미술수업에서 미술사조 변화라 해서 주입했거니와 그 와중에 마티스와 피카소를 알았으되 특히 후자는 아흔 넘어서인가 새장개 가서 자식을 두었단 말을 듣고는 아 정력이 센 양반인가 했더랬다. 모네인지 마네인지 벤또 까먹는 그림과 귀때기 짤랐다는 고흐 남태평양 갔다는 고갱 등등이 아른아른 어쩌다 야수파 화가들이 대거 서울행을 결행한다 하거니와 코바나콘텐츠라는 기획사인가 갤러리와 연합뉴스가 짝짜꿍해서 조만간 세종문화회관에서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다 하니 그때 자세한 소식 전하기로 하고 다만 오늘은 그런 자리가 조만간 있다는 맛배기 소식으로 갈음하고저 한다. 2019. 5. 18.
아버지, 고향, 사랑 아버지는 죽어야 애틋하고 고향은 떠나야 그리우며 사랑은 헤어져야 절절한 법이다. 2019. 5. 18.
범인은 이 안에 있어!-야외정원 모과사건 평화로운 온양민속박물관. 그런데, 동자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하, 정말 어이없다. 내 꼴 이렇게 우습게 한 사람 좋은말 할 때 나와라 진짜. -_- 넥타이까지는 이해해주겠는데 머리에 모과 머냐... 동자상이라고 우습게 보나본데, 내 나이가 몇개인데!! 나 범인 누군지 알 것 같음. 새로 들어온 신입인데, 며칠 전에 떨어진 모과 만지면서 하는 말이 가관도 아니었음. "아...아직 익지도 못했는데, 떨어져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구나. 너도 나와 같구나..." 혼자 듣고 있자니 오글려거려서 원!! 동자야,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남의 말만 듣고 그 사람을 의심하면 못쓴단다. 혹 네가 모과 향이 좋아서 머리에 올려 놓고 깜박한 건 아닌것이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마음에 든 미움을 풀거라. 저 양반 또.. 2019. 5. 18.
산세와 솔밭 우리네 산세는 볼수록 오묘하단 생각밖에 아니든다. 게슴츠레 약에 취한 듯 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때론 이빨 빠진 식칼 느낌을 주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캐서린 제타 존스 엉덩이 같다가 또 어떤 곳은 펑퍼짐 아줌마 허리 같기도 하다. 저곳은 얼룩지는 솔밭 음침한 듯 농염한 듯 참말로 묘하단 말로밖에 할 수 없다. 그래도 저곳엔 정념이 있고 살기가 있고 쟁투가 있고 안온이 있다. 산세와 솔밭은 그런 곳이다. 선산 도리사에서 2019. 5. 17.
아침은 I.M. 페이, 저녁은 소지섭 출근과 더불어 국제부에서 연락이 왔다. I. M. 페이 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별세했다는데, 인물 박스를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언론사 나와바리 개념으로 건축은 문화부 담당이라, 한데 우리 공장 문화부에는 건축 담당이 별도로 없어, 미술 담당이 겸한다. 뭐 미술 담당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물경 102세를 살다 간 저 중국계 미국 건축가가 혹 한국이라도 방문한 적이 있다면, 그때의 자료로써 이런저런 얘기를 묶어갈 터인데, 이 양반은 어찌된 셈인지 방한 전력이 한 번도 없다. 아마 미술 담당이 무쟈게 관련 자료 뒤진다고 고생했을 것이다. 익히 알겠지만, 논문 쓰기와 기사 쓰기는 다르다. 시간적 여유가 비교적 자유롭게 주어지는 전자에 견주어 후자는 언제나 불청객이라, 느닷없이 내려꽃히는 바람에 그 짧은 시.. 2019. 5. 17.
혼차 일나기 - 서저유이 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는 실은 민요였다. 80년대 이 시는 대구경북을 뒤엎었다. 연습장이며 책받침이며 온통 이 시였다. 그땐 작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저작권이 없던 때이니 문구 제조업자들도 누구 작품인지도 모른 채 마구마구 찍어냈다. 이 시절 소피 마르소와 피비 캣츠와 브룩쉴즈라는 책받침 모델 3대 걸물이 있었다. 그들 사진을 박은 책받침 앞장 혹은 뒷장엔 꼭 저 시가 있었다. 그 시절 대구경북지역 에프엠 방송에도 언제나 저 시였다. 마르소와 캣츠와 쉴즈는 선택이었으되 저 시는 필수였다. 저 와 책받침 쟁탈 이전투구를 벌인 다른 시가 있었다. 윌리엄 워즈워스 이었다. 내가 서울로 유학한지 며태만에 마침내 작자가 나타났다. 서정윤이라 했으며 교사라 한 기억이 있다. 갱상도에는 정유이라 부른다. 서정유이.... 2019. 5. 17.
Peony Surrounding Time Three story Stone Stupa at Seoak-ri, Gyeongju 慶州西岳里三層石塔 /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작약이 만발했다. Photo by Seyun Oh 2019. 5. 17.
창녕 비봉리유적 출토 통나무배에 대한 국립김해박물관의 해명 혹은 반박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2019.05.07 17:27(수정기준) 아래 제하 글을 게재했으니, 창녕 비봉리 유적 출토 8천년전 신석기시대 통나무배를 의심한다 그에 대해 뜻밖에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이 글을 접했는지 5월 15일자로 그에 대한 해명 혹은 반박자료를 보냈다. 내가 이런 반응을 얻고자 게재한 글은 아니어니와, 내가 이해하는 블로그 글이라 함은 자신의 생각은 비교적 자유롭게 펼치는 공간이라 생각하는 까닭에 다음과 같은 김해박물관 측 설명은 실은 놀랍기만 하다. 이와 관련해 나는 두 가지 말을 우선 하고 싶다. 1.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와 같은 해명 혹은 반박을 부르게 수고를 끼친 점, 국립김해박물관 측에 송구하다는 말을 남긴다. 2. 아무리 가볍게 한 말이라도, 그에 대해 이와 .. 2019. 5. 17.
뒤늦게 군번을 불러준 장경호 선생 2년전 오늘(May 17, 2017) 나는 수원 장안구 경수대로 1092에 위치하는 한울문화재연구원이란 데를 갔다. 해직기자 시절 막바지였던 듯 그때 내가 의욕만 앞세워 하고자 한 일 중 하나가 문화재계 원로들 증언채록이었으니 이 또한 그 일환이라 2층 이사장실로 장경호 선생을 찾았다. 한창 인터뷰 중인데 선생을 찾는 전화가 왔다. 대화를 엿들으니 국립문화재연구소 조모 박사였다. 내 인터뷰를 방해하고자 하는 공작임이 분명했다. 듣자니 작년 장 선생을 녹취한 자료집이 출간되는 모양이다. 백부만 보내달라고 선생이 말씀한다. 두 시간가량 걸린 인터뷰를 마칠 무렵 한울문화재연구원 창립자이자 원장인 김홍식 선생이 합류했다. 장 선생이 1936년 김 선생이 1946년생이다. 기억력에 장애가 생기고 말이 어눌해진 칠.. 2019. 5. 17.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5)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사실 주자가 회곽묘를 창안하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주자가 살아있을 당시 이미 그가 살던 중국 강남 땅에는 회곽묘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안 알려졌지만 중국쪽에도 우리와 같은 회곽묘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회곽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요장묘浇浆墓 혹은 삼합토 요장묘三合土浇浆墓라고 부른다. 이 무덤이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것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북송대에 속한다. 주희가 남송대 사람이므로 이 무덤은 주자가 생존하던 당시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셈이다.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역도 주희가 살던 양자강 일대로 내가 안다. 중국 쪽 자료에서 이 무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면 우리 회곽묘 만드는 방법과 .. 2019. 5. 17.
한국 최고最古 사찰의 쌍두마차 도리사와 직지사 구미 선산 도리사다. 이 심각성이 제대로 대두하지 않으나 신라 기준으로 이 도리사가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삼국 중 신라가 불교 도입이 가장 늦다 하나 현존 사찰 중 위치가 파악되는 한반도 최고最古 사찰은 선산 도리사다. 대서특필해야 할 장소다. 이 사진은 김천 직지사다. 도리사와 동시에 창건한 신라 사찰이다. 한반도 가장 오래된 사찰은 도리사와 직지사다. 경주가 아니다. 왜 김천과 선산인가? 소백산맥을 넘어 경주로 향하는 교통로인 까닭이다. 사기와 유사에 의하면 신라 불교는 눌지왕 시대 고구려를 통해 유입됐다.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에서 불교가 침투하는 격절이 바로 김천이었다. 그 고개가 추풍령이다. 그 고개 지나 경주로 가는 길목에 도리사가 있다. 나는 언제나 사찰을 모텔로 보며 고속도로휴게소에 견준다. 2019. 5. 16.
직지사와 지끼사 사이 직지사直指寺.. 신라에 제도로서의 불교를 도입한 시초인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에서 황악산을 바라보며 저 산 기슭이 절을 세울 만하다고 손가락으로 곧장 가리켜 세운 절이라 해서 이리 부른다 하거니와 김천에선 직지사라 부르지 아니하고 지끼사라 발음한다. 뭐 구개음화니 하는 말이 있으나 신뢰하지 아니한다. 그런 직지사, 아니 지끼사가 이리도 아름다운 줄 미쳐 몰랐다. 의무감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대덕산 수도산 기슭에 살 적엔 소풍 갈 데라곤 수도산 청암사 밖에 없었노라 했거니와 그래서 그런 청암사가 죽도록 지겨웠노라 토로했거니와 김천고 입학과 더불어 대덕산을 떠나 김천 시내로 자취생활을 떠난 내가 그 삼년간 김천에 살 때는 놀러갈 데라곤 지끼사밖에 없었다. 마치 청암사가 그러했듯이 지끼사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2019. 5. 16.
묘표墓表에 쓴 추사 글씨는 낯이 설다 추사 김정희가 만년에 쓴 비문, 임실서 발견송고시간 | 2019-05-16 14:07전주최씨 최성간 묘비…"장중하면서 짜임새 있는 작품" 광화문 복원 즈음, 그 현판 글씨를 어찌해야 할 지를 두고 한창 논란이 벌어지던 와중에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얼마나 진심을 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추사 김정희 글씨를 집자하는 방법도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못내 캥기는 점은 있는지, 내 기억에 스스로 말끝을 흐리기를 "한데 말이야, 추사 글씨는 현판에는 안 어울려" 라고 했다. 아마 어떤 기자간담회 석상이 아니었는가 싶은데, 실은 기자들 반응을 떠보고자 함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서 내가 받아쳤다. "추사는 경복궁과 전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추사는 경복궁을 구경조차 못해 본 사람이다." 뭐.. 2019.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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