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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출판이 흥하면 활자는 사라진다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에서 활자의 보급은 책값의 저하를 가져왔다. 조선에서 임진왜란 중 일본으로 도난 당한 활자-. 이 활자를 기반으로 일본은 임란 후 처음으로 찍어낸 책은 필자가 아는 한 조선의 활자를 기반한 활자본-. 그런데 정작 에도시대 상업적 출판이 발전하면서 임란후 전해진 활자 인쇄는 사라지고 목판인쇄가 이를 대체한다. 조선에서 활자인쇄는 분명히 목판인쇄보다 싸게 먹혔을 것인데, 그래서 활자인쇄가 계속 살아 남아 조선후기까지도 버텼을 터인데 일본에는 임란 이후 처음 반짝하다가 목판인쇄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이거다. 가격 경쟁력이 있던 활자인쇄가 그 메리트를 상실하고 목판보다 가격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왜일까? 독자층이 급증하고 화폐경제의 발달로 찍어내는 책 부수가 목판으로 찍어내도 충분히 가격.. 2025. 1. 28.
육국사, 고려실록, 구삼국사 우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동문선 기타 등등국보로 등재된 거의 모든 책들이 인출되어 나온 것이다 보니 인쇄본에 대해 좀 무감각해지는 감이 없지 않은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의 경우 헤이안시대까지의 역사를 담은 소위 육국사 모두 필사본으로 에도시대 이전까지 그 상태로 내려왔다. 목판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고려시대에 있었다는 실록. 임진왜란때까지 경복궁에 보관하다가 전란 당시 다 태워먹은 것으로 되어 있다만이게 무슨 인출본일 리가 없다. 필사본이었을 것이다.일본의 경우 육국사 중에 일본서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말이 역사서지 이건 전부 실록이나 다름없는 기록들인데전부 필사본이었다. 고려실록도 딱 한 부, 필사본이었음은 당연한 이아기겠다. 삼국사기 이전에 있었다는 구삼국사. 인출된 것일까.. 2025. 1. 27.
금속활자의 경제학 금속활자의 출현은 경제적인 문제였을 것 같다. 목판으로 뭔가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 적은 부수를 싸게 인출해 낼 방법으로 활자인쇄가 성행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목판 인쇄에서 대략 몇 부 정도 찍어내야 필사의 비용을 확실히 넘어설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목판인쇄, 활자인쇄 등등은 아마 돈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을 것 같다. 어떤 책이 왜 목판으로 나왔는가, 왜 활자로 찍혔는가, 왜 필사가 되었는가, 결국 돈 아니겠는가? 경제적 문제가 책의 형식을 결정했을 것이라 본다. 이것 남아 있는 문서들을 잘 살피면수학 공식화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이 공식으로 부터 당시의 인쇄와 관련된 경제적 사정을 역으로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editor's note ***  전통시대 한국 출판은 상업.. 2025. 1. 27.
인쇄의 경제학 한국 정도 나라의 크기 경제 규모에 독자층 규모를 생각하면경제적으로 더 유리한 것은 목판이 아니라 활자본 아니었을까. 목판인쇄를 하면 손익분기점이 대략 몇 부였을까. 몇 부는 찍어야 필사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을까.책의 두께도 중요할 것이다. 두꺼운 책일수록 활자가 유리할까 목판이 유리할까. 조선시대 우리 조상님들이라고 해서 책 인쇄 해 찍어 내는데 그 정도 수지타산도 안 따져봤겠는가 책을 딱 보면 목판으로 할지 활자로 할지, 목판으로 한다면 몇 부나 찍을지대략 견적을 내지 않았을까. 그러면 이러한 수지타산에 도저히 안맞는 목판 인쇄도 있었을 텐데, 그것을 필자는 고려시대 대장경 사업과 조선시대 송자대전 같은 것이라 본다마는, 이런 목판은 목표가 서책의 인출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책이야.. 2025. 1. 27.
조선시대 목판인쇄에 대한 의문 조선시대 활자인쇄는 그렇다고 치고 목판인쇄-. 목판인쇄를 하고 나면 충분한 부수가 인출되어 목판을 만든 수고와 경비를 상쇄하고도 남는 경우도 물론 경우에 따라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일본은 거의 목판이 없다. 에도시대 이전 이야기다 . 왠 만한 건 전부 필사본이다. 일본서기 고사기 심지어는 육국사까지도 에도시대 이전 흘러 내려오는 것들은 모두 필사본이고 독서층이 급증하는 에도시대 이후에나 이런 책들은 인쇄되어 산출되었다. 문제는우리나라 책들인데 우리는 물론 필사본도 많겠지만 인쇄본이 정말 많은 것 같다. 활자본은 그렇다고 쳐도 과연 이 많은 목판 인쇄본이 경제적으로 타당한 것들이었을까.예를 들어 팔만 대장경초조대장경까지 하면 16만장 이라는 건데 도대체 이 팔만 대장경 몇 부나 인쇄했을까. .. 2025. 1. 27.
[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5) 정월 15일은 절요와 통감 논술이다 삼국유사 역주본으로 국가기관에 의한 웹서비스까지 장착하는 바람에 가장 널리 활용되는 것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판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에는 당시까지 거의 모든 관련 연구성과를 집약했다 할 만한 노작이다. 그에서 사금갑을 역주하면서 저 사금갑 사건 발단이 되는 무대 천천정天泉亭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있다. 현재 천정정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신라 소지왕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정천에 행차하였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기사보다 자세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명색이 역사로, 고대사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자들이 아무도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을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내가.. 2025. 1. 27.
[외치이야기-5] 관광도시에서 연구도시로 바뀐 볼차노 볼차노는 전술한 것처럼 등산과 스키, 휴양의 도시였는데 이곳으로 30여년전 5천년 된 외치 할아버지께서 이 도시로 강림하시면서이 도시는 그 성격이 일변하게 되었다. 먼저 외치를 보존하고 관련된 유물을 연구하기 위한 전용 박물관이 건설되었으니, 그것이 앞서 설명한 남티롤 고고학 박물관(South Tyrol Museum of Archaeology)이다. 이 도시에는 외치 연구만을 위해 움직이는 연구소도 하나 있다. 미라를 위한 연구소인데, Institute for Mummy Studies라 한다. https://www.eurac.edu/en/institutes-centers/institute-for-mummy-studies Institute for Mummy StudiesSnapshots of the pas.. 2025. 1. 27.
[외치이야기-4] 볼차노 풍경 외치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볼차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외치가 알프스 꼭대기에 발견된 후 이 도시에 정착하기까지는 사실 우여곡절이 많은데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먼저 볼차노에 대해 좀 써보기로 한다. 외치란 이 도시에 모셔진 대략 5,000년 전 미라를 부르는 이름이지만 본명은 당연히 아니고 닉네임이다.왜 외치인가?아마 독자 여러분은 티롤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이 티롤이라는 지역은 반쪼가리가 나서 오스트리아에 속한 지역과 이탈리아에 속한 남티롤로 나뉘어져 있다. 이 티롤 일대를 외츠탈 계곡 알프스(Ötztal Valley Alps)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외치라는 이름이 왔다.쉽게 말해 티롤사람이라는 뜻 정도 되겠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다른 말로 티롤리안.. 2025. 1. 27.
[외치 이야기-3] 시체 보러 줄을 선 사람들, 볼차노 외치박물관 아래 글은 김단장께서 아래 시간에 올리셨던 글이다. July 12, 2018 at 2:49 PM · 볼차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 겸외치 이야기 3번째 토막으로 싣는다. ****관광은 굴뚝없는 산업이다.관광은 굴뚝이 없으나 줄은 있다.이태리 북부 읍내 볼차노Bolzano는 알프스 산맥 남쪽 기슭이라 자못 풍광 훌륭하나, 어제 말했듯 우리의 평창 정선 태백과 비슷한 곳이라, 그 풍광 자체가 썩 비교우위가 있다 하기 힘들다.   이곳을 대표하는 문화자산은 저 랜스케입과 더불어 외치Ötzi라는 신생 미라가 있으니, 1991년, 인근 해발 3200고지에서 등산객에 발견되고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거금 오 천년 전 신석기 말기 혹은 청동기시대 초기 주검으로 밝혀짐에 따라이곳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어 이곳 관광산업의 .. 2025. 1. 27.
정다산 상제上帝가 개독의 흔적? 종교사상사를 한다는 사람들은 매양 다산이 말한 상제上帝가 인격신의 면모가 있다면서 이는 그가 한때 심취한 기독신의 흔적이라 말한다.인격신이란 무엇인가?일반 사람이랑 매양 마찬가지로 성내고 지랄하고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는 존재라는 뜻이다.개독 침투 이전 동아시아 최고 신이라는 상제가 의지가 있는 존재인가?아니면 그 자신은 아무런 움직임이나 말이 없는 천하자연의 주인인가에 대해선 오랜 논쟁이 있었다.순자는 엿까라마이싱주의자라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하늘이 말이 있느냐 일갈했다.일식이 일어나면 우연의 소산일뿐 하늘의 소행이 아니라 했다.그 반면 동중서는 개독이라 모든 현상을 하늘의 뜻으로 돌렸다. 그런 점에서 동중서는 천지, 곧 툭하면 천지天志, 곧 하늘의 의지를 팔아먹은 묵자와 매우 흡사하다.나는 동중서가.. 2025. 1. 27.
도리사에서 조망한 금오산 선산 도리사에서 바라본 풍광이라, 대략 10년 전쯤이다. 저 앞쪽으로 불뚝 솟은 산이 금오산으로 알거니와 확실치는 아니하다. 김천이랑 경계를 이루는 해발 976m 금오산이 맞으리라 본다. 저 너머가 김천일 터이며 그 너머 자락에 갈항사 터가 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약탈하고선 내어놓을 생각이 없는 국보 삼층석탑 쌍탑이 있던 자리 말이다. 찍은 도리사는 널리 알려졌듯이 신라에 불교가 도래한 그 역사적인 장소다. 아도화상이 이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면서 절을 창건하니 그곳이 도리사요그에서 지금의 김천 황악산 기슭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저기가 절을 세울 만한 곳이라 해서 세운 절이 직지사直指寺니 직지사는 글자 그대로 손가락으로 가르켜서 점지한 땅이라는 뜻이다. 능선들이 주는 절묘함이 가장 아름다운 시즌이.. 2025. 1. 26.
[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4) 조선시대 지식인은 누구나 안 왕비 나는 계속 현대의 한국사 연구자, 특히 신라사 연구자들이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이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를 전제했다는 믿음하에 새로운 내용이 없다고 확신하고선 아무도 쳐다 보지 않았다는 말을 하거니와 실제 그랬다. 주변에 고대사로 수십 년 밥 벌어먹고 산다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 봐라.절요랑 통감 본 사람 있는지.없다. 그러기는커녕 그걸 왜 보냐 되묻는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견주어 뭐가 더 새로운 내용이 있냐는 뜻이다. 하지만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조선시대로 가면, 물론 삼국시대사를 누가 제대로 공부했겠느냐마는, 그래도 삼국 역사를 떠든 사람들은 모조리 삼국사기랑 삼국유사를 본 것이 아니라 실은 절요랑 통감을 봤다. 특히 후자 동국통감이 절대 교재였다.  간단히 말해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물론 절요랑 통감이 나.. 2025. 1. 26.
이 기사에서 배우는 교훈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5/01/26/V5MDACGJRJGSXL3XIQ2JD4UGE4/ “잘 처신하라” 왕이, 루비오와 첫 통화서 훈계성 성어 사용잘 처신하라 왕이, 루비오와 첫 통화서 훈계성 성어 사용 美언론 인삿말로 오역 헤프닝도www.chosun.com 왕이의 오만방자한 말을 미국 뉴스에서 줄줄이 오역했다는 이 기사-. 이 기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동아시아 사람이 가장 잘 아는 것은 확실하다는 말이다.  가끔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하버드대, 스탠포드대, 등등 미국 굴지의 대학 교수들이 한마디 하면 너나나나 모두 받아 쓰는 경우를 보는데걔들도 잘 모른다. 그 친구들이 한.. 2025. 1. 26.
[외치 이야기-2] 현대 미라 연구의 표준 외치는 1991년 발견되어 지금까지 35년 정도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사실상 현재까지 가능한 최신 연구기법이 거의 모두 적용되어 현대 미라 연구의 표준이 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외치가 발견되기 이전에 미라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대체로이집트 미라에 대한 연구, 남미 잉카 미라에 대한 연구가 있었고 70년대 중국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마왕퇴 미라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가 있었지만, 이런 연구는 모두 사실상 최신 연구기법을 보유한 유럽과 북미 대륙 권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를 충실히 적용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반면 외치는 발견된 직후부터 바로 전용 박물관과 연구기관이 수립되어 최근 몇십년간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적 연구기법이 나올 때마다 세계 초일류의 연구진들이 이를 적용하며 놀라운 .. 2025. 1. 26.
일당 대감 이완용의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대한제국시대 소설 중에 《몽견제갈량》이란 게 있다.1908년(순종 2) 유원표(1852-?)가 저술한 국한문혼용체 정치소설로, 유원표 자신이 비스마르크 전기를 읽다가 소르르 낮잠에 빠지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꿈 속에서 그 유명한 제갈량을 만나 동아시아 삼국, 특히 중국과 한국이 살아날 방법을 두고 문답을 주고받는 내용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있던 《삼국지연의》에 편승하는 듯 하면서도 정작 저자는 《삼국지연의》에 빠진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제갈량을 내세워 일종의 '이이제이'를 시도하였다고 한다.애국계몽(갑자기 소름이...) 운동기에 적잖이 나타난 몽유록계 소설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몽견제갈량》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천하역적 일당 이완용(1858-1926)이 역시 꿈.. 2025. 1. 26.
[외치 이야기-1] 순동시대의 유럽인 인류학적으로 볼 때 완벽하게 미궁에 빠져 있던 것이 바로 유럽에 금속문화가 막 시작되던 순동시대다. 순동시대는 청동기보다도 앞 시대로서 chalcolithic period라고 부른다. 아래 그림에서 금속기가 퍼져 나가던 대략 기원전 3000년 즈음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는 이집트에 이미 문명의 서광이 비쳐 기자에 대피라밋이 만들어지기 보다도 약간 이전이 된다. 유럽에서도 이미 신석기시대는 훨씬 이전에 시작했으므로 농경과 유목이 자리를 확고히 잡고 있었을 때라 하겠다. 유럽의 이 시대는 고고학적으로는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인류학적으로는 완벽히 미궁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지중해 건너편 이집트만 해도 수도 없이 발견되는 미라 연구를 통해 동시기의 사람들과 그 사회에 대한 정보가 많이 축적되고 있는 상황이었..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6): 에필로그 [2] 슈겐도 즉신성불 수행은 어떤 사람들이 했을까. 슈겐도 행자는 자연 속에서 수행하던 사람들-. 이들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전부 즉신불이 되기를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슈겐도 행자 중 즉신성불 수행에 들어간 사람들은 행자들 중에서도 그 위세가 대단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행자들 중 버젓한 절에서라도 자리 잡아 있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즉신성불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즉신성불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가진 것이 별로 없던 분들로 이들이 즉신성불의 고행을 택하여 스스로 즉신불이 되기를 선택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즉신불 성인들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에도시대에 살던 사람들임에도 행장이라고 할 만한 이 분들의 일대기가 자세히 남아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 2025. 1. 26.
김유신을 전면에 끌어올린 학술대회[2] 극단의 시대 저 학술대회가 표방한 슬로건 ‘흥무대왕 김유신, 새로운 해석’은 김창겸 형이 밀어부친 제목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저 제목 실은 마음에 안 들었다.왜 굳이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한정하느냐 하는 불만도 없지 않았고, 저리 되면 문중 냄새가 짙게 나는 까닭이었다. 이 불만은 설계 단계에서 내가 우회로 표출은 했지만, 그러고는 말았다.형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더구나 고향 선배이고, 당시 학회장이었는데 내가 더는 어찌할 수는 없었다.그런 점에서 보면 형은 어쩔 수 없는 김해김씨 아닐까 싶기도 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한다. 아무튼 제반 준비를 거쳐 학술대회를 공지하게 되었으니, 당시 학술대회 안내문이다. 보다시피 안내문은 내가 작성했다. 현대의 저명한 어떤 역사가는 20세기를‘극..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5): 에필로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사건의 동기를 합리적으로 해석한다는 명분 하에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여러 가지 당시의 명분을 너무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슈겐도 즉신성불 고행을 한 행자들에 대해서도이들이 왜 이렇게 해야 했는지 그 배경을 찾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하지만사실 가장 간단한 설명은 이들의 열정적인 종교적 신념이다. 산속을 헤메며 수련하고 죽기 전 상당기간을 곡기를 끊고 나무열매를 먹으며 옻을 달인 차로만 연명하던 그들이 뭐 그렇게 대단한 부귀영화와 명성을 노렸을까. 그들이 밝힌 대로 대자대비, 중생구제를 위해 내 한 몸 던지겠다는 종교적 신념 외에는 설명할 길이 많지 않다. 오늘날 이러한 즉신불에 대해 우리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볼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 2025. 1. 26.
포항 삼국시대 목곽묘가 선사한 추정 옥벽玉璧 포항 흥해 남성리고분군 Ⅰ구역 삼국시대 41호 목곽묘 평면도와 추정 옥벽(玉璧)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국내 삼국시대 유적 출토품으로는 특기할 만한 유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436. 추정 옥벽(도면 143, 사진 154)목곽 내 북쪽, 동장벽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일부 결실되었다.내외면은 암올리브색, 속심은 회색을 띤다. 평면은 중앙이 관통된 원형이고 단면은 세타원형이다.현 길이 5.2㎝, 너비 5.5㎝, 두께 0.2㎝, 공경 1.9×1.9㎝, 무게 8.85g 437. 추정 옥벽(도면 143, 사진 154)목곽 내 북쪽, 동장벽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일부만 잔존한다. 내외면은 암올리브색, 속심은 회색을 띤다. 평면은 중앙이 관통된 원형이고 단면은 세타원형이다.현길이 5.0㎝, 현너비 1.7㎝, 두께 0.. 2025. 1. 26.
나이 죽음 이야기만 하다 끝난 견한잡록 칠순 팔순이 넘어가면 본능으로 죽음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직 그 나이는 아니지만 환갑 앞두고 벌써 내가 언제 훅 갈지 모르겠다는 상념을 떨칠 수가 없는데, 저런 노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더구나 평균수명이라 해 봐야 마흔도 되지 않았을 조선시대로 들어가서 본다면 어떻겠는가?앞서 안경이 초래한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잠깐 조선 중기를 살다간 심수경沈守慶이라는 사람을 소개한 적이 있다. 1516년, 중종中宗 11년에 나서, 과거 급제하고는 출세가도를 달려 훗날 좌의정까지 역임하고는 장장 84세 장수를 누리다가 1599년, 선조 32년 눈을 감았다. 특히 말년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 난국을 만나서도 살아남았으니, 그러고도 천수를 누렸으니 이런 사람이 팔순에 접어들면서 어떤 생각들로 살았을지 짐작하고도.. 2025.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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