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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6) 선화는 진평왕의 서녀였으며, 무왕의 후궁이었다 이 상장돈장 족도族圖에는 문제의 선화가 善花 라는 표기로 나타난다. 한데 선화는 진평왕의 정실 공주가 아니다. 이를 보면 선화는 신라 진평왕의 여러 후궁 중 한 명인 애리愛理라는 여인에게서 난 딸이다. 후궁의 딸이니 선화는 서녀다. 적통 공주가 아니다. 조선시대 관념으로 보면 옹주翁主다. 옹주가 이웃 나라 왕의 정부인으로 가겠는가? 볼짝 없이 선화는 백제 무왕에게 던져진 후궁이었다. 한데 신통방통하게도 저 미륵사 봉영사리기가 발견되고, 그를 통해 백제 무왕의 정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것으로 드러났다. 후궁 선화가 어찌 미륵사를 창건한 발원자로 나타나겠는가? 선화공주가 무왕의 정비라는 삼국유사 기록은 원천에서 오류였다. 다만 왜 오류를 빚었는가 또한 궁구해야 한다. 그가 후궁이건 정궁이건, 신라의 공주.. 2024. 1. 12.
삼국지와 위략 전술한 내용을 다시 풀어 쓴다. 삼국지의 배송지 주는 출전이 다 다르다. 배송지가 자기 의견을 밝힌 부분도 있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 특히 한반도 국가들의 경우에는 그 출전이 거의 모두 위략이다. 따라서 삼국지 동이전은 진수의 삼국지와 어환의 위략, 이 두개 사서가 혼재해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진수의 삼국지에 배송지가 주를 붙였다기 보다. 두 개의 동시기 사서가 같이 혼재해 있으므로 진수의 원전과 배송지의 주는 적어도 삼국지 동이전의 한국사 기사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에 차이를 둘 수 없다는 뜻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아래. 위략, 이라고 써있는 부분이 바로 배송지가 위략에서 인용해와서 주를 붙인 부분이다. 거의 위략 그대로 따온 것을 알 수 있다. https://zh.wikisource.org/.. 2024. 1. 11.
연세대박물관 애비슨 특별전 백수한테 이른 오전 기상은 군대 끌려가는 이상의 고역이다. 그런 상태로 무슨 병원 무슨 센터 가서 피 뽑고 걷고 달리기를 하라니 얼마나 더 큰 고역이겠는가? 병원 창문 너머로 익숙한 건물이 들어온다. 그래 빨랑 끝내고 저기나 들려보자. 그 관장은 틀림없이 박물관에 없을 테니 서 모가 있으면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고 삼층 박물관 사무실 들어서 보니 역시 예상대로 관장실은 불이 꺼진 상태고 서모를 불렀으나 가는 날 장날이라고 오늘부터 휴가랜다. 오르는 길목 일층 특별전시실 보니 애비슨 특별전 한다는 간판 요란하기에 그곳으로 옮긴다. 어차피 대학박물관 상설 코너야 거기가 거기라 바뀐 데도 없어 휙 지나쳤다. (*** Avison을 애비슨 이라 표기하는데, 어느쪽이 맞는지는 일단 몰라서 둘 다 병기해 둔다.) 슥.. 2024. 1. 11.
아는만큼 보이는가 연구자로서 성공하는 첫 발은 자기 눈을 믿는 거다.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본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따르면 되는 거임. 연구자로서 실패하는 첫 발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믿고 따라가서 그 논리를 자신이 본 팩트에 외삽하는 작업이다. 하긴. 우리나라는 주자 때부터 최근의 촘스키까지이른바 외국 대가의 논리를 그렇게 내가 본 사실에 외삽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는지 한 번은 반성해 봐야겠다. 자기 눈을 믿는 것이 성공의 첫발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 안다는 게 뭔가가 문제겠지. 2024. 1. 11.
멀리서 보면 평지, 가까이서 보면 급경사인 할미산성 용인 할미산성. 둘레 651m정도의 작은 산성이다. 발견 시 삼국시대 산성으로 알려졌다가, 시굴조사에서 신라의 부가구연대부장경호 라는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산성으로 추정되어 200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할미산성의 원래 이름은 알 수 없고, 조선후기 지리지나 읍지 등에 노고성(老姑城), 고모성(姑母城)이라고 불렸다. 전국에 같은 이름의 산성이 많은데, 대부분 “마고할미” 전설과 연관이 있다. 그런데 유독 용인의 이 산성만 “할미산성”이란 이름으로 지정되었다. 명칭은 한자를 한글로 풀어쓴 걸로 보이는데 한글 이름이 붙은 산성으로는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원래 이름이 알려진 성곽이 많지 않은 탓에, 기록에 나오는 산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연구가 많지만, 용인 할미산성은 추정되는 이름도 없다... 2024. 1. 11.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폭력성(2) 간단하다. 내가 뭐가 궁금해 물었는데 아는 만큼 보여. 더 공부하고 와. 하면 기분 좋니 안 좋니? 기분 더럽다. 네 똥 긁다 쓰불넘아 그래서 저 말은 문화재를 시민대중사회로부터 유리케 하는 말이다. 모르면 빨랫판? 그래. 이 쓰불넘아 나 무식하다 어쩔래? 왜 저 말은 폭력인지 유감없이 드러난다. 저 딴 말 집어쳐야 한다. 사람을 젤로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 너 무식하단 말이다. 그래 나도 이 말 자주 쓴다. 다만 유식하다 뻐기는 놈들한테만 쓴다. 진짜 내가 아는 게 없다 생각하는데 너 무식하다? 칼 맞는다. 2024. 1. 11.
준왕이 기자의 후예라는데 대하여 준왕이 기자의 후예라는 것을 현대 중국인들은 철석같이 믿는다. 그러니 위키에서는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을 기자조선이라고 아예 써 놓는다. 그들로서는 역사서 써 놓은 그대로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볼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준왕이 기자의 후예라고 믿지 않는다. 이건 일종의 모함이라고 생각한다. 전공자분 중에는 이 시기를 예맥조선이라 한 분도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지만 구태여 여기서 논란할 생각은 없다. 사실 준왕이 기자의 후예라고 해 봐야 40여세 손이라 되어 있다. 40여세 손.. 필자가 속한 집안의 시조로부터 필자는 35세 손이다. 40여세 손이면 기자의 후예건 뭐건 믿거나 말거나다. 본인이 기자의 후예를 자처했더라도 그쯤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기자의 후예였을 수도.. 2024. 1. 11.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말,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면서 왈, 팔만대장경판도 모르면 빨랫판이라 그래 언뜻 들으면 솔깃하고 그럴 듯하다. 하지만 한 꺼풀 뒤집어 보면 문화재업계를 지배하는 저 말이야말로 문화재를 시민대중에서 유리케 하니 왜 그런가? 첫째 앎과 모름의 무식한 이분법이니 안다는 말은 곧 유식이요 모른다 함은 곧 무식이니 이에서 극심한 식자와 무식자의 차별을 전제한다. 둘째 그 안다는 주체의 문제이니 이 앎은 언제나 특정한 교육을 받고 특정한 지식을 장착한 자를 전제하니 기타는 우수마발 무지몽매라 이 무지몽매를 겨냥한 윽박과 훈육을 전제한다. 셋째 이에서 어느 일방으로부터 다른 일방으로의 일방적인 훈시를 전제하니 이 강고한 질서가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정치라 저 말은 철인정치의 새로운 버전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그 속내는 어떠한가?.. 2024. 1. 11.
발목지뢰 마름쇠는 이리 뿌렸다 귀전살도鬼箭撒圖라는 제목이 붙은 전쟁통 그림 중 하나로 출전은 《고금도서집성 경제휘편 융정전 제300권 古今圖書集成·經濟彙編·戎政典·第三百卷》이다. 말 그대로 귀전鬼箭을 뿌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깡통에 담은 귀전을 뿌리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저 무기를 모양을 따라 마름쇠라 하거니와 삼각형 모양 철심이라 사람이나 특히 기병을 제압하고자 적들이 오갈 만한 길목에다 뿌렸다. 국내 산성 주변에서 흔히 발견된다. 일종의 발목지뢰인 셈인데 도전이 있으면 응전이 있는 법. 어찌 저걸 돌파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이 자석이다. 자석 갖다 대서 다 수거해버리면 된다. 2024. 1. 11.
어쩌다 나는 잡탕학이 되었는가? 모르겠다. 이것저것 하도 걸쳐 보지 아니한 데가 없고 비록 오십 이전에 국한하기는 하나 읽지 않은 책이 없다. 그리하여 혹 남들 눈엔 저 놈은 모르는 게 없고 걸치지 아니한 데가 없다 할지 모르나 나 진짜 잡탕학 맞다. 이 잡탕학은 고질이 있어 어느 하나는 죽어라 파는 일이 없어 금새 실증을 내 버리고선 딴 데를 찾아튄다. 잡탕학 근간이 바로 이것이라 무불통지한듯 하나 실상 깊이 아는 데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역사? 이것만 해도 내가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가 하면 고려사 씹다 거란사 씹다 로마사 씹다 에트루리아 씹다 하는 중이며 에라이 이걸로 만족치 못하다 해서 여진으로 튀었으며 이 게걸스럼이 끝나면 또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르겠다. 청사는 통독한 적이 없지만 25사 표점본을 머리맡에 두고 만지작거리는 중.. 2024. 1. 11.
인신引伸, 바느질의 경우 강민경 선생이 이규보가 읊은 바느질 시를 보며 잊어먹기 전에 차기箚記를 겸해 적어둔다. 저 바느질이라는 말 말이다. 바늘로 하는 놀이 혹은 행위를 일컫는 말인데, 문자 그대로는 바늘을 통한 옷수선을 말한다. 하지만 바느질은 그 본래하는 의미를 박차고 일어나, 바늘에서 유래하는 행위 전반, 곧 꼭 바늘이 아니라 해도 바늘이 수행하는 옷 수선 전반을 의미하는 뜻으로 발전했으니 그것을 인신引伸이라 한다. 이 인신이라는 말은 동사이아 한자문화권에서는 특히 사전이 필두하는 소학小學에서 자주 보이는 말로 의미 영역 확장을 말한다. 단, 인신에도 바운더리가 있기 마련이라, 그 원초적 의미는 지닌 채 퍼져간다. 같은 소리 같은 글자인데 전연 다른 뜻이라면 이건 실은 계통이 달라서 전연 별개하는 소리 혹은 문자가 있다가.. 2024. 1. 11.
남자가 바느질을 하다니? 이규보의 기롱 애처가 눈빛처럼 하얀 비단 치마 밟아 찢어지니/ 踏破香紈雪色裙 뉘 집 휘장에서 탁문군卓文君 희롱했나 / 誰家帳底弄文君 부인께선 삼가 바느질일랑 그만두시고 / 細君愼勿加針線 앞으로는 무산에서 운우 꿈 꾸시구려 / 又向巫山染雨雲 - 전집 권5, 고율시, "이중민 군이 치마를 꿰맨 일을 희롱함" *** Editor's note *** 남자가 바느질을 해서는 안 되는데 백운거사 이규보 친구가 마누라 대신해서 바느질을 한 모양이라 그걸 희롬삼아 시로써 읊었다. 이 시에서 건져내야 할 것은 바느질이 적어도 이규보 시대에는 여성의 전유물로 통했다는 점이다. 이는 보희 문희 김유신 김춘추 축국 이야기에서도 여실히 증언한다. 다시 말해 적어도 이 시를 기준으로 신라시대 이래 이규보 시대 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바느질은 .. 2024. 1. 11.
일본의 1리는 언제 4킬로가 되었나 일본은 1리가 4킬로미터다. 우리가 대략 10리가 4킬로이므로 일본의 1리는 우리의 10배 정도에 달한다. 따라서 10리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라면 4킬로 정도로 얼마 안되지만, 일본은 40킬로 정도나 된다. 언제부터 이렇게 1리가 10배나 차이가 나게 바뀌었을까? 도량형이 이렇게 급변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검색해 보면, 일본도 원래는 10리가 4킬로였다. 일본의 고대문화는 초기에는 한반도, 후기에는 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므로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헤이안시대가 종식되면서, 율령시대가 끝나면서 일본의 리는 10리가 4킬로로 고정되지 않고, 각지마다 중구난방으로 리의 거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중에 1리가 4킬로짜리는 시대로는 헤이안시대까지도 올라가는 모양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 2024. 1. 11.
윤관의 북벌이 당긴 여진의 통일 열망이 마침내 동아시아를 진동하다 거란이 한창 강성할 시기, 아마도 성종 연간 무렵 거란 최대 판도를 보여주는 지도라 해서 항용 들곤 하는 전형의 모습이라 물론 저에서도 문제는 없지는 않아 무엇보다 북쪽 판도가 과연 저와 같았는가는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때는 지금과 같우 국경선 개념이 확실치 않은 데가 많아 선보다는 빗금으로 국경선을 그어야 하는 데가 많다. 또 하나 저것이 근대 이후 국경 혹은 영역 판도로 곧바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저 당시 동아시아 절대 패자는 거란 요나라였고 명목상은 주변 제국이 다 굴복했으니 고려 서하는 물론이고 송나라까지 신속했으니 관념상으로도 또 어느 정도 실질로도 요나라 천하였다. 하지만 실질로 따지고 들어가면 저 판도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으니 동쪽만 보자. 이쪽이 문제인데 그 남쪽 고려는 말.. 2024. 1. 11.
탈상脫喪과 49재齋, 거상居喪을 줄이기 위한 몸부림 탈상은 글자 그대로는 상복을 벗는다는 뜻이라, 이 탈상을 통해 비로소 상주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탈상하지 아니한 기간이 바로 상중喪中인데, 이 상중을 얼마로 삼느냐 해서 孝를 절대 가치로 앞세운 동북아시아에서도 적지않은 논란이 있었으니 공자가 3년상을 제기한 이래, 이것이 줄곧 대세였을 듯하지만, 이 3년상도 실상을 따지면 27개월과 25개월 설로 맞섰고, 아주 혹가다가 액면대로 해석해서 36개월을 지내는 일도 있었지만, 대세는 아니다. 27개월과 25개월은 권력투쟁도 끼어 후한시대 이래 동아시아 경전해석의 양강 구도를 형성한 정현인가 마융인가 어디를 따르느냐에 따라 정해졌다. 이 3년상은 공자 당대에 벌써 너무 길다고 문제가 되어, 논어를 보면 누구더라? 그의 제자 중에서도 열라 부자로 공자의 시종일관.. 2024. 1. 11.
1915년과 1917년 능산리고분을 가르는 중대한 분기선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문화재로 발견된 때가 1915년이다. 이를 백제시대 왕릉으로 재발견한 이가 흑판승미 黑板承美 구로이타 가쓰미 와 관야정 關野貞 세키노 다다시다. 이들은 이해 7월, 각기 다른 통로로 부여에 왔다가 우연히 삽자루 들고는 능산리를 파기 시작했으니, 이를 통해 비로소 사비시대 묘제墓制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본다. 다음 조사는 곡정제일 谷井濟一 다니이 세이이치에 의한 1917년 발굴. 이 두 시기 조사 사이에 중대한 제도 변화가 있게 된다. 문화재 보존을 위한 총독부령과 그 시행세칙이 제정 시행되고, 그 운용을 위한 기구로써 고적조사위원회가 출범한다. 단군 이래 없던 강력한 문화재 보호정책이 시행에 들어간다. 이 법률을 통해 비로소 무엇이 문화재인가가 확정된다. 봤는.. 2024. 1. 11.
청동기 문명의 포지션 한국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청동기문명에 둔다. 청동기시대의 문명. 쉽지 않은 이야기다. 필자가 아는 한 청동기시대에 기반한 문명은 거의가 단일 민족, 단일 국가의 민족사적 흐름에서만 놀고 있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는 무엇 때문인지 문화적 수준의 단절성이 간취되는데 당장 진한 제국과 전국시대 이전만 해도 그렇다. 한국사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질적 수준의 제고가 삼국시대 이전과 이후로 차이를 두고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고조선을 단순히 민족사라고만 보고 그 안에서 이것저것 분석하려 하니 청동기시대 문명으로서의 특수성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다. 고조선을 좀 더 편하게 놔줘야 그 문화적 특징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까. 이를 한국사에 묶어 두고 한민족 최초의 국가의 틀안에서만 보려 하니 역.. 2024. 1. 11.
태대각간, 옥상옥에 다시 얹은 집 안록산 사사명의 난이 낳은 최고 스타는 곽자의와 이광필이었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 기미가 있는 시점에 급하게 황제 자리에 오른 숙종이 이미 "두 사람은 더 이상 전공을 포상할 방법이 없는데, 안록산의 난이 평정되면 무슨 자리를 덧붙여 주는가"를 걱정할 정도였다. 이런 고민에 똑같이 봉착한 이가 신라 문무왕이었다. 신라가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하자, 그 최대 공신 김유신을 포상할 방법이 없었다. 군신이 머리를 싸맸다. 모르긴 해도 이런 말이 오갔을 것이다. "저 영감을 달래긴 해야는데, 이미 직급도 대장군이요 대각간인데 자칫하면 삐질 텐데 도대체 뭘로 보상한단 말이요?" 이런 고민이 한참 이어지다 누군가 이런 제안을 냈다. "대각간이 최고 아입니까? 그럼 대각간 우에 한자리 더 만듭시데이" "거 좋은 생.. 2024. 1. 11.
삼국지와 배송지 주 일반적으로 동이전을 읽을 때 삼국지보다 배송지주의 신빙성을 아래에 두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배송지가 삼국지 진수보다 후대의 사람이라는 것 때문인듯 한데, 삼국지에서도 동이전은 위략을 인용해 놓은 것이 많은데 위략의 저자는 어환으로 이 사람은 진수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삼국지에 붙인 배송지주는 위략을 인용해 놓은 것인데, 위략과 삼국지 원전은 성립연대가 거의 비슷한 시기였던 책일 가능성이 많아서 동이전의 배송지 주만큼은 위략을 인용한 이상은 삼국지 원전과 비슷한 비중을 두고 봐야 옳다고 본다. 배송지가 진수보다 후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배송지주가 신빙성이 낮다? 글쎄. 최소한 동이전에 대해서 만큼은 이런 선입견은 맞지 않을 듯 하다. *** Editor's Note *** 이 문제는 편집자가.. 2024. 1. 11.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5) 무왕 왕비가 선화공주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익산 미륵사 석탑 봉영사리기가 발견, 공개되기 전에 이미 나는 여러 번 단언했다. “선화공주는 때려죽여도 백제 무왕의 정비(正妃)일 수는 없다. 정비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자칫 대통령이 탄핵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다가 결코 그리 하지 않은 새누리당 대표 이 머시기 꼬라지가 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렇게 장담했다. 나는 내 저 장담이 내 생전에 증명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데 정말로 느닷없이 출현한 백제시대 금석문이 백제 무왕의 정식 왕비는 신라 출신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 사탁적덕의 딸임을 폭로했다. *** previous article ***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4) 화랑세기 자매편 상장돈장上狀敦牂과 선화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4) 화랑세기 자매편 상장.. 2024. 1. 11.
고려 현종은 불륜의 씨앗, 과부가 된 조카 며느리랑 바람난 왕욱王郁 고려사 권 제90 열전 권 제3 종실宗室에 실린 고려 현종 아버지 왕욱王郁 행적은 다음과 같다. (태조 왕건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은 살던 집이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었는데 경종景宗 비妃인 황보씨皇甫氏 사제私第와 가까웠다. 경종이 훙서하자 비는 〈대궐을〉 나와 그 집에 살았는데 왕욱과 더불어 드디어 불륜해서[烝] 임신하게 되었다. 일이 발각되자 성종成宗은 왕욱을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 보내며 일러 말하기를, “숙부께서 대의大義를 범했기 때문에 유배 가게 되었으니, 삼가 애태우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내시알자內侍謁者 고현高玄에게 명령하여 압송하게 했는데, 〈고현이〉 돌아가게 되자 왕욱이 시를 지어 주어 이르기를, “그대와 함께 같은 날 서울[皇畿]을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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