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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良夫) ☞량부(良夫) 2018. 3. 13.
장훤(長萱) 첨해니사금 때 이찬으로서 서불한이 되어 국정을 관장했다. 삼국사기 권 제2(신라본기 제2) 첨해니사금 : 2년(248) 봄 정월에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으로 삼아 나라의 정치에 참여시켰다. 2018. 3. 13.
부여경사(夫餘慶司) 백제 제21대 개로왕 이름이다. 백제 왕실은 부여에서 나왔다 해서 부여(夫餘)를 성으로 썼으므로, 풀네임은 부여경사다. 삼국사기 권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 즉위년 : 개로왕(蓋鹵王)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개로왕(蓋鹵王) 2018. 3. 13.
경사(慶司) ☞부여경사(夫餘慶司) ☞개로왕(蓋鹵王) 2018. 3. 13.
개루왕(蓋婁王) 백제 제4대 왕이다. 재위기간은 서기 128∼166년. 기루왕 아들이다. 재위기간 북한산성을 쌓았으며 신라와 충돌하기도 했다.삼국사기 권제23(백제본기 제1) 개루왕 조 : 개루왕(蓋婁王)은 기루왕 아들이다. 성품이 공순하고 행실이 올발랐다. 기루가 재위 52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4년(131) 여름 4월에 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했다. 5년(132) 봄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10년(137) 가을 8월 경자에 형혹(熒惑)이 남두(南斗)를 범(犯)했다. 28년(155) 봄 정월 그믐 병신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신라 아찬(阿) 길선(吉宣)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탄로나 도망해 왔다. 신라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돌려달라) 청했으나 보내지 않았다. 신라 왕이 노하여 군사를 거느.. 2018. 3. 13.
근개로왕(近盖鹵王) 백제 제21대 개로왕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1대 개로왕(盖鹵王)은 근개로왕(近盖鹵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경사(慶司)이다. 을미년에 즉위해 20년을 다스렸다.☞근개로왕(近蓋鹵王) ☞개로왕(蓋鹵王) ☞근개루(近蓋婁) 2018. 3. 13.
개로왕(盖鹵王) 백제 제21대 왕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는 '蓋鹵(개로)'라 씌었으나 같은 말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1대 개로왕(盖鹵王)은 근개로왕(近盖鹵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경사(慶司)이다. 을미년에 즉위해 20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은 문주(文州)라고도 한다. 개로(盖鹵)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즉위했다. 도읍을 웅주(熊川)로 옮겼다. 2년을 다스렸다.☞개로왕(蓋鹵王) 2018. 3. 13.
개로왕蓋鹵王 백제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55~475년이다. 이름이 경사慶司 혹은 경餘이며, 근개루近蓋婁)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수리군(加須利君)으로 나타난다.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며 부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와 충돌해 그 정벌을 위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고구려 반격을 불러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대군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그 자신은 포로로 잡혀 아차산 아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 권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 조 : 개로왕蓋鹵王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14년(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2018. 3. 13.
근개루왕(近蓋婁王)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을 일컫는 다른 칭호. 이보다 앞선 백제 선조왕으로 제4대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6)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근(近)'은 이 선대 개루왕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접두사로 생각된다. 큰(大)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고, 글자 그대로 가깝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 즉위년 : 개로왕(蓋鹵王)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삼국사기 권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475) :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를 좋아하였다. ..(중략)...이에 도.. 2018. 3. 13.
고운(高雲) (B) 원래 고구려 왕실 후손으로 북연왕이다. 아마도 조부 고화(高和) 무렵에 중국에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 : 17년(407)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정]을 베풀자 북연 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갈래로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였을 때 운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내렸다. 2018. 3. 13.
고운(高雲) (A)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재위 492∼519) 이름이다. 고구려 왕실은 고(高)씨를 표방하고, 이름은 외자로 쓴 일이 많아 고운은 성과 이름을 합친 듯하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이름이 명리호(明理好)이니 개운(个雲)이라고도 하며 고운(高雲)이라고도 한다. 임신년에 즉위해 27년을 다스렸다.☞문자명왕(文咨明王) 2018. 3. 13.
라운(羅運)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재위 492∼519) 이름이다. 장수왕 손자로, 아버지 조다가 죽자 대손(大孫)으로 조부 사망과 더불어 즉위했다.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 즉위년 : 문자명왕(文咨明王)은 이름이 라운(羅運)이고 장수왕 손자다. 아버지는 왕자이며 고추대가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대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죽자 이어 즉위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이름이 명리호(明理好)이니 개운(个雲)이라고도 하며 고운(高雲)이라고도 한다. 임신년에 즉위해 27년을 다스렸다.☞문자명왕(文咨明王) 2018. 3. 13.
世紀(세기) 혹은 世記(세기) 혹은 세가(世家), 그리고 화랑세기(花郎世記) 실을 의미하는 糸(실 사)가 그 글자 의미를 한정하는 부수로 들어가 있는 데서 엿보듯이 '紀'라는 말은 본래 그물 주둥이를 오므려 조는 '벼리'를 의미한다. 이 벼리를 꽉 조으면, 전체를 갈무리한다. 이 글자는 아울러 記와 같은 발음, 같은 뜻으로 기록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기색은(史記》에서 '本紀(본기)'라는 말을 설명하기를 "紀者, 記也. 本其事而記之", 다시 말해, 이 경우 紀는 기록한다는 뜻이다. 그 사실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기록하는 까닭에 본기라 부른다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소위 말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에서 재위한 왕 순서를 따라 일어난 주요한 일들을 요약한 부분을 본기라고 한 까닭은 그것이 기전체 전체 역사서에서 벼리, 곧 가장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이런 紀를 응용한 말 .. 2018. 3. 13.
진달래에 질식한 참꽃, 소월 타도를 외치며 시위로 점철한 80년대 대학가에 느닷없이 김소월 열풍이 인 적 있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 운운하는 그의 시구가 어찌하여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뒷받침하는 선전구호가 되었는지 나로서는 참말로 기이하기만 하다. 본명 김정식인 그의 시 자체에는 그 어디에도 이런 저항성이 없다. 하기야 고전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고전은 시대를 복무하는 어용이다. 한데 그의 이런 시는 그 전에 이미 국어교과서에 실려 인구에 회자했거니와, 그러는 와중에 진달래의 폭력시대가 도래했다. 경상도 소백산맥 중턱 산골 출신인 나는 어릴 적에는 진달래가 무엇인줄도 모르고 자랐다. 이 진달래를 우리는 '참꽃' 혹은 그 변질로 봐야 할 '창꽃'이라고 했다. 저 꽃은 이보다 조금 뒤에 피기 시작하는 찐득찐득.. 2018. 3. 13.
아버지들이여, 제때 죽어주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이름대로 백수를 했다. 그의 아들로 세자는 조다(助多). 아버지가 무려 왕위에만 79년간 있다 죽었을 때 조다는 죽고 없었다. 조다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문자명왕이다. 아버지가 하도 왕 노릇 오래하는 바람에 먼저 죽었으니 이름 그대로 쪼다가 되어 버렸다. 그보단 못하지만 조선 세종 역시 장장 32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로 아버지가 재위 3년째인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 세종은 모든 실권은 아버지 이방원에게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러니 세종이 왕위에 재위한 기간과 문종이 세자로 있은 기간은 같다. 내가 놀랍기만 한 것은 이 긴 기간 문종이 내리 죽죽 세자로 있었다는 점이다. 세자나 태자 생활은 왕보다 더 힘들다. 언제건 틈만 나면.. 2018. 3. 13.
"역사는 자고로 막장드라마여야..." 작년, 아니 재작년 어느날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조금 빠른 시기였을 수도 있다. 김옹 책이 조만간 나오리라 마침내 그날 밥상머리에서 그 마누라한테 처음으로 통보했더니, 아니 이 영감이 탱자탱자 놀더니만, 그래도 책은 썼나 보네? 하면서 이내 눈이 초롱초롱해지는가 싶더니, 무슨 내용, 무슨 책이라 묻기에 블라블라 했더랬다. 그 말에 마누라가 이내 눈을 부라리면서 일장으로 훈시하기를, "내가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궁중 암투나 여인 질투 같은 주제로 승부를 보라고? 그리도 모르느냐? 역사도 막장이어야 먹힌다는 걸?" 하되, 이내 翁이 밥맛이 떨어져, 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지 않겠느뇨 하며, 슬며시 숟가락을 놓고는 집을 나갔더라. 2018. 3. 12.
국정농단이 부른 미디어환경 변화 CNN 시대가 있었다. 걸프전이 초래한 뉴스전문 채널 전성시대의 서막이었고 실제 한동안 CNN은 총칼을 앞세워 전성기를 구가했다. 알 자지라 시대가 있었다. 사담 후세인 몰락과 함께한 미국의 이라크 정벌전은 또 다른 뉴스 전문채널 시대의 확인이었다. 작년에 터진 국정농단. 어느 막장 드라마보다 극적 반전을 거듭한 이 드라마는 시청자를 다시금 TV채널로 불러모았다. 뉴스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파생상품들인 썰전이니 하는 각종 토크쇼 전성시대를 초래했다. 하루종일 이 채널 저 채널 돌리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데 그 중심에 위치해야 하며 스폿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뉴스전문 채널은 고전을 면치 못해 존재감을 상실했다. 그에 가야할 하일라이트는 뉴스전문채널이 아니라 JTBC를 필두로 하는 민영 케이블 종편.. 2018. 3. 12.
기자들은 공짜밥 얻어먹는 족속이라는데 대하여 소위 김영란법 제정 시행에 즈음해 그 적용대상으로 들어간 기자들과 관련해 저 제목과 같은 인식이 '의외로' 기자사회를 벗어난 일반 사회에는 광범위하다. 저런 인식 혹은 비아냥에 두어 마디는 적어두어야겠기에 오지랍주의 발동해 내 경험을 통해 몇 자 적고자 한다. 기자를 저리 보는 근저에는 무엇보다 기자를 단일한 층위로 보는 시각이 작동한다. 하지만 기자라 해도 왕청나게 달라, 중앙지냐 지방지냐에 따라 다르고, 종합일간지냐 전문지냐에 따라 또 다르고, 방송이냐 신문이냐 혹은 통신사냐에 따라서도 또 다른 측면이 많다. 그리고 그 청렴도라 할까 하는 것도 저런 성격별로 평균을 논하면 매우 다르다. 저 공짜밥 먹는다는 기준에서 내가 보기에 가장 깨끗한 언론 중 하나가 조선일보다. 갖은 욕을 얻어먹는 조선일보지만,.. 2018. 3. 12.
"기자들은 골프 공짜로 치나요?" 작년 꼭 이맘쯤 중학생 주말여행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경주 답사가 예정된 모양이라 경주 지역 고고학 발굴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강연이 끝날 즈음, 질의응답 시간에 내가 곤혹스러웠던 두 가지 질문이 있었다. 첫째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힘은 뭐냐? 둘째 기자들은 자기돈으로 골프를 치지 않는다는데 맞냐? 첫째에 대해선 뜬금없지만 악으로 깡으로라고 말했고, 둘째는 김영란법 시행 이전엔 대체로, 혹은 많이 그랬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왜 골프를 경멸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내가 본 기자들의 골프 문화를 이야기했다. 내가 되물었다. 대체 그 얘긴 어디서 들었느냐 했더니 김용민 팟캐스터란다. 아..중학생들도 그걸 보는구나. 내가 한마디 더 했다. 공짜 골프, .. 2018. 3. 12.
나카 미치요(나가통세. 那珂通世. なかみちよ) 嘉永 4년 1월 6일(1851년 2월 6일)~明治 41년(1908) 3월 2일. 明治時代 일본 역사학자이자 동양사(東洋史)라는 개념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창안한 인물이다. 盛岡藩 번사(藩士)인 藤村盛德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이름이 荘次郎(莊次郞)이다. 번교(藩校)에서 성적이 뛰어나 14세에 藩校 교수이기도 한 漢學者 那珂悟楼의 청원으로 나카 가문[那珂家] 養子가 된다. 명치유신明治維新 뒤에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들어가 영학(英學)을 배웠다. 그후 사범학교 중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일하는가 하면, 뒤에는 치바사범학교(千葉師範學校)와 동경여자사범학교(東京女子師範學校) 교장으로도 일하면서 여성 교육에 진력했다. 그뒤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學校)와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교수가 되고, 동경제.. 2018. 3. 12.
사학잡지(史学雑誌. 史學雜誌. 시가쿠잣시. しがくざっし)와 ‘회고와 전망’ 《사학잡지(史学雑誌)》는 일본의 財團法人 史学会(사학회. 史學會)가 발행하는 월간 학술지로 歷史學 전문을 표방한다. 창간은 1889年이며 일본에서는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잡지 중 하나로 꼽힌다. 매년 제5호는 ‘회고와 전망’(回顧と展望)을 게재하는데 그 前年에 이뤄진 역사학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한편, 그를 통해 향후 역사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점검한다는 점에서 이 분야 종사자들에게는 必讀으로 통한다. 台植案 : 이 ‘회고와 전망’(回顧と展望. Retrospects and prospects) 운운하는 타령이 그대로 이 땅에 수입되어 허구한 날 회고와 전망만 일삼는 게 한국 역사학이다. 이 《사학잡지》는 월간지다. 그럼에도 1년에 고작해야 네 번밖에 잡지를 내지 못하는 한국 역사학회 기관지 .. 2018.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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