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17779 고국원왕(故國原王) 고구려 제16대 왕.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이름이 사유(斯由)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2년(332) 봄 2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중 노인, 병자들을 두루 위문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 3월에 졸본에서 돌아왔다. 4년(334) 가을 8월에 평양성을 증축했다. 겨울 12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5년(335) 봄 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6년(336) 봄 3월에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갔다.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9년(339)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쳐들어 와서 그 군사들이 신성에까지 미치게 되자.. 2018. 2. 19. 송활(宋活)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9년(349)에 왕이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나라로 보냈다. 연나라 왕 [모용]준(雋)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바꾸고 중위(中尉)로 임명하였다.☞송황(宋晃) 2018. 2. 19. 송황(宋晃)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9년(349)에 왕이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나라로 보냈다. 연나라 왕 [모용]준(雋)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바꾸고 중위(中尉)로 임명하였다.☞송활(宋活) 2018. 2. 19. 주씨(周氏) 미천왕비이자 고곡원왕 어머니. 모용황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바 있다.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 2018. 2. 19.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2018. 2. 19. 무(武) 고국원왕 동생이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2018. 2. 19. 쇠(釗) 고구려 고국원왕 이름이다. 사유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이름이 사유(斯由)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6대 국원왕(國原王)은 이름이 쇠(釗)인데 사유(斯由)라고도 하며 강상(岡上)이라 일컫기도 한다.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 18년(472)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고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 2018. 2. 19. 국강상왕(國罡上王)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이름이 사유(斯由)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고국원왕(故國原王) 2018. 2. 19. 조리(助利) ☞창조리(倉助利) 2018. 2. 19. 삽시루(歃矢婁) 고구려 봉상왕 이름이다. 상부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본기 즉위년 : 봉상왕(烽上王)은 이름이 상부(相夫)이며 서천왕의 태자다.☞봉상왕(烽上王) ☞상부(相夫) 2018. 2. 19. 상부(相夫) 고구려 봉상왕 이름이다. 삽시루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본기 즉위년 : 봉상왕(烽上王)은 이름이 상부(相夫)이며 서천왕의 태자다.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4대 봉상왕(烽上王)은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상부(相夫)이다. 임자년에 즉위해 8년을 다스렸다.☞봉상왕(烽上王) 2018. 2. 19. 여노(如孥)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 나라와 단씨(段氏)ㆍ우문씨(宇文氏)를 달래 함께 모용외(慕容廆)를 치게 했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牛酒]을 보내 위로했다.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음모한다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고 했다. [모용]외가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 2018. 2. 19. 최비(崔毖) 중국 진(晉)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이자, 동이교위(東夷校尉)로 있다가 민제(愍帝) 때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한테 쫓겨나 고구려 미천왕 20년(319), 고구려로 도망쳤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망명하기]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 나라와 [선비족 갈래들인] 단씨(段氏)ㆍ우문씨(宇文氏)를 달래 함께 모용외(慕容廆)를 치게 했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牛酒]을 보내 위로했다.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음모한다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 대인(大人)인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 2018. 2. 19. 사유(斯由) 고구려 고국원왕 이름이다. 미천왕 태자로 즉위해 다스리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흐르는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즉위년 :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이름이 사유(斯由)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6대 국원왕(國原王)은 이름이 쇠(釗)인데 사유(斯由)라고도 하며 강상(岡上)이라 일컫기도 한다.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본기 :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 2018. 2. 19. 소우(蕭友)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즉위년 :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니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한 장부가 배 위에 있음을 발견했다. 용모 비록 초췌하나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하며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니 국상이 여러 신하와 함께 왕을 폐할 것을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 해서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했습니다”. 을불이 믿지 못하고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아보십시오”라고 했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라.. 2018. 2. 19. 내가 데리고 산 기생, 20년만에 과부되어 다시 만나고파 아무리 첩이라 해도, 그가 어떤 남성과 과거에 살았건 그건 전연 흠이 되지 않았다. 그가 기생이었다 해서, 그것이 그를 첩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떤 주저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조선사회다. 어떤 점에서는 요즘의 한국사회 성관념과 비교해도 훨씬 혁신적이었고, 훨씬 선진적인 면도 있었다. 과거를 묻지 않았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다음 이야기는 그런 사정을 증거한다.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2018. 2. 19. 조선시대가 성 억압 사회? 기생이라고 정조 관념이 없다고 나는 이리 안이하게 보지는 않는다. 기생은 으레 그런 존재이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남자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가 배운 조선시대 통념, 성관념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는 본다. 물론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성 억압이 외려 기독교 시대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성 개방 시대였다. 혹자는 양반 사대부가에서만 성 억압 윤리가 통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저 밑에서는 욕망이 꿈틀대는데 양반 사대부가만 그렇지 않았다고?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뭐가 통념이 잘못되었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두 번.. 2018. 2. 19. 노익장 과시, 정력 자랑 여성이야 폐경은 곧 생산 단절이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아 기억에 피카소는 90에 자식을 봤다고 안다. 전통시대로 넘어가면 흔치는 않으나 70~80에도 가끔 후사를 생산했다. 당시 세태에서는 기록적인 장수를 한 심수경(沈守慶․1516~1599)은 건강관리를 잘했는지, 아니면 정력에 셌는지, 75에 자식을 낳고, 80에 다시 자식을 두었다. 그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는 이에 읽힌 이야기가 보인다. 뭐 어투는 남사스럽다는 것인데, 속내는 볼짝없이 자랑이다. 한데 저리 낳은 서얼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비가 곧 죽었으니, 그 보호를 받았을리도 없으니, 제대로 자랐다면 울분을 삼키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2018. 2. 19. 안경, 시각의 혁명 안경은 여로 모로 인류 문화사 혁명이었다. 안경은 세계를 넓혀주었으니, 무엇보다 시력에서의 문자의 해방이었다. 안경이 이 땅에 상륙하기 전, 글자가 작은 책은 시력이 좋은 일부 계층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안경이 없는 세상은 문자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남이 대신 읽어주어야 했다. 이런 거간꾼을 안경은 축출했다. 다음은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인데, 이 무렵까진 안경이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왔다 해도 그 쓰임이 광범위하기 못했나 보다. 육방옹(陸放翁)은 이름이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나라 시인의 대가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했다. .. 2018. 2. 19. 책력 혹은 역서, 시간의 독점 시간은 제왕의 독점물이었다. 공간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책력은 오직 제왕의 이름으로 공포되었으며, 지리지 역시 그러했다. 임진왜란은 그런 시간을 군주로부터 강탈한 사건이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는 39각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 2018. 2. 19. 묘갈과 지석 죽은 이 생전 행적을 간단히 혹은 자세히 적어 무덤에 세우거나 묻는 문서로 묘갈墓碣과 지석誌石이 있다. 묘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석이라, 봉분 바깥에 주로 돌판으로 만들어 세우거니와, 조선 후기에는 가끔 철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에 견주어 지석은 광중壙中에 묻는 것으로, 돌판 혹은 도자기 혹은 심지어 벽돌을 쓰기도 한다. 둘을 혼동하는 이가 의외로 많아, 마침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다음 구절로 증거를 삼고자 한다.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 2018. 2. 19. 이전 1 ··· 830 831 832 833 834 835 836 ··· 847 다음 반응형